펠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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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는 어디로 향하는 지도 모른 채 무작정 달렸다. 흐르는 눈물이 눈앞을 가려 시야가 흐릿했다. 아무도 없는 부서진 복도를 지난 뒤, 허둥지둥 계단을 뛰어 내려가다 한바탕 넘어지고 나서, 그녀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층계참 밑으로 들어가 벽에 몸을 기댔다. 아직까지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녀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내가 할게, 아이작.

아직도 제이미가 자신을 보던 의심의 눈초리를 기억한다. 펠릭스는 그 때 느낀 무력감을 다시 떠올리고 몸을 떨었다. 감당하기 힘든 감각이었다. 그래도 이런 식으로 전개된다면 차라리 괜찮았다. 그는 그녀를 첩자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진짜로 일어난 일을 모르니까, 그녀는 그렇게 안도했다. 만약 그가 사실을 알았다면…… 그는 그녀를 어떤 식으로 보았을까?

넌 이거 못 해. 내가 할 수 있다니까?

주변은 조용했다. 다른 동에 비하면 비교적 멀쩡하다곤 하지만 반쯤 폐허가 된 건물 외벽 부근을 지나다니는 사람은 없었다. 커다란 구멍 사이로 점점 노랗게 저물어가는 하늘빛을 받으며, 펠릭스는 머리를 떨어뜨린 채 그 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어린 아이의 철없는 모험심이 이끌어낸 최악의 날을.

이리 줘봐, 얼른!

그녀가 아직 초등학교에 다닐 적의 이야기다. 남부럽지 않은 갑부였던 부모님은 성실함이라는 단어를 입에 달고 살았다. 항상 사업에 신경이 쏠려있다 보니 자신들과 놀아주는 것은 뒷전이었다. 펠릭스는 언제나 그것이 불만이었다.

재단의 투자자였던 부모님은 그들이 벌이는 실험에 대해 늘 궁금해 했다. 때문에 자주 기지를 방문하곤 했는데, 심심한 펠릭스는 이 외출에 자주 따라붙곤 했다. 부모님도 막지 않았으며, 기지에서도 별다른 제재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는 기지 구석구석을 탐험하면서 자신이 마치 모험가가 된 듯이 뛰어다니며 놀곤 했다.

차차 혼자서 찾아갈 만큼 익숙해지자 기지 직원들도 그녀를 반기기 시작했으며 동생 아이작도 그녀를 따라나서기 시작했다. 얼마 있지 않아 그들은 기지의 마스코트 같은 존재가 되었다. 이제 그녀는 지루해하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부모님의 관심을 끌고 싶었던 어린애였다. 덕분에 그녀는 무리해서 사고를 치고, 남자 아이들과 쌈박질을 하고 다니는 동네 최고의 말괄량이 자리에 등극했다. 그러나 혼만 나기 일쑤였던 펠릭스는 성에 차지 않았다.

항상 방법을 고심하던 펠릭스에게 기회가 찾아온 것은 부모님이 재단과 관계를 맺은 지 약 3개월 즈음 지났을 때였다. 어느 날 그녀는 쓸데없이 커다란 거실을 지나다가 우연히 응접실 안에서 아버지가 어떤 키 작은 남자와 대화를 나누는 것을 보게 되었다. 엿듣기는 식은 죽 먹기였다. 대화로 짐작건대 남자는 재단에서 찾아온 듯 했지만, 펠릭스로서는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그들이 무슨 실험을 계획 중에 있는 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저는 그것을 알려드릴 수 있습니다."

"무, 물론 궁금하긴 합니다만, 이렇게 굳이 찾아오신 이유를 모르겠군요."

펠릭스의 아버지는 그를 경계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남자는 여유롭게 웃으며 대답했다.

"조건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들의 실험을 계속해서 지켜보고 있습니다만, 그들은 너무 신중해요. 충분히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안정성을 이유로 같은 실험만 반복하고 있는 것이 너무 답답하더군요."

"그래서요?"

"경제적인 측면에서나 무엇으로 보나 우리는 확실한 데이터를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얻어야합니다. 기지에 자주 출입하는 민간인인 당신에게 부탁드리죠. 실험을 진척시킬 수 있도록 몰래 실험 샘플을 바꿔치기해주십시오."

"뭐라고요?!"

아버지는 입을 쩍 벌렸었다. 펠릭스는 그것이 굉장히 우습게 느껴졌다.

"물론 이상하게 여기시겠지요, 레인 씨. 하지만 저는 공식적으로 실험에 개입할 수 없습니다. 시찰단장이라는 직위 때문에 기지에 출입하는 것조차도 사람들의 시선을 끌게 되죠. 기지의 지리를 잘 알면서 직원들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만한 사람이 필요합니다."

레인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십시오. 실험은 저희가 들락거리는 건물이 아닌 다른 곳에서 진행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덩치 큰 하얀 스웨터 차림의 처음 보는 남자가 눈에 띄지 않을 리가 없죠."

"레인 씨, 개인적으로 초조한 심정이라 말씀드리는 겁니다만, 당신이 출입할 수 있는 B동 지하에 실험 구역과 직통으로 연결된 통로가 뚫려있습니다. 연구원들이 당신 같은 투자자들과 원활한 접촉을 위해서 만들어놓은 거죠. 아시잖습니까? 그런 사람들은 당사자에게 직접 듣지 않고서는 도통 믿지를 못하지요. 아, 레인 씨를 비하하려는 의도는 아니었습니다만. 어쨌든 실험 구역에 출입할 방법도 있고, 그들이 당신을 모르지도 않을 거라는 의미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상황은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 통로를 비밀스럽게도 지하에 몰래 뚫어놓은 이유야 뻔하겠죠. 실험 구역까지야 갈 수 있겠지만 거기서는 허튼 짓은 고사하고 그냥 서 있기만 해도 눈에 띄어서 쫓겨날 겁니다. 아니, 더 심한 꼴을 당할 수도 있고요."

"물론 그렇겠지요, 레인 씨처럼 건장한 남성이라면……."

남자는 씩 웃으며 레인을 가리켰다. 레인은 눈을 가늘게 떴다.

"무슨 뜻입니까?"

"댁의 자녀들도 기지의 지리를 잘 알고 있고, 직원들의 눈에도 익습니다. 익은 수준이 아니라 귀여움을 받는 수준이죠. 아이들이 B동에서 약간 뛰논다고 한들 의심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거기서부터 실험 구역에 조용히 숨어드는 것은 약간의 도움이 있다면 충분히 가능합니다."

"뭐가 어쩌고 어째요!"

레인은 화를 벌컥 냈다. 남자는 천천히 미소를 거두었다.

"지금 내 아들 딸을 이용해먹겠다는 심산이라면 당장 접는 게 좋을 거요. 난 재단에 대해선 잘 모르지만, 그 짓거리를 하다가 붙잡히기라도 하는 날엔 무사하지 못하리라는 것쯤은 알고 있어. 당신이 제대로 된 도덕관념을 가지고 있다면 이 따위 제안은 하지 않았을 텐데 말이야."

"말이 좀 심하시군요, 레인 씨. 당연히 그들은 무사할 겁니다. 말씀드린 것 같습니다만, 들킨다고 한들 기억 소거 조치 외에 별다른 화는 입지 않을 텐데요."

"바로 그 빌어먹을 기억 소거가 더럽게 찝찝하단 말이요."

남자는 몸을 앞으로 빼고 눈썹을 들어 올리며 능청스럽게 물었다.

"하지만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프로젝트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면서 몇 백억씩 지원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아무리 그들이 믿을 수 있는 친구라고 해도 말이죠."

"생판 처음 보는 남자보다야 충분히 믿을 수 있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그들이 항상 성공하리라는 법이 있을까요? 적어도 어떤 위험 부담이 있는지는 알고 계셔야 비즈니스가 성립되는 게 아니겠습니까? 레인 씨, 이 불투명한 지출 때문에 요즘 들어서 꽤 골머리를 앓는 걸로 아는데……."

레인은 주먹을 쥐어 보이며 말했다.

"이제 보니 협잡꾼이었군. 내 아쉬운 것을 잡아서 어떻게 이용해먹으려는 심산이지?"

"그렇게만 생각하신다면 곤란하죠, 우리 역시 이 상황이 아쉬운 판입니다. 충분한 답례를 해줄 준비가 되어있지요."

남자는 작은 종잇조각을 레인에게 건넸다. 그는 눈을 번뜩이고 종이에 써진 동그라미의 개수를 세어보았다. 그는 흠칫하며 말했다.

"그게…… 이렇게 중요한 일이오?"

"성공적으로 진행될 경우 몇 백억 수준에서 끝나지 않으리라는 걸 보장하죠."

펠릭스는 자신의 머릿속에서 아버지가 소파에 앉은 채 망설이는 모습이 뒤로 멀어지며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이제 D동 안에 있었다. 아이작이 옆에서 그녀를 붙잡고 서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의 손에는 작은 플라스크가 들려있었다. 깨뜨리면 안 된다고 했다. 그건 당연했다. '샘플'이라고 적힌 자리에 대신 놓아두어야 하니까.

사고뭉치라는 이미지가 강해서일까, 원래라면 아이작이 이 일을 했어야 했겠지만, 펠릭스는 막무가내로 그를 따라왔다. 굉장히 재밌어 보이기도 했으며,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하면 아빠가 자신을 자랑스러워할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아이작을 여기까지 데려온 남자는 자신이 따라왔다는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한 상태로 다른 연구원들의 시선을 끌기 위해 사라졌다. 그녀는 머뭇거리고 있는 아이작의 옆으로 가서 그의 손에 쥔 물건을 빼앗다시피 들었다. 아이작은 저항하지 않았다. 그는 불안해했다. 펠릭스는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이 일을 맡는 것이 맞았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아이작을 이끌고 그가 일러준 대로 실험 장치를 찾았다. 여기 복도도 쓸데없이 넓고 잡동사니가 여기저기 쌓여있어서 몸을 숨기기에는 충분했다. 그 남자가 이쪽저쪽을 다니며 연구원들을 몰고 다니는 중이었다. 실험 직전 마지막 모임 같은 것을 가진다고 떠들고 다니는 듯 했다. 가장 친한 동네 친구 제이미의 부모님처럼 보이는 남녀도 나타나 남자를 따라갔다. 저 사람들도 여기 직원이었구나, 펠릭스는 제이미와 또 다른 공통점을 찾은 것 같아 신기하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그들은 용케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고 연구원들이 나타난 방향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결국 목표한 것을 찾을 수 있었다.

그것은 굉장히 멋있어보였다. 그녀는 그것이 지금보다 더 어렸을 적에 부모님과 함께 나갔던 광장의 커다란 동상이 어깨에 이고 있던 공하고 비슷하게 생겼다고 생각했다. 여기가 광장처럼 생겨서 그렇게 보이는 건가. 아이작은 여전히 불안한 몸짓으로 손가락을 들었다. 커다란 동그라미 기계 옆에 작게 붙어있는, 남자가 가르쳐준 보조 장치를 가리킨 것이다. 그녀는 이런 상황에서도 모든 걸 기억하는 아이작이 신기했다. 그래서 일을 맡긴 게 아닐까? 아이작이 나보다 더 똑똑해서? 하지만 그는 용기가 없다. 자신에게는 있는 것이. 바로 저 투입구에 있는 물건을 손에 쥔 플라스크와 바꿔올 수 있는 용기가.

더욱이, 아이작은 키가 닿지 않는다. 덕분에 그녀는 쉽게 합리화할 수 있었다.

펠릭스는 발끝을 들어 눈앞에 있는 투입구에 들어있던 것을 빼내고, 플라스크를 집어넣었다. 기계에서 '샘플이 투입되었습니다. 스캔 중.'이라는 소리가 재생되었다. 해냈다! 그녀는 플라스크를 깨뜨리지 않고 배달하는데 성공했다. 아빠가 원하는 일을 성공적으로 완수했다. 이제 그는 자신을 사고뭉치로만 여기지는 않을 것이다. 어쩌면 이제 그녀를 믿고 이런 재미있는 일을 더 시킬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에 그녀는 마음이 들떴다.

그녀는 아이작을 바라보며 말했다. "거봐, 네가 못할 뻔한 걸 누나가 했어."

그 날 거대한 폭발이 일었고, 제이미의 부모님이 목숨을 잃었으며, 아빠와 함께 나갔던 아이작이 기억을 몽땅 잃어버리고 돌아왔다. 아직 안정성이 검증되지 않았던 새로운 기억 소거 조치 모델의 부작용이라고 했다. 더 이상 돈 때문에 걱정할 이유는 없게 되었지만, 아빠는 웃지 않았다. 더 이상의 재미있는 일은 없었다. 제이미가 그녀의 집으로 들어왔다. 그는 굉장히 슬퍼보였다. 펠릭스는 무거운 마음에 짓눌렸다. 아무도 그녀가 이 일에 끼어들었다는 사실을 모르지만, 그래서 마음속으로는 더욱 더 외톨이가 되어가는 것 같았다…….

펠릭스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제이미가 그 사실을 알아서는 안 된다. 그녀 때문에 고통 받은 아이작을 구해내야 했다. 그렇다, 그녀 홀로 모든 일을 해결해야했다.

그녀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벽에 난 구멍 사이로 잠시 D동 건물을 바라보다가, 주머니에 든 권총을 만지작거리며 계단을 내려갔다. 모든 것이 시작된 곳에 그들이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을 해결해 줄, 아이작과 개자식들이……. 그녀는 B동의 지하 통로로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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