무기력하게 돌아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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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미는 자신의 방을 향해 터벅터벅 걸음을 옮겼다. 바쁘게 지나가는 직원들과 대조적으로, 손에 큼지막한 종이 가방을 쥐고 마치 쇼핑 나온 듯 몸을 휘청거리는 그는 너무도 여유로워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몸에 힘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표정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그는 창밖 멀리 숲을 등진 D동의 윤곽을 바라보았다. 바로 저기에 아이작이 있을 텐데.

제이미는 분명 D동으로 직행할 수도 있었지만, 그는 일단 방으로 돌아가서 생각을 정리하기로 했다. 리지웨이 박사의 충고를 들었다기보다는 그냥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어서 그랬다고 하는 것이 무방했다. 자신의 복제 인간은 적인가, 아군인가? 펠릭스는 첩자인가, 아닌가? 아이작이 D동에 있기는 한건가? 혼돈의 반란이 정말 아직 D동에 남아 있을까?

“그러니까, D동이 의심스럽다 그 말이시죠?”

제이미는 이 말에 고개를 들었다. 쫙 빼입은 캐버너 소령이 급하게 복도를 따라 걸어가며 취조실에서 만난 휠체어 박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소령은 늘 신던 전투화 대신 번쩍번쩍한 구두까지 신고 나타났다. 곁에서 따라가는 박사가 꽤 높은 위치의 인물인 듯 했다. 휠체어에 앉은 상태이긴 했지만, 제이미가 보기에도 그의 모습은 위풍당당했다.

그러나 아무리 전자동이라고 한들 휠체어 쪽은 소령의 속도를 따라가기 버거워보였다. 소령은 그를 전혀 배려하지 않은 걸음걸이로 박사를 애먹이고 있었다. 그 남자는 돌아가는 바퀴에 손을 더해 굴려가며 가까스로 소령과 줄을 나란히 했다.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지만, 대단하게도 얼굴만큼은 태연했다. 둔한 소령은 그의 고충을 눈치 채지조차 못한 것 같았다. 제이미는 둘을 천천히 따라가며 대화를 지켜보기로 했다.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기밀 프로젝트와 제일 관련이 깊은 곳이니 말입니다.”

소령은 코를 문지르며 이상한 소리를 냈다.

“그렇지만 박사의 말에 따르면 첩자의 가장 윗대가리는 비품 창고도 마음대로 들락날락거릴 수 있고 유클리드 급 페이지에 접속할 수 있는 보안 승인 코드 3단계 이상에, 이 기지에 머무르면서 오랫동안 이 일을 준비했다는 얘기가 됩니다만. 그런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렇죠, 사실입니다. 그러니 더 편하지 않겠습니까?”

“조만간 직원들을 소집해야겠군요.”

“예, 되도록이면 빨리 해야겠지요.”

휠체어를 탄 박사가 문득 인기척을 느꼈는지 뒤를 돌아보더니 제이미와 눈이 마주쳤다. 제이미가 움찔하고 그들을 지나쳐 가려고 하는데 그가 제이미를 불렀다.

“아, 제이미 씨. 여기서 만나네요.”

“그, 그러게요. 우리 첫 만남은 영 좋지 않았죠.”

제이미는 괜히 긴장되는 마음에 이를 꽉 물고 억지로 웃어보였다. 휠체어는 이 표정이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비뚤어진 유머 감각은 여전하시군요.”

“아니 그러니까 유머가 아니고 진짜잖아요.”

“예, 뭐 그렇지요. 제이미 씨를 부른 건 다름이 아니고…… 늘 같이 다니던 여자 분 말입니다만.”

“펠릭스요?”

박사는 무릎을 쳤다.

“그래요, 펠릭스. 그 분과 얘기를 하고 싶은데 찾을 수가 없네요. 기지 전체에 방송을 울렸는데 나타나질 않습니다.”

“방송이요? 저도 못 들었는데요.”

“오, 이런.”

캐버너는 휠체어의 눈치를 살폈다. 보아하니 습격으로 방송 설비가 고장 난 것 같은데 모르고 있었던 모양이다. 휠체어는 소령에게 잠시 눈을 흘기고는 다시 제이미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렇군요. 그렇다면 발로 찾아다니는 수밖엔 없습니다만…….”

박사는 자신의 다리를 가리켰다.

“보시다시피 저는 발을 쓸 수가 없어서요.”

그는 환하게 웃었다. 캐버너는 두 사람을 번갈아가며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하다가 뒤늦게 이마를 치며 박장대소를 하기 시작했다. 예상치 못한 그의 과장된 아부에 박사의 표정이 난처해졌다. 제이미는 입맛을 다셨다.

“어쨌든 간에, 펠릭스 양을 찾아주시지 않겠습니까?”

“무슨 일인지 물어봐도 될까요?”

박사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젖히며 말했다.

“유감입니다만, 아무래도 펠릭스 양이 서버실에 침입해서 데이터를 삭제해버린 것 같단 말이죠……. 제이미 씨도 그 자리에 있었던 걸로 압니다만, 펠릭스 양 혼자서 독자적으로 벌인 일이라는 건 저희도 알고 있습니다.”

제이미는 순간적으로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다음 순간 그의 아래턱이 천천히 떨어지며 등에서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멍청히 듣고만 있던 캐버너 소령이 눈을 부릅뜨고 소리쳤다.

“뭐, 뭐라고? 제이미, 이게 무슨 소린가?! 서버실에 침입해서 데이터를 지워? 그것도 자네도 함께 옆에서?!”

제이미의 다리가 후들거렸다. 캐버너보다 휠체어 박사의 시종일관 올라가있는 눈 꼬리가 두려웠다. 단순한 미소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선에는 날카로운 칼날 같은 것이 숨어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박사는 고개를 이리저리 익살스럽게 움직인 뒤 휠체어를 조종해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책임은 나중에 묻죠. 어쨌거나 펠릭스 양을 발견하면 취조실로 와달라고 전해줬으면 좋겠군요.”

박사는 그대로 복도를 따라 가버렸다. 캐버너 소령은 씩씩거리며 갈팡질팡하다가 박사를 뒤쫓아 달려가며 외쳤다.

“내 손수 자네에게 징계 처리를 내려주지, 목 닦고 기다리고 있게!”

제이미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제이미는 자신의 방문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펠릭스를 발견했다. 그는 그녀에게 달려가 어깨를 붙잡고 횡설수설했다.

“펠릭스! 어떻게 된 거야! 네가 한 짓이었어? 응? 도대체 왜? 왜 그런 거야, 말을 해봐! 지금 보안부가 널 잡겠다고 난리야! 이걸 어떻게 할 거야, 펠릭스! 정신 차려!”

“뭐…… 라고?”

“네가 아이작의 데이터를 다 지웠잖아! 카메라에 다 찍혔어, 네가 했다는 걸 벌써 다 알고 있다니까?! 대체 왜 그런 거야? 그 소름끼치는 박사가 널 찾고 있다구!”

펠릭스는 완전히 넋이 나가버렸다. 제이미는 그녀의 어깨에서 손을 떼고 뒤로 물러섰다.

“알아……? 내가…… 뭐라고? 전부?”

“그래, 다 알고 왔어! 네 짓이었구나, 세상에 이럴 수가!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응? 뭐라고 변명할래? 이건 나도 어떻게 해줄 수가 없어!”

“해주긴 뭘 해줘!”

그녀는 갑자기 발작적으로 소리 질렀다.

“나도 어쩔 수 없었어, 어쩔 수 없었다구! 네가 알아선 안 되는 거였어. 너만큼은 몰랐어야 했는데!”

“너 정말 제정신이 아니구나, 펠릭스. 나도 이제 다 알아. 안다구.”

“아냐, 제이미, 넌 정말로…… 아냐, 제발, 제이미. 용서해줘. 그 땐 아무 것도 몰랐어…….”

“아무 것도 몰라?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데?!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파악이 안 되는 거야?!”

“몰라, 몰라! 내가 어떻게 알았겠어! 난 단지…… 뭔가를 보여주고 싶을 뿐이었는데, 그런데…….”

펠릭스는 울고 있었다. 그것을 본 제이미는 갑자기 머릿속이 새하얗게 되어버리는 것을 느끼며 말을 멈추었다. 그녀가 했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천천히 제이미의 머리를 때렸다. 지금 펠릭스는 자신이 무슨 상황에 처한 것인지 알고나 하는 말인가? 그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무…… 슨 말을 하는 거야, 펠릭스.”

“너만은 몰랐으면 했어, 그래서 아이작에 대한 데이터를 다 지워버렸어! 재단에 들켜서 처분당할 걸 감수해서라도 말이야! 그렇게 해서라도 이런 결말은 피하고 싶었는데…… 정말이지…… 정말이지 이건…….”

“펠릭스, 그래도 그건 아이작을 구하기 위한 일이었는데, 넌 도대체 어떻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왜 혼돈의 반란의 수족 노릇을 하게 된 거야?”

“뭐라고?”

펠릭스는 당혹스러운 듯이 말을 멈추고 제이미를 마주보았다. 제이미 역시 입을 벌린 채 꿀 먹은 벙어리가 되기는 마찬가지였다. 펠릭스는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

“너…… 날…… 첩자라고 생각하고 있구나?”

제이미는 말을 더듬었다.

“다, 당연히, 이런 상황에서는, 네가, 그러니까…… 뭐라고?”

“첩자…… 그래……. 혼돈의 반란의 첩자…….”

고개를 숙인 채로 중얼거리던 펠릭스는 갑자기 어깨를 들썩거리며 희미하게 웃기 시작했다. 제이미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아연실색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첩자, 그래……. 차라리 이게 더 나아. 맞아…… 다행이다…….”

“저, 저기, 펠릭스…….”

제이미가 손을 뻗자 그녀는 흠칫하며 머리를 들고 그를 바라보더니 잠시 뒤 뒤돌아 달려가 버렸다. 제이미는 당혹스러움에 그녀를 뒤쫓아 갈 생각도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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