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감추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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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미는 사람이 모두 빠져나갈 때까지 방 한 구석의 캐비넷에서 기다리다가 막 나온 참이었다. 그는 헤드셋의 다이얼을 돌려 문 밖에 서서 보초를 서고 있을 펠릭스에게 연결했다. 곧바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제이미, 잘 들려?”

“완벽해. 이 통신기는 어디서 구한거야?”

“비품 창고에서.”

“비품 창고라고? 무슨 핑계를 댄 거야?”

“안 댔어. 그냥 가져온 거야. 걸리지 마.”

“미쳤군.”

이제 빈말도 한두 마디씩 던지기 시작하는 것으로 보아선 펠릭스도 어제 일 이후 마음이 많이 가벼워진 것 같았다. 사실 좀 억지로 꾸미는 듯한 기색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제이미는 딴지를 걸지 않았다. 대신 그는 하루 종일 혼자 고민하던 문제를 비로소 물어보았다.

“펠릭스, 물어볼 게 있는데.”

“뭔데?”

“어제 내가 형사님께 끌려가기 전에 말이야. 그 때 나랑 했던 얘기 기억나?”

그는 지금 그 날 자신과 똑같이 생겼던 인물과 펠릭스가 나눈 대화를 말하는 것이었다. 헤드셋 저편에서 잠깐 침묵이 흐르더니, 펠릭스의 헉하는 숨소리와 함께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뭐, 뭐 하러 그런 걸 또 물어? 됐으니까 지금 일이나 잘 해!”

이건 제이미가 예상했던 대답이 아니었다. 그 날 화를 내던 모습을 떠올려보면 펠릭스가 이 화제에 대해 얘기하지 않고 싶어하리라는 것은 분명 예상 가능했지만 이것은 다소 격양된 반응이 아닌가. 상대와 다투고 난 뒤의 자연스러운 반응인 싸늘함과는 상당히 거리가 멀었다. 부끄러움이나 수치스러움에 가까울까……. 대체 무슨 얘기가 오갔던 것일까?

“잠깐, 멈춰! 누가 들어간다. 알아서 잘 숨어봐.”

제이미는 별 수 없이 캐비넷으로 다시 돌아가 몸을 구겨 넣고 숨을 죽였다. 대답은 들을 수 없겠군, 그는 투덜거리고 싶어하는 혀를 억누르며 캐비넷 문에 난 좁은 구멍으로 바깥을 지켜보았다. 문이 급하게 열리더니 짙은 파란색 유니폼을 입은 보안 요원이 들어왔다. 허둥지둥하던 요원은 방을 이리저리 둘러보더니 캐비넷에 다가왔다. 제이미는 자신이 이 안에 있는 것을 들켰을 때 뭐라고 변명해야할 지 생각했다. 린치를 당하고 있었다고 해야 할까. 보안 요원은 캐비넷 주변을 어슬렁거리다가 갑자기 탄성을 지르고는 책상에 다가갔다. 그는 책상 위에서 녹슨 열쇠꾸러미를 집어 들고 자축하듯 공중에 한 번 던졌다가 잡아챘다. 같은 행동을 한 번 더 시도하다가 떨어뜨린 뒤, 요원은 멋쩍은 듯 중얼중얼하며 다시 꾸러미를 주웠다. 그리고는 들어왔을 때처럼 빠르게 문을 열고 나갔다. 제이미는 자신이 이제까지 저지른 웃긴 실수들이 이런 식으로 남에게 보여진 적은 없는 지 다시 생각해보았다. 그는 조심스럽게 캐비넷에서 빠져나왔다.

“좋아, 토마토 프로젝트 시작이다.”

“토마토 뭐라고?”

“토마토 프로젝트! 토마토 꼬맹이를 구하는 작전이잖아!”

“쓸 데 없는 짓 좀 하지 마. 작전명이라니, 부끄럽지도 않아? 리지웨이 아저씨한테도 말해줄게.”

“아저씨는 분명 이 이름에 찬성할 걸.”

그는 조심스럽게 반대쪽 문 앞으로 다가가 장갑을 낀 손으로 펠릭스의 보안 카드를 꺼냈다. 잠금 장치에 카드를 긁자 액정 화면에 파랗게 불이 들어왔다.

“비밀 번호는?”

“0070.”

“어…… 0이 없는데?”

“화면 스크롤 내리면 나와. 스마트폰 터치하듯 해 봐.”

“스크롤이라고? 기지 생활 2년 동안 처음 알았군.”

“문 닫지 마, 자동으로 닫히는 거 기다려야 잠금 장치가 재활성화 돼. 기계들 사이에 숨어서 문 닫히는 소리로 확인해.”

잠금 장치에서 삑삑거리는 소리가 나고 잠시 뒤 기분 좋은 코드 승인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제이미는 재빨리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문을 그대로 놓아두고 컴퓨터들 사이로 숨어들었다. 서버실은 굉장히 넓었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방 안에는 ‘에니악’ 사진에서나 보던 커다랗고도 네모난 기기 장치들이 즐비했다. 컴퓨터를 식히는 냉각팬들에서 나는 소리도 굉장히 컸다. 제이미는 귀에 꽂은 작은 헤드셋에 대고 조금 전보다 크게 말했다.

“들어왔어.”

“좋아, 139번 컴퓨터를 찾아. 아마 일곱 번째 줄에 있을 거야.”

제이미는 커다란 기계들 사이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를 확인하고 앞으로 나아갔다. 서버 컴퓨터 외부에 찍혀있는 숫자들을 유심히 보면서, 한 편으로 이곳의 무방비함에 감탄했다.

“왜 정말 중요한 곳은 이렇게 입구만 지킬까? 영화에서나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컴퓨터 하나 잘못 만지면 데이터가 싸그리 날아갈 테니까 애초에 기술팀 말고는 못 들어가게 하는 거야. 너도 조심해, 발이라도 걸려서 컴퓨터 쪽으로 쓰러지면 그 땐 끝장이야.”

“뭐라고? 노이즈 때문에 잘 안 들려.”

“넘어지지 말라구.”

“어…… 네 목소리가 약간 울리는 것 같은데?”

“조용히 말해. 쉿! 누가 온다. 잠깐 끊을게. 알아서 할 수 있지?”

펠릭스는 그의 대답도 듣지 않고 통신을 끊었다. 제이미는 툴툴거리면서 USB를 꺼냈다. 약 50m 정도 걸어가서야 일곱 번째 열에 도착할 수 있었다. 139번 컴퓨터를 찾으면서 그가 혼잣말을 했다.

“왜 하필 139번이야? 다른 컴퓨터에도 USB 포트 있는 거 봤는데……. 여긴 너무 입구에서 멀지 않아? 도망치기도 좀 그렇잖아.”

그는 혼자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앵앵거리는 목소리로 펠릭스를 흉내 내며 다시 말했다.

“‘화면도 있고 USB도 있으면서 감시 카메라에 안 걸리는 위치는 그 컴퓨터뿐이야. 알았으면 몸 더 숙이라구…… 아, 안녕하세요! 그렇죠, 네, 맞아요. 기술팀이 오기로 했는데 좀 늦네요. 아, 아니에요, 감사합니다.’ 그림 좋은데, 펠릭스.”

제이미는 서버실 문 밖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억지웃음을 짓고 있는 펠릭스를 상상하고 실실 웃었다. 그는 컴퓨터 번호를 가리는 전선을 치우기 위해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직후 그는 경직되었다. 요란한 기계음 사이에서 발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그는 가슴이 철렁하여 뒤를 돌아보았다. 서버 컴퓨터가 형형히 빛을 발하고 있었다. 저 컴퓨터들 사이에 보안 요원이 숨어있는 것은 아닐까? 그는 망설였다. 확인하는 게 좋을까? 포기할까? 어쨌든 앞으로 계속 나아가는 건 위험할 것 같은데……. 그가 침을 삼키고 뒤로 돌아가려는 찰나 그의 눈에 ‘139’라는 숫자가 들어왔다. 제이미는 잠시 귀를 기울이더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고개를 저었다.

‘너무 가벼운 태도로 일관했더니 이거 혼자 별 상상을 다 하는데? 내 무의식이 경고를 보내나보군. 펠릭스 부모님에게 벌을 받았나보지. 죄송합니다, 레인 씨, 앞으로는 진짜 스파이처럼 조심조심 다닐게요.’

침입자는 회심의 미소를 짓더니 화면을 켜고 데이터베이스에 접속했다. 리지웨이 박사의 보안 인가 코드를 입력하자 ‘확보하라, 격리하라, 보호하라’라는 신물 나는 문구가 두어 번 깜빡인 뒤 항목들의 일람이 나타났다. 제이미는 눈이 핑 돌아갈 정도로 어지러운 문자들의 소용돌이 속에서 용케 ‘D계급 인원 페이지‘를 찾아냈다. 그는 아이작의 번호를 검색했다.

‘어디 보자…… 아이작 레인, 18세. 2013년 1월 12일 등록. 벌써 나흘 전이군. 얼마나 고생을 했을라나. 흠, 실험 투입 예정…… 기밀이라?’

제이미는 USB를 포트에 삽입했다. 화면에 있어서는 안 될 창이 새로 떴다. 그는 ‘검색’을 누르고 핵심어를 아이작의 번호로 설정한 뒤 ‘참가한 실험 페이지’의 글 번호를 입력했다. 이윽고 나온 결과 창에 몇 가지 글이 나타났다. 개중에는 진짜 아이작과 관련이 있는 글과 자주 쓰이는 단어들이 얻어 걸린 전혀 상관없는 문서들이 섞여있었다. 이를테면 지금 그가 보고 있는 기억 재생 장치에 관한 것이라던가……. 제이미는 글을 훑어 내려가며 자신이 원하는 정보를 얻기 위해 데이터베이스를 뒤져나갔다.

검색어를 바꿔가며 몇 번을 반복한 결과, 자주 나타나는 단어가 정리되었다. 제이미는 그 중에서도 가장 수상쩍어 보이는 것을 선택했다.

‘‘TP‘? 프로젝트 명인가?’

‘TP’의 검색 결과는 그리 많지 않았지만, 여러 가지 정보를 엮어 유추해본 결과 극비 프로젝트였다는 것만큼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이미 폐기된 것이라는 것도. 제이미가 찾던 것이 아니었다. 그는 아이작의 ‘참가한 실험 페이지‘ 글 번호를 다시 검색해보기 위해 해당 항목을 클릭했다.

“어?”

페이지가 삭제되었다는 창이 화면에 나타났다. 제이미는 눈을 크게 뜨고 재차 시도해보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놀란 그는 항목과 연결된 다른 페이지에 접속을 해보려고 했다. 그러나 그것들도 이미 삭제된 뒤였다.

‘어…… 어떻게 된 거지?’

기밀 자료에 등급 미달자가 접속, 수정하기 위해서는 서버실을 뚫는 방법밖에 없다고 펠릭스가 말했다. 그렇다고 이 자료를 볼 수 있는 고위 간부들이 이런 사소한 페이지들을 지울 이유가 없을 텐데……. 당황한 그가 어쩔 줄 모르고 있던 그 때, 갑자기 서버실의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달려 나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소스라치게 놀란 제이미가 달려 나가보았지만, 이미 서버실의 문은 다시 닫히고 있었다. 제이미는 망연자실했다. 방금까지 누군가가 자신과 함께 이 방에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그가 눈앞에서 아이작에 대한 자료를 삭제해버렸고, 이제 제이미는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는 천천히 139번 컴퓨터 앞으로 되돌아갔다. 이제 내용을 확인할 길이 없는 문서들이 검색 결과에 줄줄이 나타나있었다.

“제이미, 돌아왔어! 망할 녀석들이 날 떼어놓질 않더라구. 일은 잘 돼가?”

‘그래, 펠릭스가 있었지!’ 제이미는 다급하게 물었다.

“펠릭스, 방금 전에 서버실에서 나간 놈 못 봤어?”

“뭐라고?”

“그 놈이 아이작에 대한 자료를 다 지운 것 같아.”

“뭐, 뭐라고?!”

“그 놈 못 봤어?”

“모, 모, 못 봤어! 아이작 자료를 전부 지웠다고? 어떻게 같은 방에 있었던 걸 모를 수가 있어? 이런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문 앞에 죽치고 있을 걸, 정말 그 녀석이 다 지운거야?”

제이미는 한숨을 쉬며 화면을 노려봤다. 아이작에 대한 자료가 모조리 사라졌다…… 이런 짓까지 할 정도로 중요한 일이란 말인가?

‘잠깐, 이런 짓까지? 이런 짓을 할 정도라면 설마 우리 계획이 벌써……? 아냐, 그럴 리가, 직접 행동으로 옮긴 건 이번이 처음인데…… 그저 우연일 뿐인가?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방법이 너무 급해보였는데…….’

그는 방금 전에 일어난 사태에 대해 감을 잡지 못했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펠릭스는 계속 야단을 떨고 있었다. 우리를 상대하고 있는 녀석…… 제이미는 포트에 꽂혀있는 USB를 바라보다가 검색창을 다시 띄웠다.

“잠깐만, 펠릭스, 기다려 봐.”

그는 해킹 프로그램의 검색 지원 탭에서 ‘계정 명’에 체크하고 ‘RedTide'를 검색했다. RedTide32라는 아이디가 나타났다. 제이미는 눈을 번뜩이고 펠릭스가 일러준 대로 RedTide32의 페이지 접속 내역을 찾아보았다. SCP-222 실험 요청이 오늘 자로 올라와 있는 상태였다. 그는 최근 내역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예상대로 방금 전에 삭제된 아이작의 페이지도 목록에 끼어있었다. 또한 놀랍게도, 기억 재생 장치 보급 요청도 얼마 전에 등록한 상태라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곧바로 적당한 다른 페이지를 골라 다시 검색했다. ’TP‘라는 단어가 계속해서 노출됐다.

‘기억 재생 장치…… 폐쇄된 프로젝트…….’

제이미는 핵심어를 아이작의 번호로 지정해두고 ‘TP’를 검색했다. 결과는 없었다. 그러나 핵심어를 ‘아이작 레인’으로 바꾸고 다시 검색하자, 이전에 나타났던 대부분의 문서가 다시 노출됐다. 문서들에 직접 접속할 수는 없었지만, 제이미가 결론을 내리기에는 충분했다. 그는 USB를 뽑아 주머니에 넣고 조용히 서버실을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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