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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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딘지 모르는 외딴 곳에 있는 건물들. 그 중에서도 쓸데없이 크지 않은 회의실에 다섯 명의 사람들이 모여 앉아있었다. 그들은 모두 심각한, 아니,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들의 앞에 놓인 종이를 검토하고 있었다.

"좋습니다. 그 조건을 따르도록 하죠."

"나도 찬성일세."

"찬성입니다."

"이의 없음."

"저도 찬성입니다."

잠시 후 종이에 적힌 글들을 모두 확인한 사람들은 입을 모아 말하며 긍정을 표했다. 하나같이 모두 비슷한 양복을 입고 역시나 무표정한 얼굴로 끄덕였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쓸데없는 건 넘어가자고 보는데……."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할 건 확실히 해야겠죠."

"동의하네."

"하지만 지금 뭐… 이상하거나 문제 될 건 없잖습니까?"

"…그렇네요. 좋습니다. 그럼 모두 사인하도록 하죠."

그 말에 다섯 명 중 네 명은 펜을 꺼내고, 한 명은 도장을 꺼내 자신 앞에 놓여있는 종이에 도장을 찍었다.
계약서에 펜으로 사인을 한 남자가 자신으로부터 11시 방향에 있는 남자를 쳐다보며 말했다.

"당신들과 협력을 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는데 말이죠."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올시다, 높으신 나으리. 언제 서로 진짜 얼굴을 드러내고 말 한번 나누고 싶은데 말이지……."

"그건 불가능이라는 거 당신도 알 텐데요?"

"그래, 안다고 알아."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원과 그 원을 둘러싼 방패모양에 화살표 세 개가 모이는 모양의 마크가 새겨진 양복을 입고 있던 남자는 눈 앞 너머의 남자 ……의 아바타Avatar에게 대충 대꾸하며 속으로 기묘한 감정을 느꼈다. 철전지 원수이자 최악의 요주의 단체 중 그 대표인 사람. 이 자는 만났을 때 어떤 식으로 고통을 줄 지 고민해 왔는지 설명하라면 A4용지로 앞뒤 빽빽하게 10장 넘게 써 줄 수 있었지만, 만남이 이딴 식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우리들 모두 이딴 가짜 몸을 쓰고 있지만 언젠가 이런 형태가 아닌, 승리자와 패배자의 모습으로 서로를 마주하게 되겠지."

"그건 그 때 일입니다. 대시우드."

"그래, 그래, 지금은 뭐… 잘 부탁한다고. O5-1."

"……그래요, 잘 해봅시다."

둘은 서로 다르면서도 비슷한 떨떠름한 마음으로 악수를 나누었다.
그러면서 둘은 나머지 셋과도 악수를 나누었고,

이 순간, 역사상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없었고 앞으로도 절대 없을

SCP 재단과 '세계 오컬트 연합', 'UIU', '총참모부 정보총국 'P' 부서', '유한회사 마셜, 카터 & 다크', 그리고—




‘혼돈의 반란’과의 협력이 체결되었다.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 O5-1은 다시금 그 때를 떠올렸다. XK급 세계멸망 시나리오라고 판단된 '그 사태'를……


지옥과도 같았던 19기지 객체 단체 탈주 사건이 끝나고 잠시 옮겨졌던 SCP 객체들도 모두 원래 자리로 돌아간 후, 어느덧 10달이 지났다.

"19기지 복구 작업이 거의 끝나다던데."

"드디어? 잘됐네."

1등급 직원인 K████는 진심을 담아 대답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재단에서 가장 큰 기지인 19기지. 그곳에 가게 되었을 땐 조금 이상할지 몰라도 약간의 자부심을 느꼈었는데 자신이 오고 몇 달 되지도 않았을 때 각종 객체들이 임시적으로 19기지로 이동되었다는 말을 들으며 그것은 불안감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안가 그 중 106과 682가 격리 탈출을 시도하면서 일으킨 사고로 그 이후부터 K████는 자신의 감에 커다란 확신을 갖게 되었다.

"드디어 나도 19기지로 돌아갈 수 있는 건가?"

"글쎄다. 인사부에서는 아예 인원 싹 새로 뽑는다는 말까지 있던데? 기지관리자 빼고."

"맙소사 젠장."

그는 역시나 진심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투덜거렸다. 하지만 그는 희망을 가져보자는 생각을 하며, 이번에도 자신의 '감'이 맞길 바랬다.

"그 인원선출 결과 발표가 오늘이라던데. 한번 인사게시판 가봐."

"진작 말했어야지."

K████는 희망 가득한 마음으로 인사 관련 게시판을 찾아갔고, 그곳에 써진 내용을 보고 소리를 질렀다.

SCP 재단 인사게시판

  • 10기지
    • 변동 없음
  • 11기지
    • ██████ 17기지로 전출
  • 12기지

.
.
.

  • 19기지
    • █████ 14기지에서 전입
    • ████ 14기지에서 전입
    • K████ 복귀

.
.
.

"만세!"

K████는 다시 한 번 자신의 감에 대한 믿음이 증가 하는걸 느끼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한편 불안함이 느껴졌다.

'이렇게 좋은 일만 연속으로 일어나면 좀……. 아니야, 이런 생각 하지 말자.'

자신의 이 불안한 감이 또 한 번 맞는다면 자기 스스로를 변칙개체로 신고해야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불안한 마음을 지워버렸다.

그리고 며칠 후, K████는 아주 조금이라도 불안한 마음을 가졌던 걸 크게 후회했다.

[SCP-106이 탈주했습니다. 다시 한 번 공지합니다. SCP-106이 탈주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SCP-682가 탈주했습니다. 다시 한 번 공지합니다. SCP-106과 SCP-682가 탈주했습니다.]

"젠장할"

19기지에서 들려오는 안내방송에 K████는 마음이 심란해짐을 느끼며 몸 속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욕지거리를 참지 않고 내뱉었다. 19기지가 복구 되었다지만 있었던 사고들이 없어진 건 아니여서 아직까지 급한 일들이 많이 남아있었다. 오늘도 식사조차 제대로 먹지 못하고 복도에서 빵을 씹으며 자료를 검토 하던 중, 커다란 굉음이 들리더니 다급한 목소리로 들려오는 안내 방송은 그의 정신을 무너뜨리기 일보 직전까지 끌고 갔다.

"욕할 시간 있으면 얼른 대피를 하던, 대책을 구안해서 상부에 올리던, ……아니면 그 빵이라도 일단 마저 먹던 하지 그래?"

그 때 누군가 그의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가며 말했다. 고개를 돌려 바라보자 그의 눈에 들어온 건 익숙한 주황색의 점퍼 — D계급 이였다. 그는 감히 D계급 따위가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걸고 어깨를 치는 것에 순간 짜증이 일었으나 지금 이런 상황에 D계급이 경비도 뭣도 없이 홀로 복도를 지나치고 있는 것에 의문이 들었고, 그 D계급을 자세히 바라보자 또다시, 하지만 아까와는 다른 익숙한 물건이 보였다.
SCP-963, 별칭은 불멸. 유클리드 등급의 SCP. D계급은 그것을 목에 걸고 있었다.

"…브라이트 박사님?"

"그래. 빨리도 알아보는구만. 아, 이건 반어법 아니야."

황당함과 놀라움에 말을 잇지 못하고 있자 그 D계-브라이트 박사는 K████를 바라보며 다시 말했다.

"아까 말했듯이 얼른 도망을 가던지 하는 게 좋을 거야. 지금 상황은 여태껏 있었던 탈주 사건과는 격이 다르거든."

"격이 다르다는 말은……."

"궁금한 마음은 이해하지만 지금은 알려줄 시간이 없네. 만약 알려준다 해도 바로 기억 소거제를 처방해야 할 테고."

그 말에 K████는 얼굴이 싹 굳으며 잠시 당황하는 듯 하더니 브라이트 박사에게 인사를 꾸벅 하고 출구 쪽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평소 같았으면 이상한 곳을 출구로 알려줬을 테지만……."

브라이트는 이름 모를 연구원의 모습이 모퉁이에서 사라지는걸 보며 중얼거렸고, 평소의 그의 장난스러운 표정이 아닌 한 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가던 길을 다시 재촉했다.
걷고 걸으며 모퉁이를 다섯 개 쯤 꺾었을 때 그는 자신의 목적지인 방의 문 앞에 도착했다. 문 앞에 서있던 경비원들은 D계급의 주황색 점퍼를 보고 총을 겨누었지만 브라이트 박사가 흔들며 보여주는 SCP-963에 총을 거두고 문을 열어주었다.

"어, 왔냐."

문을 열자마자 그를 맞이하는 살 찐 친구를 바라보며 그는 물었다.

"쓸데 없는 말은 생략하고, 나머지는?"

콘드라키는 자신의 인사를 받아주지 않았다며 욕을 하면서 대답했다.

"젠장맞을 녀석. 글라스는 지금 오고 있고, 케인은 다른 기지로 잠깐 가있어서 그곳에 있을거야."

"그리고 클레프 박사는 현재 GOC 쪽에 가 있습니다."

콘드라키의 말을 잇는 탈모 말기 증세의 무뚝뚝한 박사의 말에 브라이트는 미간을 모으며 말했다.

"잠깐, 기어스, GOC? 지금 이 엿 같은 상황에……."

"지금 상황 때문에 간 겁니다. 브라이트 박사."

브라이트의 거친 말에도 기어스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대답했다.

"지금 상황은 저희끼리 대처가 힘들다고 판단했습니다."

"뭐? 누구 맘대로."

"평의회입니다."

"뭐?"

"O5 평의회의 결정입니다."

기어스의 말에 브라이트는 찌푸린 얼굴을 그대로 남긴 채 그 위에 황당함이라는 감정을 더했다.

"O5가 나섰다고?"

"그렇습니다."

"니미럴 미친."

브라이트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회의 테이블로 다가가 의자에 대충 몸을 던졌다.

"그래, 그건 그렇다고 해. O5 나으리들의 결정이야. 좋아. 근데."

브라이트는 얼굴 전체를 넘어서 온 몸으로 짜증과 답답함을 표출해내며 말했다.

"그 빌어먹을 놈새끼들 — 682와 106이 손을 잡았다는 말은 뭔 개소리야?"

"거기에 아벨도 포함."

콘드라키가 끼어들었다.

"씨발 그 미친새끼도?!"

[뿐만이 아닐세.]

브라이트의 질문인지 고함인지 모를 외침에 대답한건 기어스나 콘드라키가 아니었다. ppt를 위한 모니터에 불이 들어오며 그 위로 글자가 써있었다.

O5-7

SCP 재단 최고 권위자 13인 중 한 명이었다.
모니터 화면에 나타난 글자에 기어스는 아무 표정 없이 일어나 인사를 했고, 콘드라키와 브라이트는 놀란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조사한 바로는 그 세 개체가 손을 합치는데 뒤에서 도움을 준 자들이 있다는 게 파악되었네.]

브라이트는 뒤늦게 목으로 꾸벅 인사를 한 콘드라키를 힐끗 쳐다본 후 말했다.

"……급하니 인사는 생략합시다. 빌어먹을 요주의 단체들 중 하납니까?"

브라이트의 태도는 어찌 보면 — 아니, 그냥 대놓고 예의란 것은 버린 듯한 모습이었지만 O5는 아무런 제지를 하지 않았다.

[맞네.]

"누굽니까?"

이번엔 기어스였다. 이것까지 듣지는 못했는지 기어스 역시 모니터에 집중 하고 있었으며, 콘드라키와 브라이트는 '무슨 대답이 오나 보자'하는 모습으로 모니터를 바라봤다.

['원더테인먼트 박사', 'Nobody' 그리고,]

화면 속 O5는 물이라도 마시는지 잠시 말이 멈추었다.

[바다건너 동양에 있는 '엔트로피를 넘어서'일세.]

"? 처음 듣는군. 뭐, 그놈들이 뭐하는 놈들이건 상관없습니다. 그놈들이 손 잡은 걸로 XK급 세계 멸망 시나리오라고 판단하긴 좀 이른 거 아닙니까?"

콘드라키가 물었다. 브라이트 역시 그런 의문을 갖고 있었고, 기어스도 마찬가지였는지 화면에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모니터에 나타난 O5-7이란 글자는 '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걸로 끝이 아니라 문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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