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서 떨어지는 물벼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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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번에 또 이사관이랑 싸운거야?”

“그렇지, 뭐.”

제27기지의 실험실 복도, 이곳에서 이사관 다음으로 가장 높은 연구부의 두 고참 박사가 잡담을 하면서 걷고 있었다.

“그 자식은 진짜 무슨 기업 경영하는 마인드로 연구 기지를 관리하는 지, 연구 프로젝트가 고작 2, 3년 지지부진 하다고 짜를 생각을 한다니까? 난 순간 그 자식이 우리나라 사람인 줄 알았어. 진짜 한국 높으신 분들이랑 생각하는 게 어쩜 그렇게 똑같냐.”

“똑같네. 나도 여기 들어오기 전에 그런 사람 잔뜩 봤으니까. 여기 들어와서도 없진 않았지만.”

“그러게 말이다. 어디서 굴러온 놈… 아니 년인지 진짜.”

“아, 그러고 보니 전에 그랬지. 발 넓기로 유명한 너도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며?”

“그래, 내가 여기 오기 전에 미국 본부에 있을 때, 다차연연구소 수석 연구원이었거든. 근데 공간 변칙 현상이란게 꼭 어디서 생긴다고 정해진 게 아니잖아. 미국 전역은 물론이고 유럽, 남미의 기지 관리관 급 인사는 다 한 번씩은 대면하거나, 아니면 적어도 서류상으로라도 봤어. 근데 저런 사람은 본 적도 없거든.”

“아시아 쪽이었다면 지금 인트라넷에 27기지 이사관의 대한 뜬소문이 돌아다닐 리가 없겠지.”

“거기다 더 수상한 건, 재단 내에서 그 여자에 대한 기록을 찾을 수가 없다는 거야.”

“왜, 김가루나 말소 떡칠되어 있어?”

“아니, 그거라도 있으면 의심을 안 하지. 저 녀석 이름으로 검색을 해봐도 검색 결과가 0건이다. 인사파일, 논문, 각종 실험기록, 면담, 신청서, 전부다.”

“뭐야, 그건. 무슨 유령이라도 되는 거야?”

“그러게 말이야. 그래도 내 직책이 직책인 만큼 평의회 직통 연락처 정도는 갖고 있어서 문의를 해봤는데, ‘걔가 누구냐고? 알 필요 없다.’라는 답이 돌아왔지 뭐야. 정상적인 절차를 통해서 임명된 이사관 맞으니 더 이상은 알려 하지 말라나 뭐라나.”

“그거 더 수상한 걸.”

“뭔가 엄청난 일이 얽혀있는 거지. 평의회가 직접 나서서 변명할 정도로. 근데 더 파봤다간 피보니까 그냥 관심 끄련다. 나한테는 수수께끼의 이사관이 아니라 내 소중한 연구부 프로젝트들 끊으려는 새끼일 뿐이고.”

채림은 피곤하다는 듯 기지개를 켰다. 아네모네와 만나서 이렇게 수다를 떨기 직전에 한 시간 가까이 이사관과 프로젝트 이야기로 입씨름을 하고난 뒤였기 때문이었다.

“아 참, 이거 나만 아는 이야기다. 개인적으로 평의회에 문의할 수 있는 게 이 기지에서 나하고 샐리 둘 빼곤 없으니까.”

“인트라넷에 풀 썰이 하나 더 늘었네.”

그때였다. 채림의 눈에 실험실 복도 천장에서부터 길에 늘어진 쇠줄이 눈에 띄었다. 한 두 개도 아니고, 실험실 입구마다 하나씩 달려있었다.

“근데 이건 또 뭐냐?”

“아, 그건…”

아네모네가 뭐라고 하려 했지만, 버튼이 있으면 눌러보고 싶고 줄이 있으면 당겨보고 싶은 게 사람 심리. 말이 채 나오기도 저에 채림은 그 쇠줄을 당겨버렸다. 그리고 그 직후,

쏴아아아아아아!

천장에서부터 세찬 물줄기가 쏟아졌다. 채림은 곧장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자리를 피했지만, 물줄기는 엄청나게 세서 그 잠깐 동안 물줄기를 맞았음에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 몸이 흠뻑 젖어버렸다.

“야, 이거 뭐냐.”

“샤워기.”

“그건 알겠고, 그게 왜 여기 있냐니깐?”

“여기가 어디인지 몰라?”

그 말을 듣고 채림은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고, 주변에 있는 실험실이 죄다 화학, 생물 실험실임을 확인하자 그제서야 생각이 미쳤다.

“아…”

“그나마 바로 빠져나와서 다행이네. 그거 누적식이라 한 번 잡아당길 때마다 시간이 증가해. 실험실 안 들어가본 사람은 실수로 잡아당긴 다음에 그거 끄려고 계속 잡아당기다 전신욕을 하게 되지. 그러고 보니 내 모교에서도 어떤 국회의원이 그런 꼴 당했었나?”

“네, 네. 천체물리학과라 유기화학 실험실 들어가 본적 없어서 죄송합니다.”

둘이서 이야기 하는 와중에도 물줄기는 여전히 세차게 소리를 내면서 떨어졌고, 30초 정도 지나자 물줄기가 잦아들었다. 그 뒤에는 홀딱 젖은 채림과, 한강이 된 실험실 바닥만이 남았다.

“그거 청소하기 힘든데, 네가 저지른 거니까 네가 청소해라? 괜히 밑에 애들 시키지 말고.”

“알았어, 알았어. 일단 옷부터 좀 갈아입고. 혹시 수건 있냐.”

“잠시만 기다려.”

아네모네는 곧장 달려가서는 얼마 뒤에 수건을 가져왔고, 채림은 수건을 온몸에 두른 뒤 곧장 화장실로 들어갔고, 아네모네는 채림의 방에서 여벌 옷을 꺼내왔다. 그리고는 화장실에 있던 대걸레로 실험실 바닥의 물기를 닦았다. 몇 분이 지나자 실험실 복도에서 있었던 해프닝의 흔적은 완전히 사라졌다. 그리고 채림은 사무실로 돌아가면서 복도에 달린 쇠줄에 눈길을 주었다.

며칠 뒤, 온몸이 흥건히 젖은 이사관 샐리 메이블의 사진이 인트라넷에 돌아다니게 되지만, 이건 관계 없는 이야기다.

“그러고 보니 저 줄 하니까 옛날 실험실 생각나네.”

“또? 넌 레퍼토리가 도대체 몇 개나 되는거냐.”

“엄청 많지. 셋 밖에 없는 연구부에 신입이 들어와도 이야기 거리는 여전히 있을껄? 실험실 다니면 원래 기억에 남는 일들 많을 텐데, 아니, 꼭 실험실 안 다니더라도 대학교 대학원 때 에피소드 몇 개 정돈 있지 않아? 넌 없어?”

“싸운 기억이랑 퀘이크한 기억 밖에 안 나는 데.”

“그 성격부터 고쳐. 아무튼, 내가 실험실 방장이었을 때, 남자랑 여자 후배가 하나 있었어. 걔네들이 밤늦게 각자 실험을 하고 있었는데, 남자애가 수산화나트륨 용액이 필요한 실험이었나봐. 근데 그게 리터 단위로 필요했는데, 그걸 유리막대로 세월아 네월아 젓다간 막차 놓치지. 그래서 걔가 꼼수를 써서 미리 물과 수산화나트륨을 정량만큼 넣은 다음에 비커 입구에 랩을 씌우고는 좌우로 셰킷 셰킷 했거든?”

“그리고 물과 수산화나트륨이 반응하면서 열이 발생했겠네.”

“정답, 그래서 흔들다가 뜨거워서 비커를 놓쳤는데, 랩이 떨어지면서 옆에 있던 여자애 얼굴에 수산화나트륨 용액이 쏟아졌지.”

“미친.”

“그때 이 쇠줄이 참 자기 일을 잘 했지. 남자애가 곧장 여자애를 붙잡고 쇠줄까지 데려가서는 줄을 열나게 잡아당기고 119를 불렀어. 그리고 그 여자애는 구급차타고 병원에 실려갔는데, 응급처치를 잘 한 덕인지 다행히도 얼굴에 흉터하나 안 남고 다 나아서 퇴원했어. 운이 좋았지, 재단이 아니더라도 이런 실험실에선 사고 나서 병신되거나 죽는 경우가 드물지 않으니까.”

“그건 참 다행이네.”

“그리고 뒷이야기가 하나 더 있어.”

“응? 뭔 데.”

“그 이후에 그 둘이 눈이 맞아서 커플이 되었다 결국 결혼에 골인했다는 거.”

“걔내 둘 지금 어디 사냐.”

“왜 이래? 어차피 너나나나 결혼 포기했잖아. 둘 다 이제 40줄인 노처녀라고.”

“시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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