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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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아암…"

가베라는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켰다. 쌓여있던 서류도 이제 막바지에 이르렀다.

"나 참… 이짓하다가 한타가 800타나 됐네."

다시 노트북을 잡고 서류의 내용을 그대로 SCiPNET에 옮긴다. 연구부 "전산기록 관리자"이라는 직책을 가진 자신의 업무다.

"…박사님."

"왜?"

"우리 재단에서 일하는 거 맞죠?"

"어."

"근데 지금 우리… 뭐하고 있는 걸까요?"

이곳에 오기 전, 가베라는 기특대에 소속되어 있었다. 그땐 무언가 사명감이라는 게 있었다. 업무야 여기보다 더한 격무이긴 했지만, 매일 같이 해킹을 방어하고, 적대적 단체의 방화벽을 뚫으면서, 무언가 내가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는 감정이 전신을 휘감고 있었다. 그게 어떤 에너지드링크보다도 힘이 나게하는 원동력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저 앉아서 서류나 컴퓨터에 베끼는 게 다다. 이게 일반직장하고 다를 게 뭐가 있지? 내가 여기에 왜 들어왔더라?

그런 생각이 가베라의 머릿속에서 자라나기 시작했다.

"자. 여기 홍차."

"아, 감사합니다."

가베라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푸념을 듣고 있던 아네모네는 가베라에게 홍차를 건넸다.

"지금 때려칠 생각하고 있지? '내가 지금 무슨 일을 하고있는 건가, 이러려고 여기 들어온 게 아닌데…'"

가베라는 말없이 홍차를 홀짝였다.

"나도 한때 그랬거든. 근데 그거, 진짜 별거 아니다? 그냥 일하다 보면 홀연히 나타났다 홀연히 사라져. 비단 재단 뿐만 아니라 어디에 있든 누구나 한 번씩 그런 생각을 하지만,좀있으면 그냥 잊어버리니까. 그니까 신경쓰지마. 너무 거기에 빠져버리면 진짜로 생각에 잡아먹히니까."

"괜히 《모모》에서 이발사 푸치가 회색신사에게 낚인게 아냐."

채림도 일어서면서 한마디 거들었다.

"그리고 여기 객관적으로 보면 오히려 꿀보직이야. 심심하면 날뛰는 도마뱀도 없고, 일하는 공간은 핵터져도 안전한 패닉 룸이고. 비명도 못지르고 뒤지는 것보단 낫잖아. 항상 원래 남의 떡이 커보이는 거야."

"도마뱀 한 마리 있지 않아요?"

"그건 전산오류고. 뭐, 어쨌든 그것만 하고 너도 퇴근해. 어차피 통과한 것도 보안부에서 검열하려면 며칠 걸리니까. 난 콜 오브 듀티나 하러 갈란다."

그렇게 말하고 채림은 연구기록부를 나갔다.

아네모네도 홍차를 다시 한모금 마시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지난 혼반 습격때 이등공신이 그런 생각하면 섭하지. 충분히 '중요한 일'하고 있잖아?"

'그러고 보니 그랬네요.' 하며 가베라는 다시 홍차를 홀짝였다. 기록 전산화 담당외에도 일단 전산보안주무관 역할도 맡고 있기는 했다. 기지 설립 이후로 별다른 일 없이 지내서 별로 티가 안났지만(아니, 침입이 많아도 원래 보안은 일을 잘하면 티가 안나지만.), 그땐 오랜만에 실력발휘해서 다운 된 기지 시스템을 복원했었다

"근데 왜 2등이에요? 1등은 누구길래요?"

"즈소."

"아."

이건 진짜 반박 못 한다. 총알이 날아다니는 상황을 '우—냐!'로 정리하는 건 그 녀석 밖에 못하겠지. '태양신님 가라사대 불타라 카오스'라니, 뭐야 그게.

풋, 하고 웃음이 나왔다.

"뭐, 네가 이렇게 지내는 건 분위기 메이커에게도 실례니까. 기운 내라구. 봐봐, 이야기 하니까 그런 잡생각은 금방 날아갔잖아."

나 참, 정말 언제 그런 생각을 했냐는 듯 뭔가 찝찝한 감정이 싹 날아갔다. 이게 연구부 스타일인가. 기분전환 한 김에 다시 기지개를 켠 뒤, 가베라는 다시 얼마 남지 않은 업무에 몰두했다.

"뭐, 분위기도 이렇게 된 김에 내 옛날 이야기나 할까? 야, 가베라. 실험실 생활하면 가장 느는 게 뭔지 알아?"

"뭔데요, 박사님?"

아네모네는 홍차를 한 모금 마신 뒤 하던 말을 이어했다.

"설거지."

"엑, 진짜요?"

"진짜야. 적어도 화학이랑 생물 계열이라면 다들 설거지엔 도가 텄을 껄. 생활의 달인에 나갈 자신도 있어."

"…실험실하고 설거지가 무슨 상관이에요?"

"왜, 우리가 하는 게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가운입고 약품섞는 딱 그런 실험이잖아? 자, 실험기구써서 이것저것 약품을 섞고 반응을 해서 원하는 결과를 얻고 보고서에 기록도 했어. 그럼 이제 해야 할 일은?"

"…아, 뒷정리네요."

"정답. 거기서 워싱이 제대로 안되면 다음 날 실험할 때 기구에 남은 이물질 때문에 결과가 제대로 안나와. 그럼 실험기구 처음부터 다 다시 씻은 다음에 실험과정을 통째로 처음부터 다시해야지. 그니까 요령피우다간 대가 톡톡히 치르는거지. 그리고 그런 일이 주말 빼고 매일."

"히익…"

"거기에 쓰는 약품이 약품이니까 단순 음식물 찌꺼기나 기름때보다 워싱 난이도가 훨씬 높지. 쓰는 약품이 약품이니까. 우리 실험실은 유기물 실험 주로 했으니까 실험기구 하나를 아세톤-에탄올-물로 세번씩 씻었지. 아, 참고로 하루에 쓰는 실험기구 양은 저기 책장만한 장식장 대여섯개에 꽉 차있는 정도. 물기도 남아있으면 안되니까 건조기에 넣어야 하는 데, 기구의 양이 양이다 보니까 건조기 크기가 안에 사람이 들어갈 정도였던가?"

"연구하러 들어가는 거에요, 아님 설거지하러 들어가는 거에요?"

"뭐, 그래도 이짓 하는 건 얼마 안 된 신입이 하니까. 신입 졸업하면 안해도 되는거지."

아네모네는 다시 홍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다 마셨는지 커피포트로 가서 홍차를 다시 잔에 따르고 다시 의자에 앉았다. 가베라는 '하하하…' 하며 웃긴 했지만 진심으로 웃는게 아니라 내 일이 아니라서 웃을 수 있는 이야기를 들은 듯한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 실험실에서 이거 관련해서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는 데, 들을래?"

"재미있는 거요?"

가베라도 이야기가 슬슬 길어지려는 조짐을 보이자, 마침 업무도 거의 다 끝났겠다, 노트북을 덮고 이야기에 집중하려 고개를 돌렸다.

"우리 방… 아, 그러니까 각 실험실 한 개를 방이라고 불렀어. 각 방 별로 방 장이 있고. 어쨌든, 우리 방에서 신입이 들어오면 한 3달간은 청소만 시켜. 그리고 그 다음부터는 설거지를 시키거든? 그 신입이 설거지를 끝내고 말려놓은 날에 그 방의 방장이 다른 방 방장이랑 같이 우르르 몰려가는거야."

"네, 그래서요?"

"그리고는 걔가 워싱한 것 중에 무작위로 방장 인원수 만큼 뽑은 다음에 거기다 커피를 타 마시지."

"아아… 네에? 잠시만요, 거기 실험실이잖아요!"

"응. 거기에 우리 실험실에서는 엄청 위험한 거 많이 쓰지. 음… 제일 센건 티스푼으로 한 스푼을 서울 상수원에 풀어놓으면 서울시 인구 절반을 날려버릴 정도? 그래서 그 신입은 옆에서 커피 마시는 거 지켜보면서 덜덜덜덜 하고 떠는거지. 여자애들은 아예 울더라."

"제정신으로 하는 겁니까 그런 건…"

"뭐, 근데 실험실 군기가 원래 그렇게 빡세긴 해야해. 까딱하다가 팔다리 날아가거나 죽는 건 재단이랑 변함 없으니까."

"혹시 그러다 죽은 사람은 있어요?"

"아니."

가베라는 그대로 어이없는 표정으로 웃으며 다시 노트북을 열고 남은 업무에 몰두했다. 아네모네도 다시 고개를 돌리고 홍차를 마셨다.

"원래 실험실은 다 그렇나요?"

"처음에 말했잖아. 최소한 화학하고 생물 계열은 다 이렇다고. 똑같진 않아도 설거지 빡세게 하는 건 다 비슷해. 아, 마침 저기 화공과 오네. 야 즈소."

"네, 박사님?"

"너넨 실험실 워싱 어땠어?"

"저흰 일회용품 썼는데요?"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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