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번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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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라는 속담이 있다. 절대적인 강자를 상대로 우리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불가능해보이는 일을 해내야 하는 상황, 그래서 전혀 희망이 없는 상황을 나타내는 말이라고 나는 멋대로 과격한 해석을 덧붙인다. 초등학교 때에나 배웠을 이런 속담을 이제와서 내가 떠올리는 이유는 지금 우리가 처한 이 상황이 그것보다 심하면 심했지 덜하진 않으리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기 때문이다.

이번 사건들의 진상과 대처법이 적힌 이메일을 받은 건 어제였다. 그래, 대충 짐작은 했지만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었구나. 젠장. 지나가는 엑스트라 A, 아니 J 정도? 그정도 적당한 배역을 적당히 수행하다 화면 한구석에 잡히면 잡히는 대로 안잡히면 안잡히는 대로 아무렇게나 살다가 잊혀질 수많은 인간 중 하나가 바로 나라고, 나는 그 이메일을 이해한다. 그래, 나 삐딱하다. 인생 삐딱선 탄 이후로 척추도 심성도 사고방식도 삐딱해진 지 오래다.

삐딱한 나는 이미 삐딱한 고개를 더 삐딱하게 기울인 채 삐딱하게 이메일을 다시 읽는다. (어감이 은근 재밌다.) 그래, 정말 웬 작가놈이 이 세계를 자기 스토리의 배경 무대로 써먹으려고 하고 있다면야 지금까지의 앞뒤도 안맞고 이유도 뭣도 없는 난장판도 이해할 만 하다. 대체 무슨 소설을 쓰길래 기승전결도 평판도 살포시 땅바닥에 내려놓은 것 같은 글을 쓰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뭐 K급 멸망 시나리오를 쓰고 있는 거라면 정말 훌륭한 작가일지도?

그런데, 이 계획을 다시 읽다보니 이거 글렀다. 맹점이 있다. 물론 조연도 되지 못하는 엑스트라라면 분명히 작가의 주목을 받지 않고 일을 해낼 수 있을 거다. 그런데 작가의 주목을 받지 못한다는 건 반대로 말하면 뭔 일을 해내도 작가가 모른다는 것 아닌가? 핵폭탄이니 뭐니 했지만, 내가 가서 핵폭탄을 못쓰게 만들어 놔도, 작가가 그걸 모르면 그 핵폭탄은 터지는 거다. 일단 내가 생각하기엔 그렇다. 그러면 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 작가가 눈치챌 정도가 되면 뭘 하기도 전에 작가의 통제 하에 들어간다. 작가 몰래 행동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뭘 어떻게 해도 일개 등장인물들이 아무리 용써봤자 작가는 못이기는 거다. 그렇다고 명색이 재단 연구원인데 이 인류의 위기를 ―그 인류가 진짜 인류인지 시나리오를 위해 잠깐 생겨난 허상인지는 이제 확신하지 못하겠지만― 못 본 체 하고 넘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아오, 모를 때보다 대충 알 때가 더 골치 아프다.

그래서… 원래라면 정말 최후의 최후까지 미뤄야 할 미친 짓을, 미루고 난 뒤에도 실행하면 천벌을 피할 수 없을 정말로 미친 짓을, 나는 계획한다. 작가가 미처 생각도 하기 전에 작가의 뇌리에 팍 들어가서 해야 할 일을 팍 해낸 다음에 사라져버리는 거다. 문제는 세계멸망을 막기 위해 해야 할 사전작업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아까 대충 느꼈겠지만 이 작전에서 실행 인원은 일회용이다. 재단 전체에 메일을 보냈던 그… 생각해보니 이름도 모르네. 여튼 그 연구원이 그랬듯이 하나를 해낸 뒤에는 바로 죽어야 한다. 죽어야 한다. 운이 없으면 해낸 일을 취소시키는 걸 막기 위해 주변 사람도 싹 다 죽어야 할 수도 있다. 그런 방법으로 적어도 수천만 가지의 사전 작업을 늦기 전에 완수해야 한다. 수천만명 이상이 겨우 하나하나의 작업을 위해 목숨을 내던져야 한다. 체르노빌의 방사능 물웅덩이에 뛰어들듯이 뛰어들어야 한다. 고양이 목에 정말로 방울을 걸기로 결의한 쥐떼가 차례로 고양이의 앞발에 몸을 던지듯이 목숨을 던져야 한다. 수천만명이.

어차피 작가양반을 멈추지 못하면 결말은 잘 해봐야 인류 멸망이다. 이 피할 수 없는 투쟁에 얼마나 큰 희생이 따르더라도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렇게 자신을 다독인다. 아무리 삐딱한 나라고 해도 수천만명이 죽어야 하는 일을 계획하고 시작하는 건 미칠 듯이 괴로운 일이다.

이메일 창을 닫고 자리에서 일어선다. 마침 운이 좋게도 이 삐딱한 나는 슈퍼컴퓨터 사용 권한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정말 운이 좋게도 이 삐딱한 나는 착해빠진 똑똑이 친구들이 주변에 널린 사람이다. 재단의 연구원이다. 빌어먹을, 내가 해야 한다면 해 주마. 고양이 목에 달려드는 멍청한 쥐떼의 선두에 서야 한다면 서 주마. 예수님마냥 거룩한 희생이니 뭐니 하면서 기려주지 않아도 상관 없다. 그런 멍청이가 되고 싶어서 재단에 온 거니까.

오후가 되면 목록이 완성될 거다. 그 하나하나를 누가 수행할지, 수행해 줄지, 수행하고 죽어 줄지, 난 모른다.

하지만 일단 난 할 거다.

두 번째 쥐로서 내가 할 일은 끝났다.

다들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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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울을 들고 고양이에게 달려든 쥐들의 목록:

작가의 존재와 엑스트라의 역할을 알리는 이메일을 처음으로 퍼트린 신원미상씨

계획을 고치고 목록 작성을 시작한 삐딱이씨와 목록을 완성한 똑똑이씨

전세계의 핵탄두 4만개를 고철더미로 만든 미국과 러시아와 기타 핵보유국의 군인씨

SCP-173을 SCP-914에 갈아넣다가 둘 다 멈추도록 만든 교차실험씨

놀랍게도 작가의 관심에서 벗어나있다가, 기어코 SCP-682 수송차량을 운전해낸 제랄드씨

격리를 벗어난 SCP들을 총력을 다해 회수해준 GOC와 반란의 공작원씨

작가가 주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주연 인물들을 차례로 행동 불능에 몰아넣은 저격수씨

이런 연쇄 자살을 전염성 정신병이라고 주장해 작가를 혼란시킨 의사씨

기타, 재단 소속이든 아니든, 미쳐 날뛰는 작가로부터 인류를 지키기 위해 분투해 준 무명씨

총 7천 5백 8십 8만 하고도 스물 한 명.

임무 중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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