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지가 돌아가는 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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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냉장고에 토마토만 잔뜩 쟁여두고 사는거냐?”

룸메이트들이 모두 빠져나가고 없는 사이 제이미의 방에 찾아온 리지웨이 박사의 말이었다. 그는 냉장고를 기가 찬 눈빛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대답이 더 가관이었다.

“두 번째 칸 바닥에 맥주 있어요. 꺼내주실래요?”

“이젠 노인네한테 심부름까지! 어디 가서 나랑 아는 사이라고 말하지 마라.”

“먹고 싶었던 건 아저씨잖아요.”

머리카락이 하얗게 센 중년의 남자는 악 소리를 내며 냉장고 앞에서 허리를 굽히고 맥주 두 캔을 꺼내들었다. 일상적인 광경이었다.

두 명이 지금 벌이고 있는 것은, 일이 생각보다 간단하게 종료된 것을 기념하는 자축 파티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리지웨이가 던진 맥주를 가볍게 받아든 제이미는 캔을 따면서 시시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나 참, 캐버너 그 놈은 대체 어떻게 그 자리에 버티고 있는 지 모르겠어요. 세상에 시체 처리를 깜빡해놓고 어떻게 징계 처리조차 없는거죠?”

리지웨이는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벼락같은 탄성을 내지르더니 의자 등받이에 팔을 걸치고 앉으며 말했다.

“난들 알겠냐, 이 기지 돌아가는 꼴이 그런걸. 관리자 양반이시잖아. 기지 최고 간부. 상부에 보고가 올라가지만 않으면 그냥 그렇게 덮이는 거지.”

“그러니까요. 그 인간이 어떻게 기지 관리자가 되요? 덕분에 아이작만 생고생한 거잖아요.”

“뭐 그래도, 좋게 좋게 해결됐잖아.”

“아직 해결된 건 아니죠. 석방 신청은 언제 받아들여지는 건데요?”

“신청 넣은 지 아직 두 시간밖에 안 됐어. 재촉하지 말고 네 앞가림이나 잘 해.”

“거 할아범이 말하는 거 하고는…….”

맥주가 들어간 리지웨이는 상당히 관대했다. 그는 캔을 탁자에 놓아두고 의자에 몸을 편히 기댔다.

“그래도, 이번에 보안부가 들이닥치면 골치 좀 썩일 거야. 총책임자니까 이름값 해야지, 안 그래? 스파이에 대해서는 별다른 소식 없나?”

“글쎄요, 이번에 들어온 보고서에 혼돈의 반란이라는 이름이 끼어있긴 했는데…… 읽어보니 그냥 ‘이 기지를 주시하고 있다’ 정도였네요. D계급 탈주하고는 별 상관이 없겠죠. 어쨌거나 보고는 보고니까 지원이 있긴 할 거에요.”

“흠…… 뭐 됐어. 캐버너 녀석이 가슴 좀 졸이겠구만.”

리지웨이가 고소한 표정으로 킬킬거렸다.

“그런가요.”

제이미는 하품을 했다. 그간의 밀린 피로가 한 번에 쏟아진 그는 맥이 풀린 상태로 멍하게 벽만 쳐다보고 있었다. 리지웨이는 그에게 수면제를 처방해줄까 하다가, 맥주만으로도 충분할 거라는 결론을 내리고 한 캔을 더 꺼내기 위해 냉장고로 향했다. 펠릭스가 들이닥친 건 그 때였다.

“큰일 났어요!”

방문을 박차고 외친 펠릭스의 고함에 두 남자는 심신이 뒤틀렸다. 그러나 그녀는 짜증 섞인 눈초리에도 아랑곳 않고 문을 세게 닫으며 그들의 피곤을 증폭시켰다. 리지웨이가 뭐라고 하려는 찰나 펠릭스가 그들이 경악할 소식을 전했다.

“아이작의 석방 신청이 기각됐어요!”

방 안은 일순간 정적에 휩싸였다.

“뭐?”

리지웨이가 몸을 부르르 떨고 눈을 끔뻑거리면서 내뱉은 말이었다. 제이미는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는 듯 했다. 초조해진 펠릭스는 제이미가 앉아있는 의자 앞에 서서 그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며 외쳤다.

“아이작이 여기서 나갈 수가 없게 됐다니까! 내 말 듣고 있는거야?!”

“드, 듣고, 있어! 그러니까 그만 흔들어, 지금 머리가 깨질 것 같으니까.”

“도대체가, 두 시간 전 모습하고 다를 게 없어.”

제이미는 여전히 혼이 나가있었다. 리지웨이는 이제 그를 쥐어박으려고 하는 펠릭스를 제지하고 일의 연유를 물었다.

“아이작이 이미 실험 참가 대상으로 지정되서 대체할 수가 없대요. 박사님, 이게 말이 되는 소리에요?”

“뭐라고? 기지에 도착한 지 하루 만에 실험 대상으로 지정됐다고?”

“박사님,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실험을 중단할 수 없다면서 석방이 안된다고 했다고요!”

“뭐야?! 아무 죄도 없는 민간인을 기어이 실험에 투입시키겠다고?! 이 자식들이 드디어 갈 데까지 가는 모양이구나! 당장 책임자에게 가자, 펠릭스. 제이미 너는…… 음.”

“얘 취했어요?”

펠릭스는 눈앞의 남자를 다시 쥐어박을 기세로 노려보았다.

“한 캔으로 취할 거면 내가 이 녀석이랑 마시지도 않았겠지! 그냥 많이 피곤한 것 같은데 지금은 쉬게 내버려두는 것이 낫겠구나. 가자, 펠릭스.”

“제이미, 돌아왔을 땐 제정신이어야 해. 농담 아냐.”

리지웨이와 펠릭스는 자신들을 멍청히 바라보고 있는 제이미를 남겨두고 방을 나섰다. 제이미는 닫힌 문을 바라보다가 다시 맥주를 손에 집어 들었다.


“그게 대체 무슨 소립니까? 해당 인원이 무죄라는 사실이 밝혀졌다니까요! 현장직 요원의 증언까지 받아놨습니다! 제 12 규약이요? 이게 무슨 헛소립니까? 나이가 18살이에요, 이 양반아. 대체 어느 미친놈이 미성년자를 갈아 넣으라고 지령을 넣는답니까?”

기지 관리자의 비서는 무관심하게 일축했다.

“그러니까, 상부에서 그렇게 지시가 내려왔는데 난들 어쩌라는 말입니까. 보시오. ‘이하의 번호가 할당된 D계급 인원을 요청한 실험에 참가할 수 있도록 허가함.’”

“이제는 상황이 달라진 게 아닌가요? 아이자…… 그 D계급 인원이 더 이상 사형수가 되지 않게 되었으니까요!”

펠릭스가 필사적으로 매달렸지만, 비서는 벌써 신물이 나는 듯 인상을 쓰며 대답했다.

“바로 그 내용이 쓰여 있는 석방 신청서가 상부에서 기각됐다고요. 쓸데없는 미련은 개나 주고, 감상적으로 일할 거면 사표 쓰시죠. 애초에 그 애가 어떻게 되든 당신들이 알 게 뭡니까?”

펠릭스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포기하고 물러나야할 때라고 판단한 리지웨이는 펠릭스의 옆구리를 살짝 찌르며 천천히 일어섰다. 펠릭스는 리지웨이를 하릴없이 바라보더니, 다시 비서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럼, 그 인원이 참가하게 되는 실험이라도 알 수 있을까요?”

비서는 머리를 긁으며 눈을 부라렸다.

“그러니까 당신들이 그 사람하고 무슨 상관인데 그럽니까?”

질겁한 리지웨이가 펠릭스에게 계속해서 눈치를 줬지만, 펠릭스는 머리를 짜내 자기 나름의 대답을 내놓았다.

“그 실험을 직접 방청하고 나중에 그걸 참고해서 정식으로 진정서를 써 올리겠습니다. 이런 일이 두 번 다시 일어나서는 안돼요.”

“인권 운동가 납셨구만…….”

비서가 비아냥거렸지만 펠릭스는 꾹 참고 계속해서 물었다.

“알려줄 거에요, 말 거에요? 무슨 실험에 참가하는데요?”

“글쎄, 데이터베이스에는 ‘기밀’이라고 쓰여져 있군요. 정 원하시면 5등급 보안 승인 카드를 제게 내밀어주시죠, 아가씨. 그럼 본부에라도 연락을 넣어서 알아봐줄 테니.”

리지웨이는 정말로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언제 펠릭스가 씩씩거리며 비서에게 욕을 쏟아 부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리지웨이는 서둘러 펠릭스를 잡아당기면서 빠르게 인사를 하고 기지 관리자의 사무실을 나왔다. 펠릭스는 문이 닫히자마자 소리를 질렀다.

“저 빌어먹을 자식─”

아마 비서는 이 소리를 들으며 실실거리고 있을 터였다.


리지웨이는 이마에 맺힌 땀을 훔치며 제이미에게 말했다.

"좋아, 결국 얻은 게 하나도 없어. 아이작이 무슨 실험에 참가하는지, 석방은 왜 안 되는지.“

“이제 어떡하죠? 아이작이 언제 끌려갈지 몰라요. 아마 그렇게 되면…….”

리지웨이가 손사래를 쳤다. 다음 내용은 듣고 싶지도 않다는 듯이.

“실험 날짜 정도는 내가 알아봐줄 수 있어. 예정된 실험 내역은, 본부에서 직접 내려온 정말 중요한 사안 같은 게 아닌 이상 데이터베이스에 노출되니까. 그 내용까지는 접속이 허가되지 않을지 몰라도 일정을 확인하면 아이작에게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는…….”

이 놈의 입방정, 박사는 눈을 감았다. 너무 직설적이었나……. 리지웨이는 펠릭스의 시선을 피한 채 입을 다물었다. 그를 바라보던 펠릭스도 뒤이어 고개를 떨구었다. 그들의 머릿속에 최악의 상황이 스쳐지나갔다. 자신들이 이제껏 경험하고 들어본 가장 끔찍한 SCP와 실험 대상의 말로, 그리고 거기에 덧씌워지는 아이작의 얼굴.

제이미가 입을 연 순간엔, 그들은 이미 암묵적으로 동의한 상태였다.

“아이작을…… 여기서 빼낼 수 밖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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