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이야기 » 리지웨이
제이미는 천천히 눈을 떴다. 야트막한 언덕, 아래쪽으로 보이는 작은 마을, 그리고 주변을 에워싼 숲. 눈앞의 정경이 상당히 낯익었다. 뒤를 돌아보니 기지의 형태가 보였다. 시간 역행이 성공했을까? 우선 오늘의 날짜를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는 기지로 향했다.
잠시 걸었을 무렵 근처에서 인기척이 들리기 시작했다. 정면에서 거칠게 소리 지르며 달음박질하는 파란 옷의 무리가 보이는 듯 했다. 제이미는 급한 대로 풀숲 뒤에 몸을 숨기고 그들을 관찰했다. 기지 경비원 복장의 남자들. 한 뚱뚱한 흑인 남자의 목에 걸려있는 커다란 은 십자가를 보고 나서야, 그는 저들이 자신이 진압했던 D계급 탈주 사건의 주범들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날짜는 확인했다. 그는 자신의 팀이 그곳을 습격하기 전에 서둘러 기지 안으로 들어갔다.
세 시간 정도가 지난 뒤, 제이미는 기억을 좇아 어느 복도 끝에 섰다. 예상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의 원형이 복도를 따라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와 눈이 마주쳤을 때 제이미는 그 날을 떠올리고 자신의 역할이 비로소 시작되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토마토 프로젝트, 시작이다!”
1월 13일
그 동안의 시간은 기지 안에 은신처를 확보하고 기본적인 준비를 하는데 써버렸다. 캐버너 소령의 사무실에 잠입해서 도청 장치를 설치하는 데만도 3일이 걸렸다. 이제 앞으로 어떻게 행동을 취할 것인가를 결정해야했다. 사소한 행동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 지 알 수 없었다. 제이미에게 곧장 찾아가서 소령이 첩자라고 말할까? 턱도 없는 소리. 마땅한 증거도 없는 현 시점에서 섣불리 움직이다간 소령의 손아귀 안에 있는 건물 안에서 무슨 험한 꼴을 당할지 몰랐다.
우선은 내버려두자. 지금은 정보를 수집해야할 때다.
1월 14일
소령이 그의 부하와 나누는 대화를 엿듣는데 성공했다. 도청 장치는 발각되지 않은 모양이다. 그는 이미 아이작과 펠릭스의 관계를 알고 그녀의 ‘처리 방안’을 고심하고 있었다. 그녀가 그들과 한통속이 아니라는 것은 증명된 셈이다. 그렇지만 얼마 지나지 않으면 그들과 나와의 관계도 알아낼 것이고, 되도록이면 둘, 어쩌면 리지웨이까지 합해 세 사람을 없애버릴 방법을 궁리할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보안 팀장에게 욕지기를 하는 펠릭스를 보고 더욱 고민스러워졌다. 안 그래도 물불 안 가리고 뛰어드는 성격인데, 아이작 때문에 신경이 곤두선 상태이니 사실을 알려줬다간 가만있지 않을 터였다. 물론 그녀의 폭로가 먹혀들 리 만무하다. 기지에 산재한 혼돈의 반란의 첩자들에게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하는 이 상황에…….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캐버너에게 우리들을 한꺼번에 묶어 처리해버릴 수 있는 미끼를 던져준다면…… 무대가 완성될 때까지 그도 잠자코 지켜보기만 할 것이다.
제이미의 의심을 펠릭스에게 쏠리게 만든다면…….
1월 15일
베이커 형사와 휠체어 박사가 새롭게 등장했다. 스파이 색출이라. 너무 공개적으로 나타난 것은 아닌가하는 걱정이 든다. 물론 그들도 첩자가 자신들을 경계하고 있다는 사실 정도야 알고 있겠지만…….
오늘은 내가 형사에게 조사차 끌려가던 날이다. 그에 앞서, 나는 제이미가 보는 앞에서 드러내놓고 나타나 펠릭스가 목소리를 높일만한 행동을 취했다. 자신과 똑같이 생긴 사람에게 소리 지르는 행동은 분명 모르긴 몰라도 의심쩍은 장면이다.
그리고 여기에…… 약간은 기교를 부려도 괜찮겠지.
1월 16일
종일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다니다보니 헤어스타일이 말이 아니다. 이런 바보 같은 위장에도 아직 들키지 않았다는 사실이 신기할 따름이다. 이상한 놈들이 워낙 많아서 그런가…….
내 원형이 서버실에 침투하는 동안, 펠릭스는 예상대로 몰래 서버실에 들어갔다가 나왔다. 아마 아이작의 데이터를 지웠으리라. 내가 개입하지 않고도 벌어진 일이다. 당황해서 튀어나온 내 모습 앞에서 어설프게 호들갑을 떠는 모습을 보자니 약간 혼란스러웠다. 그녀는 무엇 때문에 이런 짓을 한걸까? 아마 난 절대 알 수 없겠지. 어쨌거나 이 사실을 제이미가 알게 되면 내가 의도한 방향으로 좀 더 쉽게 흘러들도록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소령 쪽의 상황은 심상치 않다. 분주한 것으로 보아서는 아마 얼마 남지 않은 거사를 준비하는 모양이다. 그럼, 어디 피해있는 것이 좋으려나……?
1월 17일
뒤통수를 맞고 끌려가는 모습까지 확인한 후 몸을 숨겼다. 아직도 머리가 약간 얼얼한 것 같은데. 내일쯤이면 SCP-222를 통해 나의 존재가 탄생할 것이다. 내 몸을 싣고 가는 차량을 쫓아볼까 생각도 해보았지만, 기지에서 나가는 행동은 너무 눈에 띈다. 계속 이곳에 숨어 지내야했다.
이후 나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찾지 못해 무작정 도청 장치만 들고 있는 꼴이 되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휠체어 쪽에도 하나 달아두는 건데. 그들이 어떤 방향으로 이번 사태를 파악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혹시 그들까지 우리들을 의심하는 건 아닐까.
이 시점부터, 기억에 의존할 수 없는 완전히 새로운 상황이 나타나게 된다. 이제 소령뿐만 아니라 나 자신의 거동조차도 쫓아야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런데 내가 언제 기지에 돌아오는지를 알 수 없으니 답답하기만 하다.
1월 18일
도청 장치가 발각되었다. 복제된 제이미, 그러니까 내가 D동의 어느 방으로 끌려가는 것을 뒤쫓았다가 돌아온 뒤에야 장치가 고장나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소령은 휠체어 쪽이 벌인 짓이라고 생각할 터였다. 상황이 좋지 않다. 아마 일을 더 빨리 진행할 것이다. 하지만, 도청 당했다는 걸 알게 된 상황에서 내리는 판단이라면…… 분명 계획을 바꿀 텐데.
펠릭스와 리지웨이는 사라진 나를 찾아다니고 있다. 저렇게 마구잡이로 돌아다니다간 언제 혼돈의 반란이 나처럼 납치해갈지 모르는 일인데. 나는 대책 없이 그저 낙관할 수밖에 없었다. 어쨌거나 내가 역행하던 시점엔 두 사람 다 멀쩡했으니까.
그들에게 신경 쓰기보다는 휠체어 쪽에 대해 알아봐야겠다. 다른 곳도 아니고 자기 사무실이었으니, 소령은 벌써 자신의 존재가 노출되었으리라 짐작할 것이다. 빠른 시간 내에 행동에 나설 텐데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휠체어가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것은 불 보듯 뻔하다…….
1월 19일
휠체어 박사의 이름이 패닝이라는 것 말고는 딱히 수확이 없었다. 나는 시간낭비는 그만두고 습격 날짜를 알아내려 용을 썼다. 도청했을 때 캐버너는 적어도 삼사일은 기다릴 것이라고 했지만,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아마 계획을 앞당겼을 것이다. 역행 전에 내가 고문당한 뒤 끌려 나가 정신을 잃을 때 화재 연기를 보았으니 아마 그 때가 습격 당시, 그러니까 대규모 습격으로 혼란한 와중에 불을 질러 골칫거리를 없애고 시체도 알아볼 수 없도록 했을 거라는 것이 마땅해보였다.
그래서 나는 D동에 갇혀있는 불쌍한 나의 과거 주변을 맴돌며 감시했다. 언제까지고 이렇게 앉아있을 수만은 없을 거라고 우울하게 낙담을 할쯤에, 보기만 해도 짜증이 솟구치는 ‘기억 재생에 동반되는 폭력성이 어쩌고’ 연구원이 나타나 나를 어딘가로 데려가기 시작했다. 행운 치고는 기묘한 타이밍이다.
그는 나를 이상한 금속 상자에 집어넣고 사람들 사이에서 대놓고 걸으며 A동 지하로 데려갔다. 기지 중심부니 화재가 난다면 아수라장은 당연지사. 오늘 밤에 일을 터뜨릴 거라는 것을 직감한 나는 리지웨이에게 B동으로 펠릭스를 데려오라는 문자를 보내두었다. 두 사람은 습격에도 무사할 것이다.
1월 20일
일은 자정에 터졌다. 나는 불구덩이 속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진 ‘나’를 구출해 B동으로 옮겼다. 구해놓고 보니 문제가 생겼다. 이제껏 나와 마주친 ‘제이미’는 ‘내’가 아닌 원형에 불과하니 그렇다 치더라도, 이 과거의 나와 내가 마주친다면 어떻게 될까? 그게 사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과학자들이 떠드는 ‘타임 패러독스’라는 것을 그저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는 결국 리지웨이를 부르기에 이르렀다. 아저씨는 얼이 빠졌지만, 두 명의 제이미를 보고 나서 대충의 설명을 납득하기는 한 듯 했다. 사실 SCP-222와 시간 역행이 개입된 덕분에 이 시점의 제이미는 세 명이었지만, 놀랍게도 아저씨는 TP에 대해서 알고 있었고 이 사태를 허무맹랑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우리는 기절한 과거의 나에게 수면제를 놓고 당분간 재워두기로 결정했다. 그 뒤 나는 아저씨에게 소령에 대해서 알려주었다. 펠릭스에게는 알리지 말라는 말을 덧붙여서. 그 역시 이해할 것이다. 우리는 앞으로 일어날 미래의 문제-제이미의 죽음-를 해결할 방안에 대해 날이 새도록 이야기를 나눴다.
1월 21일
나는 잠든 과거의 나를 D동 폐허에 데려가 숨겨놓고 수색 팀의 눈에 띄지 않도록 근처에 나뒹구는 천을 씌워놓았다. 얼마 안 있으면 깨어나 어리벙벙한 상태로 기지로 향할 테고, 나를 보고 입을 벌린 뒤 뜻하지 않은 소외감에 분노를 키워나가겠지. 좀 부끄럽긴 하지만 그건 이미 일어날 일이다.
아직 나의 원형은 나타나지 않았지만, 내가 겪은 일을 생각하면 아직 죽을 날은 멀었다. 그에게 도움 될 물건을 아저씨에게 구해달라고 부탁했다. 그것은 또한 내게도 꼭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뭐…… 미묘한 기분이다.
1월 22일
캐버너 소령이 날 들쳐 업고 나타났다. 물론 나야 그 자리에 서있지 않았지만, 리지웨이 박사가 기가 차다는 표정으로 투덜거렸다. 그는 내일 깨어날 테니 우리는 마지막을 준비해두어야 했다.
나는 결국 패닝 박사에게 캐버너에 대해 알렸다. 박사는 아마 ‘익명의 제보자’의 말에 적잖게 놀랐을 것이다. 나는 내일 그가 D동을 습격할 것이라는 답신을 받았다. 내일이라…… 1월 23일. 벌써 찾아오다니. 가는 시간에 헛웃음만 나올 뿐이다.
1월 23일
제이미가 깨어났지만, 그가 펠릭스와 싸우는 것을 엿들으면서 나는 굉장히 초조해졌다. 나는 여전히 이 사건 직후 나타났던 또 다른 나의 존재의 역할에 대해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쨌든 방 안에 들어가서 제이미에게 내 모습을 보여야했다. 그런 일이 이미 벌어졌기 때문이다.
그 때의 대화를 되새기며 머리를 굴려보다가, 이대로 놔두면 제이미가 혼란스러워 하며 주저하다가 시간을 지체하게 될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펠릭스가 나간 뒤 나는 그를 자극했다. 그리고 그 말도 빼놓을 수 없지.
어떻게든 그를 움직이고 난 뒤에, 나는 곧바로 리지웨이 박사가 수술대를 잡고 있을 임시 병동으로 달렸다. 박사에게 급히 신경 끄라는 손짓을 한 뒤 그의 사무실로 들어가 위쪽 선반을 열었다. 그리고 안에는 권총이…… 없었다.
나는 그 안에 권총을 넣어둔 뒤 재빨리 병동을 빠져나왔다. 저게 없었다면 내가 원형을 뒤쫓다가 죽어버리는 모습을 보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때 권총이 여기 없었으면 나는 어떻게 이걸 가지고 있는 걸까. 머리가 쑤시는군, 빌어먹을 타임 패러독스. 빌어먹을 아인슈타인. 빌어먹을 우주.
제이미가 임시 병동을 빠져나가자 리지웨이가 날 불렀다. 나는 그에게 대강의 계획을 설명했다. 바쁜 와중에 흐릿해진 기억을 짜내 과거의 ‘나’가 그에게 연락을 할 때 곧바로 움직일 수 있도록 차를 준비해두라고 하고, ‘살아남는다면’이라는 무시무시한 전제 조건을 붙인 뒤 그곳을 습격할 패닝 박사의 팀에 합류하라고 말했다.
나는 다시 제이미의 방으로 달려갔다. 그는 종이 가방을 들고 문을 막 나서려던 참이었다. 나는 그가 놀라 멈칫하는 사이 ‘선물 잘 받았느냐’고 물었다. ……얼핏 보기에도 잘 받았다.
그가 더듬거리며 그렇다고 말하자, 나는 주저하지 않고 그의 가슴팍에 총알을 박아 넣었다.
모든 준비는 끝났다. 이제는 끝낼 시간. 나는 종이 가방을 들고 D동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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