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2)

 
독일계 하녀는 전혀 협조적이지 않았다. 레버는 저택 앞뜰에 딸린 작은 오두막 앞에 서서, 그곳에서 지내는 하녀와 힘겹게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다. 힐러리 크래들은 하녀다운 단정한 자세로 흰 롱 원피스에 수수한 갈색 에이프런 스커트를 차려입고 있었지만 옷은 여기저기 주름이 잡힌 채 꾸깃꾸깃했고 머리카락도 부분부분 막 자다 깬 사람처럼 헝클어진 상태였다. 산발적인 모양이 신경질적으로 긁어댄 자국처럼 보였는데 대략 그녀의 현재 모습을 추상적으로 나타낸 것과 비슷했다.

“이해할 수가 없네요. 경찰이라는 작자들은 왜 자꾸 찾아와서 사람의 속을 뒤집어놓는 거죠?”

“크래들 씨, 죄송하지만 전 아까 말했듯이 허드슨 씨의 변호사입니다.”

“변호사나 그 치들이나 골치 아픈 건 똑같아요. 허드슨 씨가 고용했다고요? 노인네가 정신을 차리긴 했나보네요.”

그녀에게 리치먼드에 대한 존경심이라곤 눈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그녀는 심지어 그를 약간 한심하게 여기는 듯 보였는데, 그의 말년이 어린 영화배우 지망생과 복잡하게 얽혔던 것을 감안하면 사실 당연한 결과였다.

그는 가짜 명함을 건네받은 하녀가 자기 이야기에 취해있는 사이 몰래 한숨을 쉬었다. 지금 단계에서 사건 현장을 돌아보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었다. 원래라면 그는 사건의 경위에 대해 대략적으로라도 파악하고 있어야 했다. 경찰 조서를 통해 일어난 일의 순서를 훑어보고 관련자들의 진술을 검토한 뒤, 무엇을 조사해야 하는지 알고 있는 상태에서 현장을 확인해야 하는 것이다. 뭘 찾아야되는 지도 모르는 채로 무턱대고 찾아가는 건 맨땅에 헤딩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조서가 너무 빈약했다. 보고서에 올라온 실질적인 내용은 리치먼드 허드슨이 결혼 기념일 파티를 열었는데 참석자 8명 중 다섯 명이 뜬금없이 질식사한 상태로 발견됐다는 게 전부였다. 누가 몇 시에 도착했고 무엇을 먹었다 따위의 신경 쓸 부분이 못 되는 파티 진행 상황에다 리치먼드의 미치광이 연기와 하녀 힐러리의 화이트에 대한 헛소리, 그리고 또 다른 생존자 샌들러라는 남자가 '나는 완전히 취해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겠어요'라고 떠들어댄 것을 추가하면 그게 레버가 받은 보고서였다. 힐러리가 진술한 화이트의 행동이라는 것도 함께 파티를 즐겼다는 수준으로밖에 비치지 않았기 때문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레버는 뭐라도 얻어보자는 심정으로 지금 금발의 멍청한 하녀 앞에 불만스럽게 서 있었다.

‘가만, 그러고 보니 하녀도 꽤 젊은 편에 속하는군. 아직 서른 살이 좀 안된 것 같은데. 빌어먹을 부르주아 양반 같으니라고.’

레버는 속으로 구시렁거리면서 힐러리의 한탄에 귀를 기울이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노력했다. 한참 동안이나 자신이 받아온 불공평한 취급이라는 것에 불만을 토로하던 그녀는 경찰 이야기에 이르면서 마침내 레버의 존재를 다시 떠올렸다.

“허드슨 씨의 변호사라고 하셨죠? 저택을 안내해 달라고요?”

“예, 몇 가지 질문에 답변도 함께 부탁드립니다.”

“정말 끔찍한 사건이에요. 따라오세요, 거실부터 보여드리죠.”

그들은 저택 안으로 걸어 들어가 호화롭게 꾸며진 로비로 이동했다. 공간을 가로 절반으로 나누어서 아래쪽은 검은 돌이었고 위쪽 면은 흰 색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곳이었다. 로비가 굉장히 넓었지만 정면의 2층으로 올라가는 T자 모양 계단은 한쪽을 다 채울 만큼 쓸데없이 웅장했다. 왼편에서는 사치스러운 대리석 장식품들과 겉멋만 들어 딱딱해 보이는 소파가 어색하게 그를 반기고 있었다.

레버는 2층의 난간 위로 시선을 들어 높은 천장을 올려다보며 기가 찬 듯 입을 뻐끔거렸다. 마음이 불편해진 그는 거실만큼은 좀 더 안락하게 느껴질만한 공간이길 바라면서 계속 힐러리를 따라갔다. 그가 잘못한 것이 있다면 대부호의 저택에서 너무 소박한 것을 바랬다는 점이다. 구두 소리가 울리는 매끈한 돌바닥 로비 중앙에 네모난 붉은 카펫이 깔려있었는데 하녀가 거기서 멈추고 그를 돌아보는 것을 보니 여기가 ‘거실’인 모양이었다. 레버는 경멸하는 표정으로 눈부신 샹들리에를 노려보았다. 힐러리가 오른쪽 벽 가운데에 있는 빈 유리관을 가리키며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 파티가 허드슨 부부의 결혼 기념일 파티였다는 건 아시죠? 원래 저 안에 웨딩드레스가 들어있었어요. 경찰이 쓸데없이 증거품이랍시고 가져간 것 말이에요. 자기네들이 결혼할 때 입었던 건 아니지만. 부자가 됐다고 굳이 명품 드레스를 구해서 전시해야할 필요가 있나요?”

고용주를 빈정거리던 그녀는 그 앞의 바닥으로 손가락을 내렸다.

“그리고 여기가 애쉬 씨의 시신이 있던 곳이에요.”

레버가 유리관 앞으로 다가가 몸을 숙였다. 그는 희생자의 사진들 중 하나를 머릿속에서 끄집어냈다. 애쉬 허먼, 마흔 여섯 살 여성. 독일계 미국인. 안나 허드슨과 먼 친척 사이. 웨딩드레스가 든 유리관에 손을 짚은 채 자신의 스카프로 목을 졸라 질식사. 레버의 눈앞에 사진 속의 일그러진 얼굴이 일렁거렸다.

레버는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눈에 띄는 다른 하얀색 무언가를 발견하지는 못했다. 그렇다면 웨딩드레스가 첫 번째 용의자. 무슨 행동이 그녀를 죽게 만들었을까?

“혹시 애쉬 씨가 웨딩드레스를 입어보기라도 했나요?”

힐러리는 가당치도 않다는 듯 입을 삐죽 내밀고 비웃었다.

“늙은이가 주책 부릴 일 있어요? 그러지 않을 만한 체면이야 있었겠죠. 그래도 분명히 그 드레스에 마음을 뺏긴 모양이었어요. 눈을 떼지 못하던데요. 사람들을 한참 동안이나 이 앞에 붙잡아 놓고 서서 자신이 결혼식을 제대로 올려보지 못했다느니 하는 얘기를 주절거렸죠.”

그렇군, 뒤에서 쑥덕거리는 데는 젊은 하녀가 어디 가지 않는다. 그녀는 어지간히 지겨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레버는 귀찮은 상황을 피하기 위해 빠르게 대화를 매듭지었다.

“유난히 이 드레스에 집착했다는 말이군요, 음…….”

그는 턱을 문지르며 생각에 잠겼다. 애쉬는 왜 마지막 순간에 웨딩드레스를 붙잡으려고 했을까? 자살하면서 취했다기에는 이해하기 힘든 행동이다. 그녀가 과연 자살한 건지 의심스러웠다. 간단하게 생각하면 유령이 죽였다고 하는 게 편하다. 아무리 겁에 질렸다고 해도 스스로 목을 스카프로 감는 행위는 상당히 부자연스러우니까.

그러면 그녀는 정말로 웨딩드레스를 잡으려고 한 걸까? 아니면 유리관 속에 있는 무언가 다른 것을 보았나?

자신의 목을 조르고 있는 화이트를?

“변호사 분께서는 사건 현장만 둘러본다면 된다고 하셨죠. 빨리 끝내고 싶은데 그만 이동하면 안 될까요?”

힐러리는 약간의 실례를 무릅쓰고 조바심을 치며 말했다. 레버는 그제야 그녀 역시 이번 사건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 알겠습니다. 어서 움직이죠.”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녀가 돌아서며 걸음을 재촉했다. 그녀가 레버를 긴 복도로 안내하는 동안, 그는 뒤를 쫓으면서 어떻게든 그녀에게 말을 붙여 대화로 끌어낼 방법을 고민했다. 수다스럽던 힐러리는 여전히 말을 붙이면 계속 조잘거리긴 했지만 저택에 들어오면서부터 침묵의 비중이 늘어났다. 잘 배운 하녀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레버에게 있어서는 별로 쓸모 있는 태도가 아니었다.

“힐러리 씨는 사건 이후에도 이곳에서 계속 지내시고 계십니까?”

“예, 달리 갈 데가 없으니까요.”

“좀 으스스하지 않습니까?”

힐러리가 냉랭한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그럼 어쩌겠어요?”

레버는 자신이 너무 수다스러워 보인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래도 억지로 말을 이었다.

“왜 하녀가 되신 거죠?”

“변호사 분께서는 궁금하신 것도 많군요.”

그녀는 이죽거리면서 답변을 거부했다.

“레버 베일리입니다.”

“그래요, 베일리 씨. 이제는 하녀를 하고 싶지 않아도 벗어날 수가 없어요. 요즘 세상에 경력이 하녀밖에 없다고 말한다면 웃음거리가 될 뿐이라고요.”

그녀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레버는 입을 씰룩이고는 그녀를 따라 주방에 들어섰다.

“여기는 스콧 씨의 시체가 발견된 곳이에요.”

힐러리가 뒤로 물러나자 그가 앞으로 나서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짙은 녹색이 점묘화처럼 찍혀있는 테이블과 주방 가구들 사이로 회색 세라믹 바닥이 보였다. 그곳에 쓰러져있던 쉰 두 살의 케네디 스콧은 리치먼드와 사업 관계에 있던 사람이었다. 조리대 앞에서 발견된 통통한 그의 몸은 배를 바닥에 깔고 엎드린 상태였는데, 넥타이로 목을 묶어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질식사했다. 다만 특이하게도 그는 작은 나르시스 조각상을 두 손으로 부여잡은 채 머리 위로 팔을 죽 뻗은 자세로 발견되었다.

“스콧 씨가 쥐고 있던 조각상은 원래 여기에 있던 물건입니까?”

“아니요, 그건 방금 지나온 거실에 전시된 것들 중 하나였어요.”

레버는 근처 바닥에 새하얀 접시들이 깨져 어질러진 것을 보았지만 이번엔 조각상의 존재가 너무 결정적이었다. 마치 이번에 주목할 물건은 자신이라고 당당하게 외치는 듯한 상황에 레버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는 조각상만 생각해보기로 했다. 그러면 이게 주된 논점이군. ‘스콧은 왜 이 조각상을 붙잡고 죽었는가?’ 남의 물건을 제멋대로 가지고 다닐 만한 연령대의 파티는 아니다. 환상에 놀라 무기로 사용하기 위해서인가? 저항할 생각이 있는 남자가 겁에 질려서 자살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겠지. 그러면 역시 화이트가 스콧을 죽인 걸까. 하지만 조각상이 있던 로비에서 여기 부엌까지의 거리는 상당하다. 스콧이 여기까지 도망쳐오면서 마구잡이로 휘둘렀다는 얘기가 되는데.

“혹시 입구에서 여기까지 마구 내달리는 소리 같은 걸 들은 적 있습니까?”

“아뇨, 못 들었어요.”

그가 들고 온 것이 아니라면 조각상은 나중에 그의 손에 쥐어진 것인가? 무엇 때문에? 힐러리가 소리를 못 들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첫 조사 때는 언제나 이것이 문제다.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

그는 머리를 갸웃거리며 아무 말 없이 다시 다음 장소를 향하는 힐러리를 따라갔다. 화이트가 그녀의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 조각상을 놓아두었다고 치자(그러면 화이트는 분명히 물리력을 행사할 수 있겠군). 왜 하필 그 물건이지? 그저 하얀색이기 때문에? 희생자와 하얀 물건들 사이에 무슨 연관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다고 뭘 알 수 있을까.

레버는 너무 앞서가는 것을 포기했다. 결국 지금 당장 알 수 있는 것은 죽은 사람들 옆에서 하나같이 하얀색 물건이 발견되었다는 점 뿐이다. 순전한 우연일 리 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범인의 이름이 ‘화이트’인 경우에는. 그렇다면 화이트가 환상을 통해 사람들을 유도했거나, 물건이나 시신을 나중에 옮겼거나 둘 중 하나겠지. 그 잘난 흰 색 운율을 맞추기 위해서.

추측할 수 있는 건 적어도 이번 유령은 환각 아니면 물리력을 구사할 수 있다는 점이다. 재수가 없다면 둘 다.

“서재에요. 이번엔 패럿 씨죠.”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그들은 이미 다음 장소에 도착했다. 서재는 난장판이었다. 이 집안에서 유일하게 나무 바닥재가 사용되었기 때문에 레버가 원했을 법한 느긋한 느낌을 주는 곳이었지만, 아무렇게나 내팽겨져 바닥에 쌓인 책들이 기묘하게도 그 느낌을 심화시켜 헤어나올 수 없는 게으름의 늪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그리고 붉은 융단 위로 흐트러진 책들 사이에 문을 향한 흔들의자가 외롭게 서있었다. 레버는 그 위로 레온 페럿의 시신을 투영시켜 보았다. 팔걸이 밑으로 팔을 축 늘어뜨린 채 《모비 딕》을 얼굴에 덮은 삼십 대 남자의 모습. 책을 치우면, 시커멓게 움푹 들어간 두 눈을 부릅뜬 채 일그러진 얼굴이 드러난다.

모비 딕이라. 우리의 화이트 양께서는 문학적 소양도 뛰어나시군.

“패럿 씨가 파티 도중에 혼자 서재에 가셨었습니까?”

“네? 네. 분위기가 시들해질 무렵에 다들 뿔뿔이 흩어졌죠.”

“그 뒤로 아무도 본 적은 없고요.”

“다 같이 시체로 발견됐는데 그럴 겨를이 있나요.”

힐러리는 비꼬듯이 말했지만 레버는 그녀가 아까 전부터 한 곳에 시선을 두는 것을 피하고 있다는 것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힐러리 씨는 이 집이 두려우십니까?”

“무슨 소리에요? 집을 두려워하다니? 애도 아니고.”

그녀는 과민하게 반응했다. 레버는 그녀의 목소리에서 히스테리의 낌새를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 사건은 정말 기묘하지요. 그렇지 않나요?"

“이 집에서 다섯 명이 자살했다고 집이 이상한 건 아니겠죠. 아니에요. 집이…… 그걸 믿는 건 미신이에요! 집이 사람을 미치게 만들 수는 없는 거라고요.”

그녀는 머리를 마구 저어댔다.

“셔크 하우스가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고 생각하십니까?”

“뭐라고요? 네. 맞아요. 미친 집이죠. 셔크 하우스라니. 이름부터 재수가 없는 집이었어요. 리치먼드 씨도, 안나 씨도, 전부 다 이상해졌다니까요. 아, 이해해주세요. 저는 허락 하에 두 분을 원래 그렇게 불러서. 어쨌든 두 분 모두 정상이 아니었어요. 둘만 그러면 말도 안하죠. 파티는 그냥 정신병자들의 모임이었어요. 모두……”

“화이트 양을 보았습니까?”

그 이름에 힐러리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화이트! 바로 그 년이에요! 그 년이 온 뒤로 모두 이상해졌단 말이에요. 전 그 여자가 이 집안 사람들을 파멸하게 만들 거라고 경고했지만, 리치먼드 씨는 듣지 않았어요. 그 여자한테 눈이 뒤집어졌단 말이죠! 안나 씨가 상심이 얼마나 컸겠어요? 근데 그 분도 대단한 게, 그 여자를 아예 모른 척한 거예요. 안 보이는 것처럼. 그런 줄 몰랐는데 보통내기가 아니더라고요. 파티도 딱 그 짝이었어요. 누구는 입이 헤 벌어져서 살랑살랑 꼬리를 흔들어대고, 누구는 그게 보기 싫어서 상종도 안하더라죠. 믿겨지세요? 신사숙녀라고 믿었던 사람들이 그 여자를 아예 없는 사람 취급했다니까요!”

레버가 움찔하며 분류 검사지에 대한 생각을 되짚었다.

“그게 정말입니까?”

“그래요! 생각해보니 그렇군요. 리치먼드 씨와 샌들러던가, 기자 양반 한 명하고, 그리고 얀. 그 세 명은 화이트만 쳐다보고 있었죠. 나머지는 싸그리 무시했고. 아니 그 세 명까지 애써 모른 척 하더라니까 그거에요! 웃기지 않나요? 이게 상류 사회라는 거죠. 근본 없는 여자는 인정하지 못 하겠다 그거 아니겠어요? 여자가 반반하니까 사람이 덜 된 남자 셋은 거기 넘어간 거고요.”

뭐지? 누군가는 화이트를 보고 누군가는 보지 못했다. 희생자를 현혹시키는 데에 어떤 조건이 필요한건가? 아니면 한 번에 현혹시킬 수 있는 숫자의 한계? 그렇지만 죽은 사람들 중에는 화이트를 보지 못한 다른 네 명이 있다. 효과가 미치지 못한 사람들까지 죽일 수 있을 리가 없는데. 번거롭게 표적을 옮겨가면서 하나하나 홀린 뒤에 처치했다고? 그럼 살아남은 사람은 왜 살아남은 거지? 희생자들을 묶을 수 있을 만한 공통점이나 과거사는 없었을 텐데……. 고의적으로 선택한 세 명인가? 아니면 단지 재미를 위해서였을 지도…….

레버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딴 짓은 오래할 일이 못 된다.

“나중에 2층으로 올라간 화이트가 내려오질 않자 리치먼드가 안절부절 못하면서 제게 그녀를 찾아달라고 부탁하더군요. 세상에, 그렇게 절박한 모습은 처음이었어요. 꼴불견도 정도가 있어야지! 그래서 올라왔더니 안나 씨가 바로 저기 복도에 엎어져 있더라고요. 다섯 명 중에 제일 먼저 발견된 시체죠.”

힐러리는 이제 리치먼드에게 존칭을 쓰는 것도 잊은 듯 했다. 레버는 안나 허드슨에 대해 생각했다. 마흔 살 초반. 이 나이도 쉰이 넘은 리치먼드에 비교하면 젊지만, 품위 없이 행동할 나이는 아니다. 하녀는 그녀가 화이트를 무시했다고 했지만 사실 그녀의 눈에 그런 여자는 아예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동안의 상황은 쉽게 그려졌다. 안나 허드슨은 환상에 대고 헛소리를 지껄이는 남편과 하녀의 모습을 보면서 겁에 질린 채 지내다가 신경쇠약에 시달리게 됐을 것이다. 결국 그녀가 반쯤 미쳐버리게 되면, 이제 화이트의 장난질 없이도 가족은 붕괴된다. 어쩌면 화이트가 노리는 것이 이것이 아닐까. 이번에 상대해야할 녀석은 단순히 안락함을 무너뜨리면서 희열을 느끼는 빌어먹을 악령이란 말인가?

그는 하늘색 융단이 깔려있는 복도를 죽 건너다보았다. 안나 허드슨은 흰 실크 손수건 앞에서 쓰러져있었다. 애쉬 허먼과 비슷한 느낌으로, 손수건을 향해 팔을 뻗은 채. 드레스 끝자락을 찢은 천 조각을 목에 감아 잡아당겨서 질식사했는데 그것이 가능하려면 온 몸의 근육이 그 상태로 바짝 굳어버려야 한다고 한다. 화이트가 그만한 공포를 줄 수 있을까? 그들이 대체 뭘 봤길래?

힐러리는 몸을 부르르 떨고 레버를 다음 장소로 안내했다. 마지막 죽음을 살펴보는 일도 빠르게 끝났다. 20살이 넘었을까 의심스러운 얀 쿤츠는 2층의 구석방에서 트럼프 카드 더미에 얼굴을 파묻은 채 죽었다. 자살 도구는 셔츠 자락이었다. 카드 말고는 방에 다른 흰 것은 없었다.

리치먼드는 카드가 그의 것이라고 말했다. 얀 쿤츠가 화이트를 졸졸 쫓아다녔다고도 했고 그건 하녀가 뒷받침해주었다. 그러나 그가 이 집을 자주 드나들었다고 해도, 어쨌거나 그녀가 나타난 장소가 여기 셔크 하우스인 이상 얀의 소유인 트럼프 카드가 그녀의 원형이라고 보기에는 어렵다. 자신이 깃든 물건과 멀리 떨어질 수 있는 유령은 없는 법이다. 물론 화이트가 물건에 깃들었는지 어쩐지도 확실하지 않지만…….

방 안에 든 지 2분이 채 안 되서 힐러리는 약간 신경질을 부리며 레버를 데리고 나왔다. 그녀는 수선을 떨면서 이도저도 아닌 인사를 건네고 자신의 오두막을 향해 도망치듯 저택을 나섰다. 잠그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이 저택에서 무언가 이상한 것을 느끼고 있는 걸까? 레버는 정문에서 잠시 망연히 서 있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모든 일에는 예외가 있다. 화이트의 원형이 하얀색 물건이라는 게 사실이라고 해도, 그녀가 어디까지 돌아다닐 수 있는지는 모르는 게 아닌가. 어쩌면 날 쫓아서 여기까지 왔을 지도 모른다. 가소로운 어린 아이의 탐정 놀이를 지켜보는 것처럼, 상대가 어떻게 행동하나 구경하며 즐기기 위해서.

레버의 머릿속에서 번개 같이 무언가가 스쳐지나갔다. 그는 희생자들의 사진을 다시 한 번 떠올렸다. 웨딩드레스에 손을 짚은 채 죽은 애쉬. 조각상을 쥔 채 사망한 스콧. 모비 딕을 얼굴에 덮은 패럿. 손수건을 향해 팔을 뻗은 안나. 카드에 얼굴을 파묻은 얀. 죽은 자들의 곁에서는 항상 하얀색 물건들이 발견되었고 그것들은 모두 너무 눈에 띄었다.

이건 마치…… 어느 것이 진짜인지 맞춰보라는 것 같잖아.

레버는 딸꾹질을 했다. 로비 저편에서 흰 머리카락을 가진 여성의 모습이 순간 나타나 그에게 미소를 지었기 때문이다. 그가 놀란 채 굳은 얼굴로 눈도 깜짝하지 못하고 그곳을 응시했지만, 그녀가 정말로 거기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로비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 말대로라는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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