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1)

검은 머리의 남자는 룸미러를 기울여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길을 헤메서 그런지 상당히 피곤해보였다. 옷깃은 흐트러졌고 머리카락도 푸석푸석했지만 귀찮아진 그는 첫인상에 대한 조언들을 단념하기로 했다. 외관에 별다른 이상이 없는 것을 확인한 뒤 그는 정면을 향해 다시 고개를 돌렸다. 작은 교외 지역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꽤 큰 건물이 보였다. 목가적인 풍경 사이에 이질적으로 세워진 탓인지, 콘크리트 덩어리는 그저 뻔뻔스럽게 느껴졌다.

일할 시간이군. 레버 베일리는 재단의 비공식 소규모 기지에 대한 설명을 재차 떠올렸다. 그는 새로이 발견된 SCP로 의심되는 물체를 조사하기 위해 보다 큰 정식 기지에서 파견된 요원이었다. 손가락으로 운전대를 몇 번 톡톡 두드리던 그는 다시 거울을 바라보고 자신을 향해 조롱 섞인 비웃음을 보냈다. 보는 사람은 믿을 수 없겠지만, 그것은 응원의 의미로써 일에 착수하기 전에 습관처럼 으레 하는 행동이었다. 이 쌍방향적인 조소는 '제대로 처리할 수 있겠어?─누굴 의심하려고.' 따위의 식으로 작용했다.

레버는 자동차에서 내려 건물 입구로 다가갔다. 무표정한 얼굴을 훈련받은 경비원에게 간단한 신원 확인 과정을 거친 후, 그는 곧장 기지의 로비에 발을 들였다. 기지는 마치 병원 같은 구조였는데 벽이 온통 흰색으로 칠해져있어 그런 느낌을 더했다. 원래 실제로 병원이었을 것이다. 개조되기 전에는 아마도 접수대가 있었을 공간에서 그를 맞는 소리가 들렸다.

“레버 베일리 씨입니까?”

훤칠한 키에 푸근한 얼굴의 갈색 머리 남자가 테이블 앞에서 일어났다. 그는 약간 과장된 몸짓을 보이며 레버에게 다가왔다. 익살스러운 모습을 보건데 여자에게 인기가 많을 것 같았다. 깔끔한 양복 차림으로 회사 중역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남자를 보며 레버는 옷깃을 다듬지 않은 것을 약간 후회했다. 레버처럼 삼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는 악수를 나누며 쾌활한 목소리로 자신을 소개했다.

“내 이름은 클레멘스 테일러야. 비슷한 연배 같은데 말은 빨리 놓자고. 옷차림을 보아하니 꾸밀 필요도 없다고 생각할 정도로 자신감이 넘치는군. 안 그래?”

레버는 스스럼없는 클레멘스에게 호감이 갔다. 그는 나름대로 노력하여 얼굴을 밝게 만들었다.

“와우. 자네 같은 친구가 있을 줄 알았으면 그냥 편하게 스웨터 차림으로 올걸 그랬어.”

“글쎄, 그랬다면 경비가 길을 터주는 대신 유치장으로 데려갔을걸.”

레버의 트위드 재킷을 두고 가벼운 인사를 나눈 뒤 클레멘스는 그를 테이블로 안내했다. 마주 앉은 상태로 기지에 대한 몇 가지 질문과 답변이 이어졌고, 두 사람은 편하게 본론으로 들어갔다.

“좋아, 간단히 말하자면, SCP 후보가 지금 다섯 개 있어. 그것들 중에 딱 하나 귀신이 들린 게 있고, 정확히 그걸 골라내서 격리 방법을 고안해내는 게 우리 임무야.”

“후보라고?”

“상황을 설명하지. 여기까지 오는 동안 저 뒤쪽에 보이는 언덕 위로 거대한 저택이 서있는 건 자네도 봤을 거야. 거기가 리치먼드 허드슨의 소유고, 따라서 리치먼드가 대부호인 건 당연한 사실이겠지.”

“그래, 이름부터 돈 냄새가 풍기는군.”

“나흘 전에 그가 뜬금없이 저택에서 조촐한 파티를 열었어. 이유는 모르겠지만 듣기로 부자들은 변덕이 심하다고 하더군. 어쨌든 집에 사는 허드슨 부부와 하녀 한 명, 그리고 그 외 다섯 명이 파티에 초대받았는데, 이 여덟 명 중에 다섯 명이 파티 도중에 사망하는 일이 벌어졌지. 모두 질식사였는데 하나 같이 얼굴이 가관이더라고. 자, 봐. 그들의 사진이야.”

클레멘스는 옆 의자에 놓아두었던 봉투를 테이블에 올려놓고 내용물을 끄집어냈다. 그 중 그가 골라낸 다섯 장의 사진이 레버의 자리 앞으로 들이밀어졌는데, 그들은 그야말로 끔찍한 무언가를 만나 몸부림치는 중이었다. 레버는 미약하게나마 머리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눈을 부릅뜬 사진도 있고 꼭 감아버린 것도 있었지만 레버는 그들의 얼굴에서 공통적으로 압도적인 두려움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사인이 정말로 질식사라면, 공포에 숨이 막혀 죽었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레버는 고개를 들고 클레멘스를 빤히 보았다.

“쇼크사처럼 보이는데.”

클레멘스가 두 손을 위로 휘저으며 자잘한 것에 신경 쓸 것 없다는 말투로 말했다.

“그래, 그럼 아무래도 두 개가 동시에 온 모양이지. 모두 천 조각을 자기 손으로 목에 감아서 조르고 있었어. 자기 옷을 찢은 것이라더군. 그런 식으로 자살하는 게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검시관은 너무 놀라서 목을 조른 상태로 몸이 굳었다는 웃기는 소리를 하더라고. 물론 나머지 생존자 세 명을 조사했지. 그런데 증언 내용이 영 심상찮단 말씀이야.”

클레멘스는 말을 끊고 그에게 의기양양하게 웃어보였다. 아무래도 자신을 쓸만한 사건을 건져준 중매사 따위로 여기는 듯 했다. 태도로 보건데 그가 일을 그다지 열심히 도와줄 생각이 없다는 걸 느낀 레버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외지 파견 근무는 언제나 이런 식이군. 클레멘스가 사진들을 봉투에 도로 집어넣기 시작했는데 희생자들의 표정이 너무나도 절망적이었기 때문에 레버에게는 그들이 봉투에게 잡아먹히는 것처럼 보였다. 클레멘스는 기억을 떠올리려는 듯 눈을 가늘게 뜨며 다시 입을 열었다.

“무엇보다도 일단 리치먼드가 그 사건 이후로 정신이 나갔어. 아주 단단히 미쳤지. 사건에 대한 얘기를 시켜도 도저히 말이 통하질 않아. 항상 화이트 양이 어쩌니 저쩌니하는 소름끼치는 주제로 돌아가더군. 그거 알아? 나머지 두 사람도 ‘화이트 양’에 대한 증언을 했었어. 그런데 경찰은 그 여자의 흔적이라곤 쥐뿔도 발견하지 못했다는 거야. 지문, 머리카락, 신발 자국, 아무 것도. 아무래도 그 여자가 이번 사건의 주인공인 것 같아.”

“그러니까, 유령이다?”

“맞아. 리치먼드는 파티 와중에도 상태가 안 좋았던 것 같아. 그는 파티 내내 화이트라는 여자에 대해 지껄였어. 대화를 나누는 모습까지 보였다고 하지. 문제는 아까 말했듯이 그의 하녀와 다른 생존자도 여자의 모습을 봤다는 거야. 리치먼드에게만 작용하는 게 아닌 모양이야. 아마 다른 사람들도 자기 목을 조르면서 봤겠지.”

“사람들을 한꺼번에 홀리고 자살로 몰아가는 유령이라. 깔끔한 이야기는 아니군. 그런데 그게 SCP 후보가 다섯 개씩이나 되는 것과는 무슨 상관이지?”

클레멘스는 관자놀이에 손가락을 갖다 댔다. 그는 한숨을 쉬고는 다시 봉투를 열고 다른 사진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다섯 장이었다.

“리치먼드의 증언을 참고해서 뽑아낸 것들이지. 여기.”

그는 사진을 한 장 한 장 꺼내 테이블 위에 던졌다. 레이스 손수건, 《모비 딕》 한 권, 웨딩드레스, 작은 트로피만한 대리석 조각상, 그리고 트럼프 카드 한 벌의 사진이 나란히 놓여졌다. 클레멘스는 레버를 쳐다보며 말했다.

“공통점이 뭔지 알겠나?”

레버는 인상을 쓰고 사진들을 잠시 노려보았다. 그리고 얼빠진 목소리로 되물었다.

“화이트?”

“그래. 죄다 ‘하얀’ 것들이지. 리치먼드는 하얀색 물건에 아주 기겁을 하고 있어. 담배를 주려고 했더니 펄쩍 뛰더군. 횡설수설하는 와중에도 특히 이 다섯 개의 물건을 자주 언급했는데, 덕분에 정해진 후보들이야. 사실 이 중에 있을 지도 확실하진 않은 거지.”

그는 눈썹을 두어 번 들어올렸다.

“좀 더 정직해지자면 그 유령이라는 게 물건에 빙의된 건지도 확실하지 않고. 그래도 일단 전부 회수해서 이 기지 안에 보관해두고 있긴 해. 현장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희생자 옆에서 하나씩 발견되기도 했으니까 유력한 용의자지. 나중에 보여줄게. 음, 고백하자면 조금 있다가 격리가 제대로 됐는지 어쩐지 가봐야 하거든. '자네맞이' 바로 다음 일정 말이야. 멀리서 슬쩍 볼거야.”

“회수 팀은?”

“걔들은 멀쩡해. 하지만 아직 모르는 거니까. 그래도 내가 볼 때 넌 무조건 같이 가야 돼. 홀려서 죽더라도 외롭지 않게 다 같이 가자고.”

“젠장. 어차피 해야 할 일이긴 하니까. 내가 따로 더 조사해보지. 자네는 어떡할 텐가?”

맞은편에 앉은 잘난 사내는 매력적인 미소를 흘리며 뻔뻔스럽게 대꾸했다.

“글쎄, 공을 세우는 데는 관심이 없어서. 자네가 열심히 일하는 동안 나는 밖에서 춤이나 추려고.”

“괜히 지원을 요청한 게 아니군.”

예상이 들어맞은 것에 대해 쓴웃음을 지으며 레버가 대꾸했다.

“미안, 미안하네. 그래도 자네는 어차피 일할 운명 아닌가? 굳이 여기 오지 않았더라도 말이야. 도움이 필요하면 말해, 그 정도야 언제든지 해줄 테니.”

“방해하지 않도록 최대한 혼자서 해결해보도록 하지.”

클레멘스가 킬킬거리며 박수를 쳤다.

“역시 마음에 드는 친구라니까. 자, 따라 와. 서두를 것 없지. 기지 친구들을 소개해주겠네. 이 병원의 접수원부터 만나볼까. 섀넌?”


레버는 리치먼드가 수감된 구치소에 도착했다. 그는 사건의 주요 참고인 신분이었지만, 아무래도 경찰은 정신병자가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른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자신도 정체를 모르는 신분증을 들이대고 자동차로 오는 동안 외워둔 특별 수사관 이야기를 주절거린 뒤에, 그는 환자의 상태에 대해 간수와 엄숙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경찰관의 동행 없이 면담할 권리를 따냈다. 리치먼드는 복도 끝에 있었다. 죄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의 방은 여분의 직원용 사무실로 배정되어 있었다.

“허드슨 씨, 면담입니다.”

사려 깊어 보이는 간수가 문을 두드리며 말하고는 레버를 들여보내주었다. 방 한가운데까지 걸어가 조심스럽게 간수를 불러서 방음 상태를 확인한 레버는 천천히 앞에 마련된 의자에 앉았다. 방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놓인 탁자 뒤로 역시 의자에 앉아있는 리치먼드 허드슨과 매트리스 침대, 뒤가 막힌 창문이 보였다. 짐작하건데 리치먼드는 한참 전부터 그 자세 그대로였던 것 같았다.

그는 짙은 콧수염이 인상적인 중년의 사내로, 얼굴에는 주름살이 서서히 드러나고 있었지만 머리카락은 아직 새까맸다. 클레멘스만큼이나 키가 컸는데 무척이나 수척한 상태였다. 전체적으로 시들한 병자의 기색이 완연했지만 눈빛은 과도한 생명력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만큼 이글거렸다. 마치 그의 불안정한 정신을 대변하는 듯 했다. 미치지 않았다면 아마도 영리해 보인다고 했을 터였다. 그 눈동자는 레버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는데, 유감스럽게도 시선에 경계의 빛이 서려있었음은 말할 필요가 없었다.

“허드슨 씨, 반갑습니다. 레버 베일리라고 합니다.”

리치먼드 허드슨은 탐색하듯 레버를 아래위로 뜯어보았다. 꾹 다문 입술을 보고 쓸 만한 정보를 얻어내리라는 기대는 벌써부터 접었지만 레버는 허드슨을 ‘횡설수설’의 단계까지만이라도 끌어내보려고 노력해 보기로 했다.

“이번 사건의 조사를 맡게 되어 특별 수사관 신분으로 찾아뵙게 됐습니다. 힘드신 줄은 알겠지만 부디 협조 부탁드렸으면 합니다.”

리치먼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레버는 클레멘스에게 받아온 경찰 조사 기록 봉투를 꺼냈다. 희생자 중에 그의 아내가 있다고 했지. 그 부분을 건드려볼까? 하지만 오히려 역으로 더 방어적인 태도를 취할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기본적인 내용부터 시작할까요? 이름이 리치먼드 허드슨, 맞습니까?”

그는 눈을 한번 끔뻑일 뿐이었다. 거기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레버는 그를 자극해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좋습니다. 다 아는 내용은 집어치우죠. 저는 파티 정황을 묻고 싶습니다. 사건을 해결해야 하니까요. 아내 분과 다른 네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간 사건을 말입니다. 그러려면 허드슨 씨가 도와주셔야 합니다.”

아내를 언급하는 순간에도 허드슨의 눈빛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는 그냥 그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제기랄, 정신이 아내를 따라간 게 분명했다. 레버는 사진들을 꺼내기 위해 봉투를 뒤적거렸다. 사건 장소를 찍어둔 것이 손에 집혔지만 이 정도로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을 것이다. 안나 허드슨의 사진을 보여줄 생각이었다. 움찔하는 모습 정도는 보여주겠지. 어쩌면 아예 발작을 하면서 맛이 갈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자리를 박차고 문을 향해 도망쳐야 할 것이다.

“화이트 양을 보았나?”

리치먼드가 입을 연 건 그 때였다. 뜬금없는 소리에 당황한 레버는 입을 벌리고 그를 멍하니 쳐다보면서 방금 들은 말에 대해 이해해보려고 애썼다.

“화이트 양이요?”

갑자기 그가 팔을 들어 올리는 바람에 레버는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러뜨렸다.

“저런, 패럿 씨를 구해주게! 불쌍한 양반. 놈이 그를 먹고 있어.”

레버는 팔을 허우적거리는 리치먼드를 보면서 얼이 빠졌다.

“허드슨 씨, 진정하세요.”

“괜찮네, 난 괜찮아. 이런, 미안하네. 낼 카드가 없어. 녀석의 무덤으로 써버렸군.”

리치먼드가 갑자기 헛소리를 주절거리기 시작했다. 그는 몸짓을 크게 하며 이리저리 허공을 헤엄치고 다녔는데, 그러다가 레버와 눈이 마주치자 재빨리 시선을 피했다. 어쩐지 기묘한 어색함이 느껴지는 행동이 계속되었다. 레버는 의자를 살짝 뒤로 뺐다.

“가만, 가만히 계십시오. 화이트 양에 대한 얘기를 해보세요, 허드슨 씨.”

“그녀를 보았나? 그녀는 어디에나 있지. 도무지 떼어낼 수가 없어. 그런데 아무도 그 여자를 보지 못 한다는 게 우습지 않나?”

“전 볼 수 있을 겁니다, 허드슨 씨. 제가 그녀를 막기 위해 여기 온 겁니다.”

그가 느닷없이 폭소를 터뜨렸다. 레버는 당장에라도 방을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꾹 참고 웃음소리가 멎기를 기다렸다. 취조 기술 교육에서 듣기를 자신만의 논리가 없는 정신병자는 없다고 했다. 그 논리에 맞춰준다면, 적어도 화제를 사건으로 돌릴 수는 있을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자네가? 자네는 내가 제정신이라는 사실도 못 믿지 않나. 크래들, 차를 내오게!”

“아뇨, 허드슨 씨. 저는 당신을 믿습니다. 당신도 저를 믿어주십시오. 저는 이런 일을 전문적으로 조사하는 사람입니다. 그녀가 유령이라고 해도 전 믿을 겁니다. 뿐만 아니라 그녀를 막을 방법까지 찾아낼 겁니다.”

리치먼드가 순간 고개를 돌리며 레버를 쳐다보았다. 웃음기라곤 씻은 듯이 사라진 얼굴이었다. 수 초 간의 정적이 흘렀다. 레버는 그의 눈동자가 더 이상 떨리지 않는다는 점과 그것이 자신에게 고정되었다는 것을 눈치채고 이 급작스러운 분위기의 변화에 몸서리를 쳤다. 리치먼드가 갑자기 전혀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레버는 곧 그가 벌떡 일어나 자신에게 달려들어 목을 조를 것이라고 여기기 시작했다.

미친 남자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재단에서 왔나?”

레버는 즉시 얼어붙었다.

“그…….”

리치먼드가 어깨에 놓인 짐을 내려놓은 것처럼 순식간에 경직된 모습을 풀고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레버를 위축시켰다. 그가 비밀 이야기라도 하듯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드디어 나타났군. 기다리고 있었네.”

“우리에 대해서 어떻게…….”

레버는 그러고 싶지 않았지만 자신의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느꼈다.

“자네들을 귀띔해준 친구가 있었네.”

리치먼드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모습이어서 레버는 그의 정신에 어떤 문제가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할 수 없었다.

“그건 중요하지 않네. 그는 아무도 아니야. 난 자네들이 찾아오기 전까지 미친 척을 하고 지냈지.”

“그럼…….”

“난 미치지 않았네.”

레버의 이마에 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왜 그러셨죠?”

“자네들이 아니고서야 아무도 내 얘기를 믿어주지 않을 테니까.”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보통 입을 꾹 다물던데요.”

“그랬다면 내가 살인범으로 몰렸겠지. 그녀는 그대로 자취를 감췄을 거고. 나는 화이트가 도망치도록 내버려둘 수 없었네.”

리치먼드는 대답을 기다렸다. 약간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가진 뒤에, 레버가 뺨을 문지르며 자신이 알아내야할 것들을 재차 떠올렸다. 그래, 어디, 좋아. 제정신이란 말이지. 그는 헛기침을 하며 마음을 추슬렀다.

“좋습니다, 허드슨 씨.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죠.”

리치먼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화이트’라는 여자에 대해 물어보겠습니다. 그녀가 유령이라고요?”

“그래, 그녀는 실존하지 않아.”

“하지만 당신은 그녀와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면서요?”

“뿐만 아니라 실제로 만질 수도 있었지.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손대면 형상에 구멍이 나는 그런 게 아닐세. 어쩌면 악마 같은 것으로 취급하는 게 맞을 지도 모르지. 어쨌든 화이트는 유령이 아니라면 적어도 유령 같은 여자야. 기척도 없고 흔적도 없네. 항상 주변에 있다는 것만 느낄 수 있을 뿐이고 어느 순간 예고 없이 나타나지.”

“언제부터 시작된 현상입니까?”

“날짜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난 화이트 양을 어떤 사교 모임에서 소개받았네. 머리를 하얗게 염색한 게 독특했지. 신기하게도 잘 어울리더군. 이름은 거기에서 따온 예명이라고 했는데 본명은 몰라. 그녀는 아름다웠고 천진난만했어. 그녀와 얘기하면 항상 즐거웠지. 제법 재밌는 삶을 살아왔더군. 영화배우였던가? 그래, 여자에게 할리우드가 꿈이라면 틀림없이 배우를 얘기하는 거겠지. 그 꿈을 안고 무작정 집을 나올 정도로 바보 같은 여자였어. 귀엽더군.”

제정신이라고?

“음, 허드슨 씨는 그녀가 마치 진짜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얘기하시는 군요.”

“전부 사실이야. 나 말고도 그녀와 얘기 나누고 손에 키스한 사람은 차고 넘친단 말일세.”

리치먼드는 마치 모욕을 받은 것처럼 반응했다. 레버는 침착하게 목소리를 조금 낮추었다.

“그렇다면 마냥 유령으로 여기기에는 좀 어렵겠네요. 일단 계속 하시죠.”

“분명히 말하건대 그녀는 재능이 있었어. 데뷔하고 5년이 안 되서 세계적인 배우로 거듭나는 미래가 어렵지 않게 상상됐지. 투자할 가치가 있어 보이더군. 어찌어찌 연기 수업을 받게 되었다면서 주변에 지낼 곳이 필요하다고 부탁했어. 나는 그녀를 기쁘게 내 집에 초대할 수 있었네.”

이야기의 모양새는 갑자기 그의 젊은 애인과의 만남에 대한 정당화로 변했다. 그는 리치먼드가 다른 여자에게 한눈을 파는 것이 좀 의외라고 생각했다. 그럴 만한 인상은 아니었는데. 하긴 늙으면 망령이 드는 법이지.

“그렇게 해서 그녀가 우리 집에서 살게 됐지. 처음엔 가족 모두가 환영하는 분위기였어(‘아내 분은 예외였겠지’, 레버는 생각했다). 그녀는 붙임성이 좋았고 많은 사랑을 받았네. 그런데 어느 날 하녀 힐러리가 찾아와서 그녀에 대해 이상한 점을 털어놓더군. 방에 청소할 것이 없다는 얘기였어. 그게 뭐가 문제가 되냐고 물었더니, 사람이라면 그럴 수가 없다고 하더군. 그녀는 항상 음식을 방으로 가져가서 먹었는데-그녀는 한 번도 우리와 식사를 함께 한 적이 없네. 그래도 우리는 그녀를 좋아했지- 과자 부스러기 따위는 찾아볼 수도 없었고 사실 먼지 한 톨도 없다는 거야. 스스로 청소한 것이려니 했지만, 힐러리는 단호했네. 침대보조차 한 치도 흐트러지지 않았고 의자도 항상 똑같은 각도로 가지런하게 화장대 앞에 놓여 있었다고 하더군. 화장대 위에 놓인 화장품도 위치 한 번 바뀌는 법이 없다고 했네. 도저히 방에서 지내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다고 여겼어. 나는 힐러리가 화이트를 질투해서 그녀를 깎아내리는 것이라고 여겼지. 화장품 위치 가지고 트집 잡는 게 사실 좀 그런 식으로 보이지 않나. 그래서 그냥 그녀를 돌려보냈네.”

그는 굉장히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한 교수 같은 자세로 콧수염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정말 이상하더군. 그녀의 장신구는 매번 바뀌었지만 가방을 지니고 다니는 모습은 본 적이 없네. 사실 옷과 악세서리 말고 다른 개인 소지품이라곤 코빼기도 못 봤지. 심지어 방에 다른 옷이 걸려있는 것조차 본 사람이 없어. 거실에 나타날 때마다 옷은 매번 바뀌는데 말일세. 자물쇠가 걸려있는 옷장이 있긴 했지. 그러나 그녀가 외출한 사이에 확인해보니 열쇠 구멍은 그녀에게 방을 주기 전처럼 먼지로 가득 차 있더군. 그래, 그걸 보고서야 알았지. 뭔가 잘못된 게 확실했네. 그 때부터 시작됐어. 그녀가 환상처럼 눈앞에 어른거리기 시작한 것이. 순간 순진하기만 했던 그녀가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고 생각했다네. 천사 같던 얼굴이 표독스럽게 바뀌었지. 걸음걸이는 난잡해졌고 말투는 천박하게 변했네. 걸핏하면 화를 내고, 남의 흉을 보는데다 심지어는 보는 앞에서 내게 독설을 쏟아 붓기도 했지. 그러곤 순식간에 떠나버려. 그런데 당혹감에 그녀를 뒤쫓아가보면, 그녀는 평상시처럼 환하게 웃으며 독서를 하고 있는 게 아니겠나.”

리치먼드는 눈을 감으며 고개를 저었다. 레버는 손에 간단한 분류 검사지를 들고 마음속으로 체크 표시를 그리고 있었다. 환각을 불러일으키는가? 예. 단일의 개체에게만 작용하는가? 아니오. 지능이 있는가? 예. 이성적인 악의를 가지고 희생양에게 정신적 피해를 주는가? 예. 실체가 있는가? 글쎄.

“그러기를 몇 차례 겪고 나자 지쳐버렸네. 환상이라는 건 알지만서도 화이트에게 도저히 정을 붙일 수가 없겠더군. 그래서 처음에 내가 그랬듯이 작은 파티를 열어서 그녀를 소개하고 다른 사람에게 보내려고 했네. 그런데 일이 이렇게 되었군.”

“화이트가 벌인 짓으로 확신하고 계시는군요.”

“달리 설명이 되지 않네. 여기 수감되고 나니까 머리가 맑아진 것 같아. 믿기 힘들었지만 나는 그녀가 실존하지 않는 허상이라고 여기기로 했네. 그리고 그녀를 내 머릿속에서 쫓아낸다는 개념으로…… 뭐라고 해야 할 지 잘 모르겠군. 하지만 이해하겠지? 그녀는 단지 플라시보 효과 같은 개념일 뿐이야.”

그는 날파리를 쫓는 시늉을 해보였다. 어려운 비유는 아니었다.

“물론입니다만, 그렇다면 허드슨 씨는 이걸 정신적인 문제라고 여기시는 건가요?”

“그렇게 따진다면 다른 사람들도 그녀를 볼 수 있는 것이 설명되질 않지. 그것이, 어떤 것이 두뇌 속에서 장난질을 치는 거야. 집단 최면. 그래, 그걸세. 그게 너무 강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견디지 못하고 쇼크사 한거야.”

그가 하는 말 자체가 앞뒤가 안 맞긴 했지만 레버가 보건데 리치먼드가 전하려는 의도는 끝까지 그녀의 존재를 인정할 생각이 없다는 것이었다. 비정상적인 반응은 아니었으나, 그가 제멋대로 화이트의 본질에 대한 설명을 쥐어짜내는 것을 보자니 레버에게는 그것이 범죄자가 자기 행동을 합리화하는 수준이나 다름없다고 생각되었다. 그는 사안을 명확히 해야 한다고 여겼다.

“하지만 허드슨 씨는 방금 전에 화이트가 유령이라고 하셨는데요.”

그러자 리치먼드가 순간적으로 언성을 높이며 탁자를 내리쳤다.

“빌어먹을, 맞아! 화이트는 유령이야! 난 그녀를 봤고 함께 얘기했고 춤도 췄어. 나도 모르겠네, 난 CIA의 기밀 프로젝트 따위 헛소리를 믿지 않았지만 이제 나도 모르겠단 말일세. 자네들을 부른 이유를 알겠나? 지금부터 이건 자네가 해결할 사안이네. 난 더 이상 상관하고 싶지 않거든. 그녀의 정체를 밝혀내고 날 괴롭히는 이 염병할 상황을 매듭지어주길 바라네. 떠넘긴다고 생각해도 좋지만…….”

문득 입을 다문 그가 한숨을 쉬며 붉어진 얼굴을 숙였다. 레버는 잠자코 있었다. 리치먼드는 숨을 고르더니 이마를 문지르며 사과했다.

“미안하네, 너무 제멋대로 떠들었군. 많이 지친 상태니 이해해주길 바라네.”

레버는 개의치 않는다는, 사실은 어이가 없어서 짓는 미소를 보이며 잠시 기다렸다. 리치먼드가 다시 고개를 들어 올리자 그는 주제로 돌아가자는 의미로 파일을 집어 들었다.

“우선 화이트를 만났다는 그 사교 파티가 쟁점이 되겠군요.”

“그 점은 도움이 안 될 것 같네. 그 파티에 참석했던 사람들은 모두 죽었거든.”

“뭐라고요?”

리치먼드는 너무나도 무심하게 얘기를 꺼냈다.

“그 파티도 그렇게 많은 사람이 온 건 아니었어. 대여섯 명 정도…… 나를 포함해서 모두 화이트에게 혼이 나가있었지. 그리고 모두 정신적인 문제로 죽었다고 하더군. 벌써 한 달도 더 된 일이니 이제 와서 조사해봤자 이미 늦었을 걸세.”

“그게 사실이란 말입니까? 허드슨 씨의 반응을 보자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습니다.”

“자네 입장에서야 그럴 수 있겠지만, 난 그들과 단순히 이해관계에 있었을 뿐이고 그다지 장례식에 꽃을 보내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는군.”

“그렇지만 그 쯤 되면 ‘다음 차례’가 허드슨 씨라는 생각도 해보셨을 텐데요!”

“물론 해봤네. 그렇지만 난 그녀를 이겨내는 데 성공했지. 이제 그녀는 날 위협하지 못해.”

그 대답에 레버는 거의 본능적으로 소름이 돋았다. 그는 다시 리치먼드와 정신병자를 일치시키기 시작했다.

“그러면…… 지금도 환상을 보십니까?”

“아니, 일이 터지고 난 뒤로 그녀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네. 아니, 흔적은 원래 없었다고 해야겠군. 이제 내 주변에 그녀가 맴돌고 있다는 느낌도 전혀 들지 않아.”

“허드슨 씨는 여기에 오신 뒤로 머리가 맑아졌다고 하셨는데요. 혹시 저택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요?”

“내 집이 헌티드 맨션이라는 얘긴가? 글쎄. 아니. 나는 내가 그녀의 존재를 지워버리는 데 성공한 것이라고 여기네만.”

레버는 머리를 내저으며 정신 나간 늙은이의 발언 속에서 헛소리를 골라 내버려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허드슨 씨, 이런 경우는 보통 환상을 보게 만드는 매개체가 있기 마련입니다. 화이트 양을 만난 사교 파티에서 저택까지 가져온 물건이 있으십니까?”

“매개체라고? 그럴 수도 있겠군. 어디…… 미안하네. 잘 모르겠어. 사소한 물건이야 오고가는 일이 많으니까. ……어쩌면 다른 물건에 옮겨왔을 수도 있지 않겠나? 소라게가 집을 바꾸듯이 말일세.”

만약 그렇다면 SCP를 격리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레버는 인상을 썼다.

“전례는 없었습니다만,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매개체가 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건 하얀색이라는 걸 내가 장담하지.”

“어째서죠?”

“화이트는 이름처럼 하얀 물건을 애용했어. 진주 목걸이에 새하얀 드레스는 그녀의 상징과도 같았지. 물론 머리카락부터도 흰 색이었고. 그게 그 유령의 정체성인 모양이야. 자네야 억측이라고 생각할 지도 모르지만 말일세, 직감은 믿을 만한 증인이지. 더군다나 이런 성질의 일에 대해서는. 동의할 거라고 생각하네만.”

레버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정말로 화이트가 흰색 물건에만 반응한다면 격리 방법도 생긴다. 정체성이라, 적어도 화이트와 흰색 물건의 연관성은 그런대로 끼워 맞춰졌군.

“보여드릴 게 있습니다.”

그는 클레멘스가 보여줬던 다섯 장의 사진을 꺼냈다.

“현재 저희가 의심하고 있는 다섯 가지 개체입니다. 모두 허드슨 씨의 집에서 찾아낸 겁니다. 한 번 보시고 기억나는 점이라도 있으면 얘기해주시죠.”

리치먼드가 사진을 보더니 흠칫 놀랐다. 레버는 그의 얼굴이 눈에 띄게 창백해지는 것을 관찰할 수 있었다.

“그렇군. 죽은 다섯 명 근처에 놓여있던 물건들이로군.”

“맞습니다.”

손수건, 모비 딕, 웨딩드레스, 대리석 조각상, 트럼프 카드. 리치먼드는 그것들을 자세히 볼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몸을 뒤로 젖히고 눈을 감았다. 그가 입을 열기를 기다리던 레버가 사진들을 다시 봉투에 담을 때 리치먼드는 멍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그라기보다는 어깨 너머 허공을 응시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들 모두 원래 내 소유물은 아니네.”

그는 불안한 기색을 보이며 자꾸만 몸을 뒤척였다. 흰색 공포증이 진짜 생겼나보군, 레버는 생각했다.

“우선 손수건은 기억에도 없는 물건이고, 모비 딕은 희귀본을 수집하는 과정에서 최근에 얻은 것이지. 웨딩드레스는 파티 전시용으로 구했던 것이고. 명목상으론 결혼기념일 축하 파티였거든. 아, 나르시스의 조각상을 화이트 양을 만난 바로 그 파티에서 선물 받았다는 것이 기억나는군. 자네 말대로라면 그게 가장 의심스러운 녀석이겠지. 트럼프 카드는 얀이 들고 온 걸세. 카드에 얼굴을 묻고 죽은 꼬맹이 말이야. 내 집을 뻔질나게 드나들던 녀석이지. 화이트에게 관심을 보이던 것 같더군. 내 집에 있던 것도 아니니 이건 아니라고 생각하네만, 만일 화이트가 우릴 속일 정도로 영악하다면…… 제기랄. 이런 식으로는 끝도 없네.”

그는 산만하게 손을 놀리면서 무의식적으로 말을 잇다가 문득 있는 대로 눈살을 찌푸렸다. 얘기를 경청하며 멍하니 그의 손을 좇고 있던 레버는 갑작스러운 반응에 흐름을 놓쳐 말꼬리를 흐렸다.

“예…… 알겠습니다. 그러면…….”

“저기, 베일리 선생이라고 하셨나? 미안하지만 몸 상태가 안 좋아져서 말인데…….”

리치먼드가 눈두덩을 문지르며 테이블을 내려다보았다. 레버가 조심스레 그의 눈치를 살폈는데 그는 정말로 좋지 않아 보였다. 설마, 직감 어쩌고 할 때만 해도 멀쩡해보였는데. 고작 사진 다섯 장 때문에? 3분도 채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파리하게 변한 리치먼드의 눈을 보고 레버는 서둘러 자료들을 다시 챙기며 그가 할 말을 대신 했다.

“알겠습니다, 리치먼드 씨. 오늘은 이만 하도록 하죠.”

“고맙군. 내 집에도 한 번 찾아가보게.”

“그렇게 하죠. 나중에 다시 오겠습니다.”

레버는 방을 나서면서도 벽을 마주한 리치먼드의 혼란스러운 눈빛을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


리치먼드의 저택을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레버는 우선 이 마을의 부동산 사무소를 찾아갔다. 저택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기록 보관소가 따로 없어 그곳에 관련 기록들을 보관해둔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도 한몫 했다. 사무소는 저택이 위치한 언덕 아래쪽에 외따로 떨어져있었는데 모양새가 흡사 녹슨 컨테이너와 비슷했다. 드나드는 사람이 없는 탓인지 이미 상당히 낡은 모습이었다. 겉보기에는 사람이 있는지조차 의심스러웠지만 칠이 다 벗겨진 철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들어오라는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가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본 것은 도저히 그 흉한 외관의 건물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현대적인 사무실이었다. 빛이 바랜 외벽과 대조적으로 형광등의 옅은 푸른빛이 돌고 있는 내부는 냉정하면서도 능률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사실 부동산보다는 변호사 사무실에 어울리는 분위기였다. 약간 좁은 통로를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파일들이 가득히 꽂혀있는 하얀 책장이 나란히 서있었는데 안쪽에 위치한 검은색 철제 책상이 부각되면서 인상적으로 시선을 끌었다. 잠시 당황한 레버가 현관에서 발을 떼지 못하자, 목소리의 주인이 흠집 하나 없어 보이는 책상 뒤에서 미소 지으며 먼저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사무실이 좀 뜻밖이죠?”

“아, 안녕하세요.”

검은 머리의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이 없다는 듯 두 손을 깍지 끼고 턱에 대어 괴었다. 레버는 약간 괘씸한 생각이 들어서 책상까지 다가가는 동안 그녀의 얼굴을 기억하겠다는 듯이 찬찬히 뜯어보았다. 긴 생머리는 뒤로 묶어서 어깨 뒤까지 늘어뜨렸고 흰 셔츠에 검은색 정장 스커트 차림이었다. 꽤 예뻤지만 전체적으로 약간 차가운 인상을 주는 얼굴이었는데 안경만 착용했다면 그야말로 전형적인 사무실 여자였다.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웠는데 당장은 딱딱한 분위기 때문에 적어도 이십 대 후반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는 밖에서 원피스 차림으로 만난다면 스물 댓 살쯤이라고 여길 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안쪽은 관리가 잘 되어있군요. 어째서 바깥은 저대로 내버려두셨습니까, 미스……”

“캔버스라고 부르세요. 안에서야 제가 생활하는 곳이니까 계속 주변을 돌보지만 여기가 그렇게 사람이 자주 찾는 곳도 아니고 굳이 고생해서 외부를 보수할 필요성은 못 느끼거든요.”

“이 정도 고생을 하실 분이라면 바깥에도 신경을 쓰실 것 같습니다만…….”

“그렇게 생각해도 사실 실천하는 사람은 별로 없죠. 그렇지 않나요?”

캔버스가 배시시 웃었다. 레버는 방금 붙였던 얼음 여왕이라는 별명을 즉시 취소했다.

“그런데, 무슨 일이시죠? 집을 보러 오신 분처럼 보이지는 않는데요.”

“예, 저는 이 언덕 위에 위치한 허드슨 씨의 저택에 대해 뭔가 알아볼 것이 없을까 하고…….”

그녀는 알만하다는 듯 매력적인 눈을 살짝 찌푸렸다.

“경찰 분이시군요. 아니면 탐정인가요?”

“후자가 좀 더 가까운 것 같습니다. 변호사거든요.”

“단순한 자살이 아니라는 건가요?”

레버는 방어적인 태도를 취했다.

“아니, 그런 뜻은 아닙니다. 유언장과 보험을 생각하시면 될 것 같군요.”

“그렇군요. 글쎄, 허드슨 씨의 저택이라…… 이름이 아마 셔크 하우스였을 텐데.”

그녀는 책상 밑에서 얇은 파일을 하나 꺼냈다. 가까운 데 둔 걸 보니 경찰이 꽤 자주 들락거린 모양이었다. 파일을 몇 장 넘겨보던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며 그것을 레버에게 건네주었다.

“도움이 될지 모르겠네요. 여긴 이런 정보가 거의 없다시피 하거든요. 예전에 마을에 큰 화재가 났을 때 다 타버렸다고 하더라고요.”

파일에는 정말로 경찰 조사 기록에서 찾을 수 있을만한 것 외에는 쓰여 있지 않았다. 물론 레버는 문서를 통한 헌티드 맨션 구별법에 전혀 기대를 걸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다지 실망스럽다고 말할 것도 없었다. 그는 좀 더 직접적인 부분을 보기로 했다.

“혹시 이전 입주자들의 기록도 있습니까?”

“어디, 잠시만요. 앞쪽에 있을 거예요."

캔버스가 다시 파일을 받아 페이지를 뒤적거렸다. 레버는 그녀를 내려다보는 꼴이 되었는데 묶은 머리를 풀면 훨씬 더 어려보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곧 그 페이지를 찾아냈다.

“여기 있네요. 남은 기록은 두 세대 분밖에 없지만 그래도 꽤 역사가 깊은 집이에요.”

리치먼드 허드슨 이전에 살던 가족의 기록이 있었지만, 그다지 특별한 사실은 발견할 수 없었다. 그들은 평범한 부자였고 주인이 사망하자 모두 도시를 향해 다시 떠났다. 그 간격은 유달리 좁지도 않았고 나이가 70을 넘긴 경우를 빼면 급사한 사람도 없었다. 결국 셔크 하우스에는 별 문제가 없어보였다.

“그런데 입주자 기록을 굳이 보셔야할 이유라도 있나요?”

레버가 집과 유령에 대한 관계를 따져보고 있는데 캔버스가 불쑥 끼어들었다. 느닷없는 질문에 그는 말문이 막혔다.

“저도 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지금부터 알아봐야죠.”

바보 같은 대답이었다. 아니, 재치 있었나? 다시 생각해보니 그런 것 같기도. 그는 ‘이 주제는 중요한 일이니 서로 얘기를 나눌 생각이 없다’는 것을 돌려서 말했을 뿐이다. 그녀가 의심할 여지는 없었다. 레버는 자신이 왜 이렇게 초조해하는 지도 모른 채 전전긍긍했다. 캔버스는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느긋하게 고개를 끄덕였는데, 레버에게 그것은 마치 그의 속내를 뻔히 알면서도 속아주겠다는 행동처럼 보였다. 왠지 부끄러워진 그는 다른 화제를 꺼냈다.

“혹시 저택에 대해 주변에 떠도는 소문 같은 것은 없습니까?”

“소문이라뇨?”

“뭐, 이를테면, 지하에 금괴가 파묻혀있다던가 그런 얘기 말입니다.”

캔버스가 이 말을 믿어주는 것 같지는 않았다.

“괜찮은 농담이군요. 저택에 대한 얘기는 별로 없었어요. 마을에 코빼기도 안 비치는 허드슨 씨에 대해서 쑥덕거렸을 뿐이지. 비겁한 수를 써서 다른 사업체들을 마구잡이로 꿀떡하는 악덕 사업가라는 얘기도 돌았네요. 하지만 부잣집 양반에 대한 가십은 어디에나 있을 테니까 이것도 그다지 중요한 단서는 아니죠.”

“음…… 그렇습니까. 알겠습니다. 저택에 직접 가봐야겠군요. 반가웠습니다.”

그는 고개를 끄덕, 하고 황급히 돌아섰다. 젠장! 내가 왜 이 여자 앞에서 거짓말이 들통날까봐 속을 끓여야하지? 레버는 자신에게 화가 났다.

“아마 하녀인 힐러리 씨가 거기서 지내고 계실 거예요. 그 분에게 안내를 받으시는 게 좋겠네요.”

“감사합니다.”

레버는 그녀의 친절에 건성으로 대꾸했다. 쓸데없이 참견하는 귀찮은 여자 같으니. 어디서 배웠답시고 이런 어린애 장난질 같은 거짓말에는 속지 않겠다는 거지……. 그가 복잡한 심경으로 문을 나설 때 캔버스가 뒤에서 말했다.

“우리가 혹시 또 만나게 될까요?”

그는 우뚝 멈춰 섰다.

“무슨 의미죠?”

그녀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사건을 꼭 해결하셨으면 좋겠네요.”

레버의 눈이 어퍼컷을 맞은 듯 크게 벌어졌다. 그는 약간 상기된 얼굴로 우물거리며 그 말을 간신히 받았다. 그는 뒤돌아볼 겨를도 없이 허둥지둥 그곳을 벗어났다. 저택으로 향하는 길을 오르는 동안 그는 들뜬 기분처럼 휘청거리면서, 캔버스가 자신에게 보인 관심을 해석하기 위해 한동안 이리저리 머리를 굴렸다.

‘해결’이라는 단어가 자살 사건과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레버가 알아차린 건 한참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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