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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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기지에서 진행되는 실험에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최근 자신에게 벌어진 일들에 의해 적잖은 짜증을 느끼고 있던 루핀 박사였지만, 이 말을 듣고서는 고개를 돌릴 수 밖에 없었다.

"남부로 내려가게 될 거라고 하더군요. 아마 여기보다야 따뜻하겠죠?"

바닥을 대걸레로 닦고 있는 남자는 승강기를 기다리고 있는 박사 옆에서 고개도 들지 않고 계속해서 얘기했다. 박사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동안 단 한 번도 그에게 입을 열어준 적이 없건만 이 남자는 개의치 않고 자신의 이야기를 주절거리곤 했다. 박사는 다시 감시 카메라를 올려다보면서, 이 촌구석에 처음 처박히게된 첫 날 복도를 청소하던 남자와 만나던 광경을 떠올렸다.

그 때도 이 남자는 자신을 쳐다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걸레질을 계속 하면서 새로 오신 분이냐고 한 마디 물은 뒤에, 자신의 이름을 밝히고 간략한 소개를 들려줬다. 박사는 그것이 외로움을 견디기 위해 아무렇게나 던지는 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그냥 잠깐 지켜봐주기로 했다. 루핀 박사는 D계급 인원과 사적인 대화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남자는 자신의 말을 들어주는 다른 사람이 있다는 사실 자체에 조금 놀란 듯 했다.

덕분인지 그때부터 이 남자는 유독 박사에게 달라붙어서 끝없는 인생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기지를 빠져나갈 수 없는 형편이었던 루핀 박사에게는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고 또 반복하는 청소부가 새로운 두통거리로 떠오를 수 밖에 없었다. 그를 떼어놓기 위해서 얼굴 표정만으로 최대한의 무관심과 냉대를 표현하려고 노력해보기도 했지만 아무 소용 없었다. 시간이 지나자 박사는 오히려 이야기가 끝날 때마다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결국 그는 남자의 유년 시절에 벌어진 자전거 도둑에 얽힌 사건과 그의 삼촌이 잡아온 40cm짜리 도미, 그가 아내를 처음 만났던 날짜까지 기억할 수 있게 되었다.

어느 날, 그는 자신이 무죄라고 주장했다. 누명 시나리오는 진부한 소재였고 그때 박사는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그 자리를 떠났다. 결국 가석방을 목적으로 접근했던 것인가. 이 남자만큼은 솔직히 인정하길 바랐는데. 그런 생각이 들자 박사는 어쩐지 자신에게 화가 났다. 한순간이었지만 그는 남자에게서 무언가 기묘한 느낌을 받았는데, 그때는 결국 똑같은 변명에 지나지 않더라는 사실에 실망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그는 D계급이었다.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짊어지고 있는 남자. 박사가 그를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루핀은 창문 하나 없는 방에 홀로 앉아서 하루 종일 그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마음 저변에서 맴돌며 그를 노려보는 것 같던 그 느낌이 남자의 차분했던 목소리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에게서는 불안감과 초조함을 찾아볼 수 없었다. 아내와 다섯 살 먹은 딸의 얘기를 할 때에는 다시 바깥 세계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는 확신까지 느껴지는 듯 했다.

"어쩌면 돈을 약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아내는 항상 제게 '0' 조금만 더 벌어올 순 없냐고 우스개를 하곤 했죠."

명찰에 새겨진 'D-3097'라는 글자가 유리창에 비쳤다. 정말 이 남자가 그런 끔찍한 짓을 저지를 수 있었을까? 박사는 내심 그가 무고하기를 바랬다. 아니다, 그렇게 되면 그는 억울한 희생자가 되지 않는가? 어느 쪽이 사실인 편이 더 마음이 편할지 도무지 정할 수가 없었다. 박사는 그가 투입될 실험에 대해서 잊으려고 애쓰면서, 한편으로는 그가 참가의 보상으로 '자유'라는 말을 듣지 못했다는 점에 대해 감사했다.

"……내일이 로라의 생일입니다. 요즘 아이들도 테디 베어를 좋아할까요?"

박사는 순간적으로 대답을 해주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혔다. 그는 등을 돌린 채 열심히 먼지를 닦고 있는 남자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채로, 목구멍 끝까지 올라온 말을 가까스로 집어삼키고 천천히 승강기에 몸을 실었다. 박사는 망설이다가 마침내 버튼을 눌렀고, 좁아져가는 문틈 사이로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럼요, 정말 좋아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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