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굴 이야기 1
평가: +6+x

제37K기지에서 가장 큰 명물 중 하나로 꼽히는 건 단언컨대 제37K기지 승강장이라고 할 수 있었다. 간헐적으로 깜빡이는 승강장의 전등 불빛과 이따금 나오는 기계장치의 숨소리는 그 지역의 대표 명소로도 유명했다. 외벽은 녹 슨 쇠창살로 되어 있어 밖을 살펴보기 아주 훤하기까지 했다. 그야말로 관광을 위한 곳을 손색이 없었다.

물론 단순히 그것 때문에 이 낡고 더러운 승강장이 이 비루한 기지에서 가장 큰 명물 중 하나로 자리잡게 된 건 아니다. 직원들 사이에서 소문이 하나 나돌기를, 사실 그것은 살아있다나. 때때로 승강장이 탑승자의 의지하고는 전혀 상관 없이 재단이 파악하지 못한 아주 깊은 곳으로 보내버린다고 한다. 이유는 모른다. 원인도 모른다. 검사 결과, 고장도 아니다. 그리하여 상부는 이를 묻어버렸다. 대충 기계 오류로 도장찍고 쉬쉬한다는 소리다. 그러니까, 만약 자신이 그 상태가 되어버렸다면 살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는 게 좋을 것이다.

"살려줘…"

그리고, 그 살아있는 승강장 안에는 위태롭고 가엽디 가여운 이고양 연구원이 있을 뿐이었다.

#1

그날은 평소보다는 꽤 평범한 날이었다. 제21K기지를 떠나 제37K기지로 전근해야할 것을 지시 받았을 때, 이고양 연구원은 단순히 자기가 쓴 블로그 글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이런 전근 같은 경우는 여러 이유가 복합적으로 얽혀 생기는 게 일반적. 그녀가 썼던 짜투리 블로그 형식의 글하고는 별로 상관이 없었을 테다.

제37K기지로 이주한 이후, 그녀의 생활은 180도 달라졌다. 우선 아침 일찍 깨어나는 일이 잦아졌다. 제37K기지의 시작은 대한민국 그 어느 기지보다도 빨랐다. 엄연히 물류 회사인 만큼 기지를 통해 오고가는 많은 물자를 아침 일찍부터 체크하고 점검해야 했다.

"생산직도 아니고… 난 엄연히 연구원인데."

처음엔 기분이 별로 좋진 않았다. 하지만 이것도 이젠 어느 정도 적응됐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이고양 연구원. 배터리가 바닥났어요. 가서 갈아 끼우고 오세요."
"네, 네? 제가요…?"
"하하, 그럼 내가 하냐? 까라면 까야지."
"으으, 네."

그래, 저게 문제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일하는 건 딱히 상관이 없었다. 피곤하기는 하지만, 시간대의 차이만 있을 뿐 다른 기지에서도 동등한 업무량이 강요된다는 점에서 더더욱. 그렇기에 물류직 일도 꽤 금방 적응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배터리를 갈아 끼워오라는 상사의 지시 만큼은 도저히 적응되지 않았다.

"자꾸 내게만 배터리 갈아끼우라고… 자기도 무서우니깐 그러지!"

이고양은 투덜거리며 복돌를 거닐었다. 엄연한 물류 기지인 만큼 이곳의 시설은 다른 기지보다 큼지막하고 넓직했다.

"당장 이 일 때려치우고… 아니, 그러긴 싫어. 어떻게 올라온 자린데."

이고양 연구원은 멈춰섰다. 적당한 루트, 적당한 시간대에 사람들이 붐비지 않는 곳을 향하다 보면, 아무도 알 수 없는 미지의 공간으로 올 수 있었다.

이곳이 지하의 입구다. 이고양은 머리를 들어 승강장을 보았다. 자신보다 머리 두 세개는 더 커보이는, 거대한 승강장이 존재했다.

"아휴, 내가 진짜! 나이만 동갑이었어도!"

이고양은 툴툴거리는 것을 멈추지 않고 작고 여린 손가락으로 승강기의 버튼을 눌렀다.

#2

승강기를 타고 버튼을 찾아 눌렀다. 오랜 때가 묵었을 때 생기는 특유의 끈적한 감촉이 느껴졌다. 그녀는 잠깐 인상을 찌푸렸지만 금세 특유의 말랑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승강기가 작동하자 더럽고 퀘퀘한 먼지가 두둥실 떠올라 전등 빛에 모습을 보였다. 그녀는 콜록거리며 손으로 먼지를 날려보냈다. 확실히 이곳은 50년의 세월이 묻어 있는 곳이다. 제37K기지는 이러한 오래된 시설들이 정말 많았다.

덜컹이는 소리, 기계의 소음, 깜빡이는 전등 등의 요소를 어떻게든 견디기만 한다면, 승강기는 자신을 어느 한 장소로 보내준다.

몇 분을 기다렸을까. 승강기에서 도착했다는 경쾌한 신호음이 들렸다. 이고양은 마음속으로 셋까지 세고는 승강기 문을 열어젖혔다.

"으으, 역시 적응이 안되는 곳이야."

이곳은 한 마디로 표현하기 어려운 장소였다.

가장 먼저 느껴진 건 코를 뚫는 비릿한 흙내음이었다. 흙과 기계, 시설들이 섞인 기이한 풍경도 보였다. 천장에 정확히 나열되어 설치된 전등들과 흙 내부에서 스믈스믈 올라오는 자연광, 기능을 알 수 없는 기계장치들이 그녀를 반겼다.

"여긴 늘 똑같네."

이고양은 중얼거리며 앞으로 걸었다.

"정지. 정, 정지. 잠시, 잠시, 잠시잠시, 검문이, 검문 있겠습니다."

곡괭이를 지고 있던 사람 형상의 로봇이 그녀를 멈춰 세웠다. 듣기로는 건설 로봇이라고 했던가. 도대체 뭘 건설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것들은 언제나 이 지하 깊숙한 곳에 득실거렸다. 개미처럼.

이 로봇들은 이 구역에 통제를 담당하기도 했다. 분명 이고양을 신원 불명자라고 판단하고 멈춰세운 것일 테다.

"이고양 연구원입니다. 배터리 교체하러 왔어요."

"배터리. 배, 배터리. 말씀, 말, 말, 말씀이십니까?"

"아, 네."

"정지, 잠, 잠시, 검문이 있겠습니다."

로봇의 성능이 꼭 좋다고는 할 수 없었다. 제대로된 소통도 불가했다. 그래도 그녀는 차분히 최선을 다해 답했다. 솔직히 이대로 신원미상자로 판단되어 이 지하에서 쫓겨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이내 그만두기로 했다. 선임의 꾸중을 생각하기만 해도 몸이 옴짝달싹했다.

"확, 확인했습니다. 이동하셔도 좋습니다."

로봇은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제 할 일을 하러 돌아갔다. 이고양 연구원은 한숨을 한 번 내쉬었다. 안도의 한숨은 아니었다. 사실 지금이 전혀 안도할 상황은 아니긴 했다.

깊고 넓은 통로를 걸었다. 흙바닥은 어느새 철제 다리로 변해 있었다. 이고양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땅굴 벽에는 그녀를 세웠던 것과 같은 기종의 로봇들이 있었다. 그것들은 전부 곡괭이나 중장비를 들고 땅굴을 파고 있었다.

도대체 땅굴을 더 확장시키는 이유가 뭘까? 새삼 그녀는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게다가 불안은 더 확장되어 '혹시나 땅굴 때문에 지반이 무너지면 어쩌지?' 같은 생각으로 변질되었다.

"저건…"

불안함을 떨치고 가려던 이고양은 멈춰 섰다.

"뼈? 공룡 뼈?"

그것들 중 하나가 땅굴을 파고 있는 모습이 얼핏 보였다. 흙더미 속에서 희고 딱딱한 뭔가가 보였는데, 그녀는 어쩌면 화석일지도 모른다는 호기심이 들어 가까이 가보았다.

"뭘 파고 계신 건가요?"

"작업 중이니깐, 가까이 오면 다친다."

로봇의 이질적인 음성과는 확연히 다른 목소리였다. 거대한 기계장치 때문에 로봇인 줄로만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사람이었다. 장비 중인 건 외골격 장치 같았다. 이고양은 빼꼼 머리를 옆으로 기울여 그 모습을 보았다.

"뭐야, 왜?"

외골격 사이로 드러난 건 인부 유니폼을 입은 날카로운 인상의 여자였다. 노란색 헬멧과 칙칙한 복장, 어깨 견장에는 안전제일이라는 문구까지. 누가 뭐래도 인부 유니폼이었다.

하지만 정말 노동자가 맞을까?

"저, 누구세요?"

그렇기에 물어본다.

"여기 일하는 사람."

여자는 묵묵히 거대한 기계 발톱으로 땅을 파고 지반을 지탱하고 있었다. 그녀의 몸은 흙투성이였다. 이고양은 신기하단 듯이 쳐다보았다.

"왜 여기서 일하고 계세요?"

"여기서 일하면 안 되냐?"

"아뇨, 그건 아닌데… 궁금해서요."

여자는 침묵했다. 집중을 깨고 싶진 않다는 것일까. 이고양도 구태여 질문하기를 멈췄다. 그리고 여자가 하는 것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세린."

"네?"

"나세린, 그게 내 이름이야."

나세린. 꽤 독특한 이름이었다. 세린은 이고양에게 시선 하나 옮기지 않고 일에 집중하고 있었다.

"여기서 뭐하냐고 했지? 보다시피 땅굴을 만들고 있어."

세린은 마구잡이로 긁어내 그것들을 떼어냈다.

"자, 잠깐!"

"응, 왜?"

"뼈를 그렇게 긁어내도 괜찮은 거에요?"

"왜, 사골 육수라도 우릴 생각이냐?"

세린은 영문도 모르겠다는 듯 그제서야 이고양을 쳐다보았다. 이고양은 무어라 반문하려다가, 말을 곱씹고는 입을 열었다.

"그, 이건 유물학적 가치가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분명 공룡의 뼈라거나…"

"푸흡."

세린이 웃었다. 비웃듯이 웃는 건 아니었다.

"이거 사람 뼈야."

그렇게 말하면서 세린은 자신의 머리보다 더 거대한 뼈를 들어 보였다. 길쭉하고 뾰족했다. 손가락 뼈였다. 이고양은 자세히 들여다보고는 이내 깜짝 놀랐다.

"으엑?! 뭔 사람 뼈가 이리 큰 거죠?"

"이 근방에 묻혀 있는 뼈들은 다 이래. 아, 그러고 보니. 넌 이름이 뭐냐?"

그러고 보니 상대방의 이름을 묻기만 했을 뿐, 자신의 이름을 밝힌 적은 없었다. 이고양 연구원은 식은 땀을 흘리며,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이고양… 이고양이에요."

"이고양, 이고양이라."

특이한 이름이네. 세린은 혼잣말하고는 흙을 다시 팠다. 그러다가 그녀가 일하면서 문득 다시 이고양을 바라보았다.

"넌 재단 사람이야?"

"네, 맞아요. 그쪽은 아니에요?"

"음, 아니. 난 그렇게 대단한 사람은 아니라서."

세린은 다시 시선을 옮겼다.

"할 얘기 끝? 볼일 없으면 이제 그만하고 가."

"아, 저, 그."

"또 뭔데? 나 일하는 거 안 보여? 너도 슬슬 일 하러 가지. 배터리 교체하러 왔다며."

아까 얘기를 얼핏 들은 게 있었다. 세린은 귀찮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다시 바라보았다. 이고양의 표정은 뭐랄까, 복잡했다. 울상을 짓느 것 같기도하고 결심에 선 것 같기도 했다.

이내, 이고양이 소리쳤다.

"저, 저랑 같이 가주실 수 있나요! 배터리 교체하러!"

"하아?"

영문 모를 소리에 이윽고 세린의 표정이 당혹감으로 일그러졌다.





🈲: SCP 재단의 모든 컨텐츠는 15세 미만의 어린이 혹은 청소년이 시청하기에 부적절합니다.
따로 명시하지 않는 한 이 사이트의 모든 콘텐츠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 라이선스를 따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