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은 일

SCP-239의 최신 뇌 활동 연구 결과, SCP-239를 혼수상태에 두기 위해 사용하던 일련의 약물에 내성이 쌓이고 있다고 추정된다. 이 때문에 SCP-239가 쉬이 다시 깨어날 수 있다. 2008년 클레프 박사가 SCP-239를 죽이는 데 거의 성공한 이래 다른 시도는 전부 실패했다. SCP-239는 지금껏 모든 실질 공격 시도를 무의식적으로 막아냈고, 연합 사절이 제안한 현실조정자 파괴 방법도 성과가 없었다. 이제 어쩔 수 없이 O5 위원회에 현재 구속된 알토 클레프 박사를 풀어주고 이 사안에 배정해 달라고 요청할 수밖에 없다.
잭 브라이트 박사
재단 이사관


클레프는 눈을 천천히 뜨는 듯 하더니 흐린 빛에 눈이 부셔 바로 다시 감았다. 춥고 벌거벗겨진 느낌이었다. 가물가물할 정도로 오래된 동상과 십 년간의 부동자세에서 비롯된 찌뿌듯함이 살갗을 기어올랐다. 지금 내가 깨어 있나? 아니면 또 그놈의 차디찬 꿈을 꾸는 중인 건가?

클레프는 손목에 따스하고, 부드러운 여성의 손의 감촉을 느꼈다. 클레프는 다시 눈을 뜨고 뻑뻑한 눈을 어렵사리 깜빡거리며 눈앞의 크고 봉긋하게 솟은 가슴을 쳐다보았다.

"클레프 박사님?"

클레프는 가슴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여사님은 누구실까나…?"

여성은 옷깃을 여몄다. "박사입니다. 로어 박사요."

클레프는 그 어설픈 거짓말을 듣고만 있었다. 알고 있었다. 이름이 로어 박사가 아니고말고. 클레프는 그녀의 이름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할 터였다.

"뭔 일이 있었던 거지?" 클레프 박사가 물었다.

"냉동수면에서 박사님을 깨웠습니다." 로어 박사가 벌거벗은 클레프 박사에게 수건 한 장을 건네주며 말했다. "박사님 도움이 필요해요."

"오래된 일인가, 아니면 새로운 일인가?" 클레프 박사가 물었다.

"오래된 거요."

"239? 343?"

"239요."

"그 쬐끄만한 꼬맹이 죽일 때도 됐지."

"이젠 별로 조그마하진 않아요." 로어가 클레프에게 문서를 넘겨주며 말했다.


"기어스 박사님, 저런 현실조작자들을 그냥 두고만 있는 겁니까? 재단 입장에서 생각해 봐도 바보같아 보입니다만."

"확신하건대 우리가 확실히 통제하고 있습니다, 슈메털링 사령관님." 둘 중 더 키가 작고 머리가 까진 쪽이 답했다.

슈메털링은 기어스의 호언장담에 별로 설득된 눈치는 아니었다. 기어스는 연합 사령관이 그렇게 기뻐하지는 않을 것이란 것은 알고 있었다. 특히 239가 아직 있다는 사실을 미리 알리지 않았으니까.

"당신네 사람들이 이미 239를 제압했다고 생각했습니다만." 슈메털링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다른 현실조작자는 죽였더군요. 우리 관측소에서 이미 봤죠. 239도 없앴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안타깝게도, 살아 있습니다." 기어스가 침착하게 말했다.

"그러시다면야," 슈메털링이 말했다. "어쩔 수 없군요. 연합 측에 재단이 아직 정신을 못 차렸다고 보고해야겠습니다."


클레프가 로브를 허리춤에 둘렀다. 일어내서 로어를 본 이래 계속 발기해 있는 자지에는 신경쓰지 않는 듯했다.

"그럼 이제 어딜 가는 거지, 왕가슴 씨?"

"브리핑해드리려고요, 클레프 박사님. 239 프로젝트 현 진쟁자와 만나뵈실 거에요."

"캐링턴?"

"2017년 무효화 시도 때 239-X가 캐링턴 박사를 죽였습니다. 전부 보고서에 있어요."

클레프는 으쓱해 보고는 주위를 둘러봤다. 다섯 층으로 쌓여 있는 기다란 유리관으로 된 냉동기계에 재단의 죄수를 가둬 두었다. 클레프가 갇힐 때쯤 비용을 아끼려 신축되었던 이 시설은 지금의 삼분의 일 정도밖에 안 되었다. O5 쪽에서 죄수들을 가둬두고 먹이는 것보단 얼려두는 게 더 싸게 치인다는 걸 안 뒤로 죄수가 무더기로 여기 실려 왔다.

클레프는 멈추어 서선 갑자기 투명한 얼음 너머로 보이는 익숙한 얼굴을 바라봤다. 얼어 있는 이만츠의 창백한 얼굴은 마치 자기만 알아들을 수 있는 농담을 들은 듯 미묘한 미쇼를 띄고 있었다. 그 옆에는 글라스가 충격받고 놀란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클레프는 로어에게 물었다. "내가 얼어 있을 때 짓고 있던 표정이 어떻든?"

"꼴리셨던데요." 로어가 건조하게 말했다. 클레프는 웃어 보이곤 다시 유리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옆에는 당연히 있어야 할 사람이 있었다. 클레프는 재단이 방향을 틀었던 초기 결과 중 하나 콘드라키의 바로 앞에 '격리되어' 있었단 점에 놀랐다. 한때 클레프의 친구였던 콘드라키의 분노로 뒤틀린 얼굴은 입을 벌려 소리없는 비명을 지르고 있었고 눈살은 분노와 놀람에 찌푸려져 있었다. 콘드라키 옆에는 티 하나 없는 완벽한 얼음 속에 나비 몇 마리가 생전의 광채를 그대로 유지한 채 갇혀 있었다. 클레프는 손을 들어 콘드라키가 있는 관에 갖다 댔다.

몇 초가 흐른 뒤, 클레프는 손을 떼곤 미소지었다. "콘드라키, 넌 항상 개새끼였지."

클레프는 로어를 돌아보며 말했다. "당신네가 가둔 내가 아는 사람은 더 없나?"

"없죠." 로어가 말했다. "A급 기억소거제에 면역이던 목격자 몇 명이랑, 무단침입자 몇 명이랑, 브라이트 박사의 몸 몇 명 정도 뿐이라서요."

"잭이 아직 활동 중이라고?"

"아뇨." 로어가 말했다. 클레프는 그 거짓말을 훤히 꿰뚫어 보고 있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클레프는 흰 가운을 입은 키 작고 수수한 여자 건너편에 앉았다. 그 여자는 클레프가 들어올 때부터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클레프 쪽에서는 신경도 안 쓰고 있었지만. 클레프는 로브를 있는 대로 풀어헤친 채로 앉으며 받은 파일을 최대한 느릿느릿 읽어나갔다. 가끔 한 번씩 파일에서 눈을 떼고선 여자를 쳐다보고 웃어주고 다시 읽기도 했다.

한참 후 클레프는 멈추고선 파일을 내려놓고 여자를 쳐다봤다.

"그쪽 전부 완전 씨발 천치 새끼들 아냐?" 클레프가 말했다.

"뭐라고요?" 클레프가 이름을 물어보려 하지도 않았던 여자가 말했다.

"심리 트릭? 강한 압력 가하기? 칼로 찌르기? 총으로 쏘기? 백업 계획은 어딨는 거고?"

"모든 시험은 O5 쪽에서 허가받았는데, 무슨 문ㅈ-"

"당신 읽는 법은 알아?" 클레프가 갑자기 위협적으로 쏘아붙였다.

여자는 잠자코 있었다.

"아니라는 뜻으로 받아들이지. 난 말이야, 혼자서든, 도움을 좀 받았든, 재단에서 내 손으로 처분한 현실조작자가 열네 명이 넘어. 확실히 죽인 게, 열네 명 이상이라고. 뭐가 아직 기밀인지 알려주는 사람이 없어서 더 이상은 못 말하겠는데, 내 생각에 안타까울 정도로 하찮은 당신 보안 등급으로도 내 공혁을 조금은 읽을 수 있었을 건데?"

"네," 여자가 답했다. "박사님이 관여했던 SCP 처리 보고서 몇 개를 읽어보았-"

"제대로 읽기는 했어?" 클레프가 또다시 말을 끊었다.

"네?"

"내가 거기에 쓴 글자를 토씨 하나까지 제대로 읽어봤냐고."

"당연하죠. 박사님이 쓰신 방법을 실험해 보았는데, 저희 목표 달성에는 부족해 보입니다."

"당신네가 "방법"이라 하는 그거 말인데, 그건 그냥 비계(飛階)일 뿐이야. 뭐라도 지으려면 비계에 올라서서 지어야지. 여기 일말의 가치라도 있던 사람들은 다 냉동고에 갖다 처박은 거야?"

여자는 불편한 듯, 클레프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며 자리에서 몸을 뒤척였다. "그럼, 박사님은 뭘 하셨으면 좋겠습니까?"

"간단해." 클레프가 불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239가 무의식적인 방어력을 이렇게 벼려 놨으니… 깨우는 수밖에."


"239를 깨운다고요?" 슈메털링은 질겁했다. 그리고는 10인치 두께의 전도성 투명막 너머 사람이 자기 목소리를 들을세라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슈메털링은 전보다는 작지만 여전히 분노 섞인 목소리로 "완전히 미쳐 버린 거요?" 라고 말했다.

"아닙니다." 기어스가 답했다. "이 상황을 다루는 데 최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 말이오?" 슈메털링이 쏘아붙였다. "당신들이 지금껏 타입 그린을 이렇게 자라게 내버려 뒀는데, 도대체 누가 이걸 수습할 수 있단 말이오?"

"클레프 박사입니다." 기어스가 답했다. "이번 일에 쓰려고 풀어줬습니다."

"클레프?" 슈메털링이 물었다. "알토 클레프 말이오?"

"동명이인이라도 있는 겁니까, 사령관님?"

"없긴 하다만." 슈메털링이 벽 너머 자고 있는 239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답했다. 기어스는 슈메털링이 했던 말을 머릿속에 기록해두고 슈메털링 옆에 가서 섰다.

"무서워 할 일 없습니다, 사령관님." 기어스가 답했다. "다 통제하에 있으니가요."

슈메털링은 턱살이 떨리는 채 기어스 쪽으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말이야 쉽죠, 박사님. 솔직히 말해 봐요, 당신은 걱정 안 됩니까?"

"아, 걱정이야 되죠." 기어스가 표정 변화 하나 없이 완벽하게 평탄한 목소리로 답했다.


클레프 박사는 필요한 모든 물건에 접근할 수 있다. 모든 인원은 성적이지 않은 방법을 전부 동원해 클레프 박사를 도와야 한다. 다만 클레프 박사에게 클레프 박사를 포획했던 인원이 아직도 있다는 사실을 알리지 말아야 한다. 클레프 박사의 연락책으로 로어 박사를 둔다.


빅토리아풍 서재에 들어서자 파이프 담배와 고서의 향기에 클레프는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노인 하나가 등이 높은 의자에 앉아 양장본 돈키호테 한 권을 허벅지에 펼쳐두고 읽고 있었다. 노인은 처음 책에서 눈을 땠을 떼 놀란 듯 보였지만, 이내 미소를 지어 보였다.

"클레프 박사!" 노인이 얼굴에 패인 주름도 지울듯한 커다란 미소를 지어 보이며 탄성을 내질렀다.

"반갑습니다, 343."

"어허, 그렇게 부르지 말라 했잖나." 노인이 손사레를 치며 말했다. "친구끼리 번호로 부르면 정이 없지. 자, 앉게."

클레프는 무릎을 굽히기도 전에 의자가 있을 거란 걸 알았다. 클레프는 편안하고 아주 푹신한 의자에 앉아 그 늙은 신사를 쳐다봤다.

"당신이 뭔지 잘 압니다." 클레프가 최대한 진지한 태도로 말했다. "그쪽 이야기라면 아무에게도 한 적 없고, 당신을 처분하자고 한 적도 없습니다. 3등급에 머무르면서 크게 위협적인 행동은 안 했으니까 말입니다."

노인이 계속 기쁜 듯 미소를 지었다.

"그럼, 연합 소속일 때 저도 기억한다는 겁니까? 제네바? 1989년?"

노인은 끄덕였다. 조금 전만큼 기분이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그리고 당신이 저한테 진 빚이 있다는 것도 기억하십니까?"

노신사의 미소가 살짝 엷어졌다. "아무렴, 박사님. 기억하고말고."

"그 빚, 갚을 때가 왔습니다. 타입 그린이 하나 더 있는데, 이 녀석은 4등급까지 나아갔습니다."

"이보오, 박사양반, 난 아주 많이 늙었다네. 내가 뭔 쓸모가 있을지도 모르겠고. 가끔 책을 찾다가 그 제목을 까먹고는 나중엔 그 책 자체가 사라져버리네. 언젠가 젊은이 하나가 나에게 와서는 뭔가를… 뭔가를 물어봤는데 그 사람이 거기 있다는 걸 잊어버렸네. 그러더니 그 사람이 사라져버리더군. 완전히. 지금은 그 젊은이가 기억도 나지 않네. 이젠 나한테 말 걸어주는 사람은 없다네…"

343의 주름이 자글자글한 눈가에 눈물이 졌다. 클레프는 자칫 안타까울 뻔 했다. 뻔만 했다. 제네바 일이 기억났기 때문이다.

"도움이 필요합니다."

"난 하는 말은 지키네, 박사. 필요한 일은 다 해주겠네."

클레프는 일어나 자리를 떴다. 어려운 부분은 끝났다.


클레프는 다시 자리에 앉아 계획을 돌아보았다. SCP-343이 작전 지역 가운데에 선다. 클레프 본인이 미끼 역할을 맡는다. 239는 클레프를 알아볼 테고, 일단 각성하면 무의식적 방어력이 크게 떨어질 것이다. 그러면 반드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클레프가 고개를 들자 슈메털링이 들어오고 있었다.

"재단에서 당신을 풀어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클레프 박사님." 슈메털링이 말했다.

"우리 구면인가요?"

"못 알아볼 만도 하죠." 슈메털링이 답했다. "시간이 꽤 흘렀으니."

클레프는 그저 어깨만 으쓱해 보였다. "뭘 원하는 겁니까?"

"뭐 하나 드리려고요. 그동안 연합에 이바지한 공로에 대한 일종의 상입니다."

슈메털링은 주머니에 손을 넣으려 했지만, 갑자기 눈앞에 시퍼런 산탄총 총열이 보이자 멈췄다.

"호주머니 튀어나온 게 총 같이 생겼는데요." 클레프가 말했다.

"총 맞습니다." 슈메털링이 말했다. 슈메털링은 주머니에 손을 넣고 천천히 보라색 리볼버를 꺼내들었다. 그리곤 총을 살짝 돌려 손잡이 부분을 클레프에게 내밀었다.

클레프가 미소지었다. "이거 우리 거였죠, 아마?"

"핵리볼버입니다. 당신네 재단에서 몇 년 전에 잃어버린 그거요. 연합에서 찾았습니다."

"이게 사라진 데 그쪽은 관계가 없고요?"

"연합이요? 당연히 아니죠." 슈메털링이 말했다.

"연합 말고 당신 얘깁니다." 클레프가 답했다.

슈메털링은 어깨를 으쓱하는 걸로 답을 대신했다.

"오랜만에 봬서 반가웠습니다, 클레프 박사님. 만사형통하시길."

클레프는 끄덕이며 슈메털링이 방에서 나가는 걸 지켜봤다. 그리곤 보라색 리볼버를 재빨리 집어 호주머니에 숨겼다.

로어가 음료 두 잔을 들고 들어와 클레프와 자기 사이에 두었다. "사령관이 뭘 바라던가요?"

"옛날 얘기 좀 하고 싶어 하더군." 클레프가 답했다.

"재밌네요." 로어가 말했다. "슈메털링이 박사님이랑 일했단 얘기는 들은 적이 없는데."

"같이 일한 적 없어." 클레프가 말했다.


클레프는 작은 상자를 닫아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들었다. 클레프는 미소지었다. 패는 모두 준비해 뒀고, 곧 모두가 각자 위치로 갈 테다. 자기 앞날이 어떻게 될 지는 몰랐지만, 재단에게 진 빚을 갚아야 했다.

때 이르게 들어간 관 속의 추위가 그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자 그는 떨었다. 그리고 손에서 우두둑 소리를 냈다.


"진짜 될 것 같아요?" 로어가 물었다.

"되겠지. 저 벽 반대편에서 239가 손을 쓸 수는 없을 거니까."

클레프가 손에 벽옥색 원반을 쥐고 앞뒤로 흔드는 동안 인부들이 천천히 거울을 제 위치로 올렸다.

"만약 안 되면요?"

"그러면 내가 돌아오기 전에 거울을 깨 줘."


클레프는 자기보다 키가 작은 기어스를 잠깐 훑어봤다.

"클레프 박사. 괜찮아 보이는군요."

"기어스. 존나게 늙어 보이는군."

기어스는 대답 없이 클레프에게 키카드를 넘겨주었다.

"이걸로 지정된 길을 따라서 가실 수 있을 거요. 관측실 내에 텔레킬 전신 갑옷과 요청한 무기가 있을 겁니다. 행운을 빕니다, 클레프 박사."

"기어스, 할 말이 그게 다요?"

"뭐라 하셨죠, 클레프 박사님?"

"나를 저 냉지옥 속에 11년 동안이나 가둬 두고선 미안하단 소리 한 마디도 없습니까?"

"클레프 박사님께서 저희 동료를 죽이려 하셨잖습니까? 전 생포를 도우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클레프는 기어스에게 얼굴을 찌푸려 보이고서는 관측실로 향했다.

"알토?"

클레프가 멈췄다. "왜 그러시오, 기어스?"

"영… 좋지 못한 상황이었소, 그땐."


그 방에선 컴퓨터 열두어 대가 조용하게 윙윙대는 소리 말고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 방은 시설의 모든 게 들어 있는, 시설의 핵과 같은 곳이라 방화벽 수십 개와 보안 규약 수백 개가 막고 있었다. 그런데, 그 모두가 뚫렸다.

조작 패널 앞에 있는 남자가 잠깐 자판을 두들기더니, 웃고는, 다시 자판을 두들겼다. 그러고는 가장 가까운 패널 쪽으로 가서 패널 두 개를 꺼내고 보관 시스템을 제 위치로 밀어넣었다.


클레프는 기어스가 몇 대 안 남은 탈출용 헬기 쪽으로 걸어가는 모습을 봤다. 제19기지는 사실상 거의 전부 버려져 있었다. 클레프 박사의 계획에 꼭 필요하거나 간섭하지 않을 인물 한 줌만 남아 있었다.

클레프는 약 15분간 기다리며 철창 너머로 239가 자는 모습을 보았다. 239는 이제 젊은, 성숙한 여성의 모습이었다. 지난 몇 년간 잘못된 시도를 계속해온 덕택에 죽이기 어렵기까지 할 것이다. 자신의 이드id가 화한 희미한 영령체가 텔레킬 벽을 긁어대며 방안에서 깜빡이는, 239의 모습을 보았다.

클레프는 돌아서서 얇은 헬멧을 들어 머리에 묶어 썼다. 예상보다 갑옷이 무거웠지만 잘 맞았다. 그는 장갑을 끼고 외투 아래 둔 보라색 총을 만져 보고, 주머니를 더듬어 비상용으로 가져온 작은 상자를 찾았다.

클레프는 미소를 짓고는 기어스가 준 키카드를 꺼냈다. 클레프는 유리 앞에 있는 조작판에 키카드를 밀어넣고 모든 스위치를 끔 상태로 내렸다. 그리고 리볼버를 꺼내 천천히 일어나는 현실조작자를 향해 겨눴다.

공이치기가 공이를 쳤고, 크게 쩍 하는 소리가 방 안에 울리더니 강철이 구부러져 파편이 안쪽으로 쏟아졌다.


클레프는 아주 빠르게 달리고 있었다. 239는 분명히 자기 뒤 어딘가에 떠 있을 터였다. 클레프는 위험을 무릅쓰고 뒤를 돌아보았다. 땅이 물로, 오줌으로, 흙으로, 공기로 바뀌고 있었다. 클레프는 239가 약에 취해 능력이 약해져 세상에 미치는 영향이 줄어 있기를 바랐다.

물론, 지금 보니 그 희망은 헛된 것이었지만.

클레프가 모퉁이를 도는 새 벽이 불타는 아기 쪼가리들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시체 타는 냄새에 클레프의 속이 약간 메슥거리더니 이윽고 불쾌할 정도로 꾸르륵거렸다. 모퉁이 하나만 더 돌면 원점으로 되돌아올 터였다.

10피트 남았다. 9피트, 8, 7…

클레프는 343이 제 위치에 있으리라 생각하며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클레프가 이중문으로 쳐들어왔을 때 로어는 대형 거울 옆에 있었다. 클레프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로어를 쳐다봤다.

"너는 씨부럴 왜 아직도 여기 있는 건데?"

"혼자서 일 안 하는 거, 맞죠? 도와드리러 왔습니다."

"혼자 아니라고!" 클레프가 소리질렀다. 등 뒤의 문이 눈에서 바비 인형 팔이 튀어나오는 새끼고양이 여러 마리로 바뀌고 있었다. "343은 어디 있는 거야?!"

문이 천천히 열렸다.

공중에 뜬 채로 문 사이를 통과하는 존재는 소녀 같아 보이지도, 소녀였던 것 같아 보이지도 않았다. 사지는 수년간 위축되어 살가죽이 붙은 모습은, 마치 가늘고 긴 끈이 뼈를 감고 있는 듯했다. 239는 팔다리를 들 수도, 심지어 고개를 돌릴 수도 없었다. 팔에 꽃혀 있던 관들은 마치 지네처럼 239의 몸 위를 기어다니고 있었다. 새끼고양이로 된 벽은 침울한 듯한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239는 뭔가 말하려는 듯 입을 열었지만 끄르륵거리는 소리 밖에는 나오지 않았다. 그러고는 클레프를 바라보더니 이번에는 더 크게, 화난 듯 끄르륵댔다. 그녀의 창자에서 피비린내가 나는 검은 분변이 바닥으로 쏟아지더니 곧 석탄으로 변해 천천히, 종이에 붙은 불처럼 번져갔다. 클레프는 바닥이 변하는 게 느려지다가 멈출 때 미친 듯이 뛰려 했다. 클레프는 눈을 두 번 깜빡이고, 방을 둘러봤다.

343은 로어 바로 뒤에 서서 얼굴을 찌푸리며 집중하고 있었다. 그 늙은이의 왼쪽 콧구멍에서 코피 한 방울이 흘러나오더니, 인중을 타고 그의 셔츠에 떨어졌다.

343이 움찔했다. "박사, 할 일이 있다면 지금…"

클레프는 다시 총을 들어 공이를 뒤로 당겨 떨어지게 두었다.

총이 살짝 튀어오르더니, 그 금속 표면에 에너지가 넘쳐흘렀다.

"이런 씹창!" 클레프가 소리를 질렀다. "망할 놈의 충전 시간은 왜 있는 거야?!"

소녀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소리지르자, 343은 239가 강행하는 세상 개변에 휘청거리며 울부짖었다. 239의 몸속 약물은 빠르게 분해되었고, 세상을 지배하는 능력은 점차 돌아와 갔다.

클레프는 로어를 붙잡아 힘차게 밀자, 로어는 멀리 떨어진 벽 쪽으로 비틀거리며 밀려났다. 클레프는 미친 듯이 반대쪽으로 뛰었다.

떠 있는 여자는 343이 자기를 멈추기 전에 잠깐, 아주 잠깐 공기를 염소로 바꾸었다. 십 년간 부서지고, 폭행당했던 어른 몸에 든 아이가 산산조각난 자기 정신을 쏟아내고 있었다. 늙은이 SCP는 귀에서 피를 흘리며 바닥에 꿇어앉아 있었다. 239가 잠깐 클레프에게서 눈을 때고 343 쪽으로 부유해 올 때, 343은 꼬여버린 손가락을 꽉 쥐고 있었다.

부디 거의 일어나지 않았기를 바랐던 일을 멈춰서 보며, 클레프는 아름다움마저 느낄 뻔했다. 239가 물리법칙과 존재를 뒤틀고, 343이 그걸 또 바로잡으면서, 그 둘 사이의 거리는 고무줄처럼 멀어졌다 좁아졌다를 반복했다. 마치 말썽꾸러기 손녀가 투정을 부리며 장난감을 바닥에 집어 던지는데, 참을성 많은 할아버지가 그걸 다시 주워 제자리에 두는 듯한 모습이었다.

클레프는 이제 죽어버린 새끼고양이 문을 조심스레 타고 돌아서 다시 리볼버를 들었다. 그리고는 총을 쏘았다. 붕 떠 있는 위협적인 존재에게서 육편이 떨어져 나와 뒤에 있는 거울로 떨어지는 동안, 클레프는 팔에 올라오는 고통을 느꼈다. 거의 바로 239의 살갗 아래에 암덩어리가 생기기 시작했고, 그녀는 비명을 질렀다.

"그 정도로는 까딱없겠지, 꼬마야?" 343이 빠르게 우주의 법칙을 되돌리는 동안 클레프가 소리쳤다.

239가 회목하기 전에 클레프는 총을 떨어트리고, 그녀의 자그마한 명치에 돌진해 그녀를 거울로 밀어넣으며 빨간색 원판을 잡아넣었다.


둘은 공허함이 느껴지고 밀이 무성한 이상한 벌판으로 떨어졌다. 소녀가 땅에 굴러다니며 몸을 일으키려 안간힘을 쓰는 모습이 불쌍할 지경이었다. 클레프는 근처에 서서 갑옷에 붙은 풀과 밀 쪼가리를 털어냈다. 클레프는 239 쪽으로 걸어가서 강제로 그녀의 몸을 위로 세워, 그녀의 허덕이는 가슴을 펼쳤다.

"얘야, 미안하다." 그가 비웃으며 말했다. "다른 세계에는 다른 규칙이 있는 법."

그는 양손으로 그녀의 목을 잡고 양 엄지로 기도를 눌렀다. 239의 뺨에 눈물이 흐르고, 떨리는 입술로는 제발 다시 생각해 보라는 무언의 갈구를 하고 있었다. 영양실조에 걸린 연약한 뼈가 오도독 하고 부러지자, 그녀의 눈은 다행히도 생기를 잃어 편안한 망각의 공허 속으로 떨어진 모습이었다.

클레프는 일어서서 다시 거울 쪽으로 걸어왔다. "예전에 했어야 할 일인데…"


클레프는 거울로 다시 나와 텔레킬 전신갑옷을 풀어 바닥에 떨어트렸다. 343은 근처 벽에 기대서 로어의 도움을 받고 있었다. 그녀가 노인의 눈에서 피를 닦고, 곧이어 노인이 헛기침을 하는 모습이 클레프의 눈에 들어왔다.

로어는 위를 쳐다보더니 웃고 나선 거울 모서리 쪽으로 달려왔다.

"239의 상태는?"

"섬멸됨." 클레프가 말했다.

"잘됐군." 로어가 말했다. 그녀는 클레프의 몸 가운데까지만 총을 들어서 쐈다.

클레프는 몸 일부가 떨어져나가는 걸 느끼며 거울 틀 쪽으로 비틀대며 뒷걸음질쳤다. 고개를 로어가 보라색 권총을 들면서 웃고 있는 모습을 보니, 은근한 기시감이 들었다.

"잭?"

로어는 미소지으며 장난기 가득한 눈을 반짝여 보였다. "물론이지, 알토. 그럼 누구겠나?"

외출혈과 내출혈이 시작되며 클레프의 다리에 힘이 풀려서, 그는 거의 주저앉아 있었다.

브라이트 박사는 피 흘리며 누워 있는 중년 남자를 내려다보며 기쁘다는 듯 쿡쿡 웃었다. "클레프, 난 날 죽이려 한 사람은 절대 잘 안 봐줘. 그게 어떤 상황이었던 말이야."

"잭, 진심이야? 그럴 만한 상황이었잖아. 친구 사인데?" 클래프가 물었다. "친구끼리 살인도 좀 할 수 있는 거지."

"친구끼리는 특히 안 되지."

"안됐군, 잭." 클레프가 위장 파편을 토해내며 말했다. "너 참 박음직하게 생겼는데 말이야."

클레프는 굴러서 일어나려고 안간힘을 썼다. 브라이트는 가만히 놔뒀다. 저러고 있으면 피만 빠르게 빠질 터였으니까.

"잭, 뭐 하나 까먹은 게 있는데." 몸 가운데 암덩어리가 생기며 경련하는 근육을 느끼며 클레프가 말했다.

"뭔데, 알토?"

"네 보석."

클레프는 거울 앞에 서서 피투성이 미소를 지어 보이며 장갑 낀 손으로 팔을 쭉 편 채 SCP-963을 들고 있었다.

"잘 가, 잭."

클레프가 갑자기 거울 쪽으로 되돌아가려 하자 브라이트는 다시 권총을 꺼내들어 방아쇠를 당겼다. 총이 튀어오르더니 전기의 호가 총열을 따라 흘렀다. 브라이트는 비명을 지르며 거울 쪽으로 돌진했지만, 동시에 큰 총소리가, 화약과 구리의 소리가, 방안을 울리더니 총알이 유리 한가운데 있는 원판을 때렸다. 브라이트가 거울에 닿은 순간, 원판이 아주 살짝 깨지는 게 보이더니, 더 이상 빛나지 않았다.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면서, 분노에 가득 차 머리 위로 권총을 들고 총알이 날아온 곳을 찾아댔다. 하지만 아무도 없었다.


슈메털링은 저격소총을 견착한 채로 차가운 복도를 걸어내려갔다. 총을 쏴 본 지 오래됐지만, 아직 실력이 녹슬지 않아 뿌듯했다. 슈메털링은 규칙적인 발걸음으로 얼어붙은 유리관 쪽으로 걸어가, 그네가 바꿀 생각도 안 했던 옛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이만츠가 털썩 하고 바닥에 떨어지자 슈메털링은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슈메털링은 몸을 숙여 이만츠의 뺨을 몇 차례 때렸다. "이만츠. 이만츠!"

"우우에어?"

슈메털링은 한숨을 쉬고는 자기보다 덩치가 큰 그 남자를 들어 부축했다. 그리고 총을 내려두고 자료 백업본을 집어 호주머니에 쑤셔넣었다. 콘드라키 박사가 있는 유리관을 지나자, 슈메털링은 잠깐 멈추고는 그 얼어붙은 광경을 쳐다봤다.

"가자고." 슈메털링이 말했다. "우리 탈출 사실을 숨기려면 당신네 모두가 필요해."

나비들이 비어버린 격리실에서 날개짓을 하면서 나오자 유리관이 희미하게 빛났다. 슈메털링과 그가 구조한 친구 주변을 나비들이 잠깐 맴돌더니 둘 다 사라져버렸다.


잭 브라이트는 이사관실에 앉아 광낸 손톱으로 책상을 두들겼다. 일이 분명히 지체될 터였다. SCP-093을 고칠 수 있는지는 제쳐두고, 설사 고칠 수 있다 해도 시간이 얼마나 들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게다가 콘드라키가 격리 중 사라진 것도 심히 신경이 쓰이는 일이었다.

브라이트는 일어나 건너편 벽까지 걸어가 손바닥이나 목소리 인식을 사용할 수 없는 사람으로서 계속 써 왔던 길고 복잡한 암호를 입력했다.

열린 문 너머에 섬세하게 만들어진 상자가 드러났다. 브라이트는 상자를 열었다. 안쪽으로 향한 화살표 세 개가 달린 동그라미 비슷한 물체를 보았다.

'잠깐 지체되는 것 뿐이야, 알토.' 잭이 생각했다. '잠깐 지체될 뿐.'


알토 클레프는 거세게 숨을 쉬며 공허한 밀밭에 주저앉아 있었다. 힉스 보손 입자가 몸 정중앙을 뚫고 지나간 후유증이 생생하게 느껴져 살아있을 시간이 별로 길지는 않아 있을 거란 건 알았다. 그 짧은 시간도 매우 고통스러울 거란 사실도. 아직 총이 있었다면 자신을 쐈겠지만 지금은 없으니…

클레프는 부적을 쳐다봤다. 그리고 머리를 뒤로 젖히고, 완벽하게 입 위에 부적을 두고선 목구멍으로 떨어트리며 삶의 끝자락에 영구히 반복되는 차가운 꿈보다는 망각이 훨 나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어딘가, 우리 세계의 거울 이쪽 어딘가에서 피를 철철 흘리는 암투성이 몸뚱아리가 죽고, 비명을 지르며 다시 깨어난다.


unfinished-business-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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