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3)

 
SCP는 기본적으로 완전한 미지의 영역에 있는 것이며 따라서 첫 번째 탐사가 가장 중요하다. SCP와 처음 마주하게 되는 요원은 대상의 형체, 능력, 행동 양식, 성격, 대상이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그 외 알아낼 수 있는 모든 특성을 파악해야하고 궁극적으로 그것을 대중들에게서 격리할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 바로 실험이다. 관찰을 통해 기본적인 것을 파악한 뒤, 이를 토대로 수행하는 여러 차례의 다양한 실험을 통해 재단은 가능성의 범위를 제한하고 대상의 구체적인 특성까지 파악해낼 수 있다.

그런데 클레멘스는 머리를 벅벅 긁으며 이렇게 말했다.

"실험 계획은 아직 안 나왔어. 그게, 알려진 게 워낙 없잖아. 안 그래?"

그는 심지어 생각조차 해본 적 없는 게 분명했다. 레버는 불신의 눈초리를 간신히 들어올리며 말했다.

"괜찮아, 괜찮아. 인정해. 대충 어떻게 생각해본 거라도 없어?"

"음, 물건 다섯 개마다 D계급 하나씩 붙여서 독방에 가둬두는 게 어때?"

"별로 좋은 생각 같지는 않은데."

"어째서? 즉각적인 효과 보기에는 이게 제일 편하잖아."

클레멘스가 눈을 크게 뜨며 진심으로 물어왔다. 반응이 큰 사람이 친구로서 좋을 지는 몰라도, 함께 일하는 동료로서로는 결코 아니었다.

"너무 단순하잖아. 변수를 쳐내야지."

"뭐가 변수가 될 지 어떻게 알아? 사실 이제 와서 이런 말 하기도 좀 그렇지만, 저 다섯 개 중에 유령이 빙의된 게 있다는 가정도 확실한 게 아니잖아."

그는 볼멘 소리로 투덜거렸다. 생각지도 못한 그의 지적에 레버는 입을 벌리고 머뭇거리는 꼴이 되었다.

"이건 솔직히 안 돼. 등장인물 중에 범인이 존재하고 있다는 걸 알고는 있어야 추리를 하든 말든 할 거 아냐. 지금은 뭔가를 시도하는 것 자체가 가망성 없는 일이야."

옳은 이야기였다. 레버에게는 그렇게 믿을 만한 사건이 있었지만, 그것을 곧이곧대로 얘기해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 유령이 알려줬다고 어떻게 말하겠는가? 그는 길게 고민할 여유도 없이 그럴 듯한 설명을 급조하여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 다섯 가지 물건이 왜 시체 옆에서 하나씩 발견됐는 지 생각해보라구. 들어 봐, 화이트가 빙의된 물건이 있어. 사람을 죽이려면 희생자 근처에 그 물건이 마땅히 있어야 하겠지. 그런데 화이트는 살인을 한 뒤에도 현장에서 도망칠 수가 없잖아? 시체 곁에 뜬금없이 그런 눈에 띄는 물건이 있다면 의심스러울 게 뻔해. 그래서 시체마다 하나씩 다른 하얀 물건을 심어둔 거야. 위장으로."

"오? 이야, 큰 기지 출신 요원은 역시 뭔가 다른데."

"추측일 뿐이야."

구멍 투성이 논리였지만, 클레멘스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레버의 추리를 의심치 않고 믿는 듯 했다. 그러나 레버는 스스로의 즉흥적인 발언으로 의혹만 더 깊어졌을 뿐이었다. 화이트가 무작위적인 희생자를 하얀 물건 곁으로 인도할 수 있다면, 다른 사람을 홀려 자신이 빙의된 물건을 집고 도망치게 만들 수도 있었을 것이다. 반대로 그녀가 하얀 물건을 시체 곁으로 옮겼다면 빙의체를 직접 움직이면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화이트는 일부러 도망치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레버는 어렴풋이 결론을 내렸다. 그녀는 즐기고 싶은 것이다. 다섯 물건 중에 무엇이 진짜일지 알아맞추도록 하는 어린애 장난 같은 게임을. 그리고 알아맞추는 건 레버 자신의 몫이었다. 말하자면 그녀가 그를 희생양으로 선택한 것이다. 미소짓던 유령의 모습이 그의 머리를 때리듯 스쳐지나갔다. 잘못 본 것이라고 할 생각은 없었다. 경험자로서 징조를 무시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래서 레버는 더욱 불안했다. 화이트를 보았다는 건, 그가 벌써 홀렸다는 얘기가 되지 않는가?

경악에 찬 표정으로 스스로의 목을 조르던 희생자의 사진들이 뒤이어 그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럼 됐네! 마지막으로 죽은 사람을 찾으면 되겠지."

레버는 자신의 시체 옆에서 하얀색 물건을 찾으려 뛰어다니는 클레멘스에 대한 상상을 애써 억눌렀다.

"하지만 못 찾았잖아. 우린 그 사람들이 동시에 죽었는 지 어쩐지도 못 알아냈어."

"그럼, 다시 원점이군."

클레멘스가 입을 오므리며 가볍게 말을 받았다. 예민해진 레버는 시종일관 진지해지지 못하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이런 쓸모 없는 작전 회의에 진저리가 났다. 차라리 윙크를 하지 않은 게 다행인가. 그는 테이블 위에 어수선하게 뒤섞여있는 종이들을 정리하기 시작하며 말했다.

"안되겠어, 역시 정보를 더 모아야할까봐. 실험은 나중으로 미루자고."

"그래,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

호감형이었던 첫인상이 흐릿해진 지금, 레버는 이제 환하게 웃는 클레멘스가 증오스러울 지경이었다. 자기가 해야할 일을 떠넘겨받은 사람을 앞에 두고 어떻게 저렇게 뻔뻔할 수가 있지. 맞은편의 남자는 좀 전과 딴판으로 의욕에 넘치는 얼굴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서고 있었다. 레버는 기분이 나빴다. 화이트에게 홀려버렸다고 말하면 그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마 예의 그 큰 눈을 더 키우며 바싹 다가와서 나를 앉히고 안전 격리 프로그램 따위를 조잘거릴 것이다. 그는 인상을 쓴 채 쓸데없는 생각에 빠져들었다.

그런데, 언제 홀린 거지?

"아, 클레멘스, 잠깐만."

"응?"

"혹시 근처에서 머리카락을 하얗게 물들인 여자 본 적 있어?"

"농담이지? 이봐, 하얀 머리가 인간하고 얼마나 안 어울리는지 모르고 하는 소리야?"

그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레버도 어색하게 웃으며 아무 것도 아니라고 대답을 얼버무렸지만, 그의 생각은 이미 '희생양'이라는 단어로 채워지고 있었다.

"일은 잘 되가나요, 신사 분들?"

웃음 소리를 듣고 하얀 의사 가운 차림의 여성이 미소지으며 다가왔다(레버는 어째서 직원들의 복장이 의사와 일치하는 건지 이해하지 못했다). 두 사람을 심사하듯 이리저리 번갈아보던 그녀는 고불거리는 짧은 갈색 머리카락를 만지작거리면서 고개를 약간 치켜들었다.

"보아하니 클레멘스가 또 손님을 난처하게 만든 것 같은데요?"

레버는 거의 그렇다고 말할 뻔 했다. 놀란 클레멘스가 엉거주춤한 자세로 그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뭐? 내가 언제?"

섀넌 허트가 얼떨떨한 표정의 클레멘스를 노려보았다.

"실험 계획은요? 놀 생각만 하고 일을 안 하잖아요. 베일리 씨가 그걸 모를 줄 알아요?"

"응? 오, 레버, 아니야."

그는 얼굴을 있는 대로 구기며 콧구멍을 벌름거렸다. 그러나 곧 빠르게 기가 죽으며 자백했다.

"미안해. 그게 사실, 맞아. 미안해."

"아니 아니, 괜찮아, 클레멘스. 지금 상황에선 나라도 딱히 할 수 있는 게 없었을 거야."

레버는 호탕하게 웃으며 안중에도 없는 말을 시원스레 해냈다. 섀넌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레버에게 시선을 돌렸지만, 그는 눈썹을 들어올린 상태로 고정시킨 채 자료만 정리했다. 표정 관리가 안 되는 클레멘스는 한 수 넘겼다는 표정으로 벌써 싱글거리고 있었다. 그녀가 한숨을 쉬었다.

"아무리 여기가 정식 기지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우린 요원이에요. 할 일은 해야죠, 클레멘스."

"알았어, 너무 그러지 마, 고민해볼게."

5개의 후보 중 진짜 SCP를 가려내는 실험은 그렇게 보류되었다. 세 사람은 그 자리에서 잠시 가볍게 떠들었다. 섀넌은 이번 사건에 대한 책임감 때문인지 레버가 리치먼드와 진행한 면담에 대해 계속 질문했고, 클레멘스는 두 사람의 대화에 건성으로 맞장구만 쳤는데 자꾸 시계를 쳐다보는 것으로 보아 다른 약속이 잡혀있는 것이 역력했다.

"그 다섯 가지 물건들을 여기에 계속 두고 있으려니 좀 소름이 끼치네요. SCP가 발동하는 조건을 어서 알아내야할 텐데요."

그녀가 주위를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다. 확실히, 언제 터질 지 모르는 폭탄을 지하에 쑤셔넣은 채 생활해야한다는 건 신경 쓰이는 일이다. 더군다나 폭발 범위를 모른다면.

"그렇습니다. 그걸 알아내야 최종 목표인 격리를 실시할 수 있게 되죠."

"베일리 씨는 이번 경우와 비슷한 사건을 경험해보신 적이 있나요?"

레버는 기억을 가다듬었다. 그는 재단에서 육 년이 조금 넘게 일했지만, 실제 SCP를 대면한 것은 오직 네 차례였고 그 중 유령에 대한 건은 딱 한 번 뿐이었다. 관련 항목 중 가장 흔한 경우인 원한령과 얽힌 것이었는데 어이없게도 그 유령은 조사 도중에 피해자가 시도한 민간 요법으로 퇴치되어 버렸다. 유령처럼 대중인지도가 높은 SCP에 대해서는 흔한 일이다.

"한 번 있긴 했습니다만, 이번 경우와는 많이 다릅니다. 그 때는 원한령이었기 때문에 굳이 발동 조건을 찾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피해자도 한정되어 있었고 행동이 예측 가능했죠. 하지만 이 사건은 그렇지가 않아요. 이번에 죽은 피해자들은 단순히 리치먼드 허드슨의 파티에 참석했다는 것 외에는 공통점이 없습니다. 화이트가 리치먼드의 원한령이라서 그에게 정신적 피해를 주려고 한 짓이었다면, 분명 이후에 그에게 직접 위해를 가하는 행동까지 보여줬어야 합니다. 게다가 원한령들은 물건에 빙의되지 않아요. 희생자에게 달라붙죠. 그런데 유치장에서 본 리치먼드는 그다지 괴로워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더군요."

"그러니까 원한령은 아니라는 거군요. 그럼 뭐죠?"

섀넌의 물음에 레버는 멋쩍게 웃으며 자신 없는 추측을 내놓았다.

"보통 물건에 빙의되는 유령은 주변의 환경이나 그 물건 자체에 애착을 가지고 있는 지박령입니다. 하지만 화이트는 어느 날 갑자기 리치먼드 앞에 나타났습니다. 그의 말로는 사교 파티에서 만났다고 하죠. 그렇다면 한 장소에 계속 머무르는 지박령이라고 할 수 없어요. 남는 건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는 부유령 뿐인데 물건에 빙의된 상태라는 건 애착이 너무 강해서 물리력까지 행사할 만한 경우이거나…… 누군가가 화이트를 강제적으로 봉인했을 가능성을 따져볼 수 있을 겁니다."

레버는 뒤이어 덧붙였다.

"사실 화이트가 물건에 빙의되었다고 확신할 수도 없지만요. 그렇다면 평범하게 사람들에게 해를 가하는 부유령이 되겠죠."

"너무 어렵네요. 그래도 범위는 좀 좁아진 것 같은데요?"

그녀가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레버는 얄궂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작은 희망을 깨뜨려서 죄송하지만, 이건 유령이라는 범주 내에서 얘기한 겁니다. 가시적인 부분은 유령과 비슷하지만 엄연히 다른 특성을 가진 녀석들도 있으니까요. 악마라던가. 아니면 물건에 빙의된 게 아니라 물건 자체에 이성이 생기는 도깨비의 경우를 생각할 수도 있겠고요. 아예 어떤 사념체가 집합해서 물건의 형태를 띄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죠."

"워."

눈앞이 핑 도는 클레멘스가 멍한 얼굴로 건조하게 내뱉었다. 섀넌의 표정도 따라서 침울해졌다.

"무슨 일을 하시는지 이제야 감이 좀 잡히네요. 머리가 터지진 않을까 내내 걱정하실 것 같아요."

"뭐, 모든 부분에서 완벽할 순 없어요. 적당한 선에서 놈을 알았다고 정당화하고 만족하는 것도 필요하죠."

"그래, 맞아. 우린 심지어 우리 뇌가 어떻게 활동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구."

정당화 학과를 전공하는 듯한 클레멘스가 숙련된 솜씨로 그럴 듯한 비유를 내세웠다. 레버조차 고개를 끄덕일 정도였다.

"그래도 발동 조건만큼은 어서 찾아낼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이 건물 안에서 누가 자살했다는 얘기를 듣고 싶진 않아요."

섀넌의 말에 레버는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이 고개를 들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래서 물어보고 싶은게 있습니다만, 섀넌, 최근에 머리를 하얗게 물들인 여자를 본 적이 있습니까?"

레버의 물음에 그녀는 눈살을 찌푸렸다.

"머리카락을요? 화이트를 말하는 건가요?"

"화이트라고? 이런, 그 소리였군. 난 자네가 길거리에서 웃기는 여자를 본 경험담을 얘기하는 줄 알았어."

섀넌이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는 듯 옆에서 끼어드는 클레멘스를 흘겨보며 대답했다.

"아뇨, 본 적 없어요. 그런 눈에 띄는 여자라면 기억했을 거에요."

레버는 약간 실망했다. 그렇다면 화이트를 본 건 정말 나 뿐인가? 어쩌면 분위기에 휩쓸려서 잘못 본 건 아닐까…….

"그렇군요. 우리들이 그 다섯 개의 물건들을 직접 봤다는 사실이 생각나서 말해본 겁니다. 당장 생각할 수 있는 발동 조건은 접촉 뿐이니까요."

"고작 그걸로 영향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우린 강화 유리 너머로 10m는 떨어진 곳에서 슬쩍 봤을 뿐이잖아."

클레멘스가 입을 가로로 길게 늘이며 말했다. 물론 그렇긴 하지. 레버는 불편한 마음으로 그 부분을 넘길 수 밖에 없었다.

"글쎄, 나도 그럴 거라고 생각하진 않는데. 일단 모르는 거니까. 아무라도 하얀 머리를 본다면 얘기해주세요."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레버는 빠진 것이 없는 지 파일을 확인하는 것으로 그들에게 대화의 끝을 알렸다. 그는 섀넌의 수고해달라는 인사를 받으며 다음 행선지를 결정했다.

'현장도 둘러봤으니, 다시 리치먼드를 보러 가야겠군. 이번엔 파티 상황을 제대로 들어봐야겠어.'

그 때 또 시계를 보던 클레멘스가 갑자기 탄성을 지르며 손가락을 튕겼다. 느닷없는 소리에 놀란 섀넌이 그에게 물었다.

"또 뭐에요, 클레멘스? 아까부터 시계만 줄창 보더니."

그가 씨익 웃었다.

"사람은 자고로 인내 뒤에 찾아오는 달콤한 시간을 즐길 권리가 있단 말이야."

레버와 섀넌이 눈을 둥그렇게 뜨고 클레멘스를 쳐다보았다. 그는 손가락 두 개를 관자놀이에 댄 뒤 두 사람에게 내보이며 인사를 보내고 몸을 돌려 로비를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목적지는 출구였다. 섀넌이 외쳤다.

"또 외출이에요?"

"데이트가 있거든."

그는 기어이 윙크를 했다.


리치먼드는 여전히 혈색이 창백했다. 그는 면담을 하고 싶지 않다며 레버를 돌려보내려 했지만, 정보가 필요한 레버로서도 양보할 수가 없었다. 그가 물러나지 않자 리치먼드가 얼굴을 구기며 어쩔 수 없이 자리에 앉았다.

"미친 연기를 하는 건 진이 빠지는 일이야." 그가 투덜거렸다.

"미안합니다, 허드슨 씨. 그렇지만 저도 이번 사건을 빨리 끝맺고 싶습니다. 오늘은 파티 정황만 듣고 돌아가겠습니다."

"좋아. 빨리 하지."

레버는 테이블 위에 녹음기를 꺼내놓고 경찰의 사건 보고서를 집어들었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리치먼드가 얘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저번에 찾아왔을 때 내가 말했었지. 화이트를 남에게 넘겨주는 게 파티의 목적이었다고. 외관 상으로는 우리 부부의 결혼기념일 겸 친목 도모 파티였네. 이 바닥이 어쩐지 자네도 짐작하겠지? 당연히 모인 사람들은 거기에 관심이 없었어. 나는 사업 관계로 그 동안 만날 일이 잦아질 레온 패럿과 케네디 스콧을 초대했네. 화이트의 소문을 듣고 어슬렁거리던 데이비드 샌들러라는 연예계 기자도 내가 초대했고. 삼류 놈이었는데 아마 놀랐을 거야. 얀은 화이트에게 푹 빠져서 안 그래도 들락날락하던 친구였고, 안나와 친척 관계였던 애쉬 허먼은 우리 부부의 돈을 상속받기 위해 무던히 애를 쓰고 있는 중이었네. 뻔뻔하게도 자발적으로 찾아왔지."

리치먼드는 눈을 감고 고개를 저었다.

"난 패럿이나 스콧 두 사람 중 한 명이 화이트를 데려가길 바랬지. 그럴 만한 여력이 됐으니까. 그리고 안 되더라도 샌들러가 기사를 뿌리면 누군가 그녀를 눈여겨보리라고 생각했네. 그것 말고도 진행되는 비즈니스는 있었지만, 어쨌든 거기까지 밝힐 필요는 없을 걸세."

"예, 알고 있습니다."

"파티는 원만하게 진행되었네. 난 패럿, 스콧과 좋은 거래를 성사시키기로 했고 샌들러도 내 쪽에 붙었지. 모두 즐거워했고 심지어 애쉬까지 여흥을 즐겼어. 그렇게 되기에는 화이트의 영향이 컸네. 그녀는 파티를 빛나게 만들었지."

레버는 눈썹을 곤두세웠다. 힐러리의 얘기와 다르다.

"모두 화이트에게 호감을 나타냈단 말입니까?"

"그 뿐인가? 그녀는 사람들의 혼을 온통 빼놓았네. 덕분에 자기한테 불리한 거래도 순순히 받아들이더군. 단지 나와의 대화를 끝내고 화이트에게 가기 위해서 말이야. 재미를 봤지."

"하녀는 어떻습니까? 그녀는 평소에 화이트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하셨는데."

"오, 힐러리도 그 날만큼은 잘해주더군. 교육을 제대로 받았어. 잘 처신했지."

지금으로써는 누구의 말이 진짜인지 알 수 없지만, 레버는 리치먼드가 화이트에게 내내 홀려있었다는 쪽에 무게를 두었다. 참석한 사람들이 당혹스러워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리치먼드는 보이지 않는 화이트를 옆에 끼고 다른 사람들도 그녀에게 관심을 보인다고 착각했다는 것이다. 아마 다른 두 명, 샌들러와 얀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가만…… 그럼 힐러리는 어떻게 화이트를 본 거지? 그녀도 홀려있었다는 얘기 아닌가?

레버는 테이블을 엎어버리고 싶은 마음을 조용히 참았다.

"하지만 그 분위기는 그렇게 오래 가지 않았네. 화이트는 얼마 가지 않아 2층으로 올라가버렸지. 그 때부터 모두 어색해지기 시작했어."

'그제야 현실을 본 거군.'

리치먼드에게서 화이트가 떨어지자 환상이 사라진 것이다. 레버는 일단 자신의 가설이 들어맞는 것 같아 안심했다.

"난 당황했네. 모두 시선을 피하면서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거든. 곧 나만 거실에 덩그라니 남게 됐지. 갑자기 피곤이 몰려온 나는 내 방에 올라가버렸네."

"올라가기 전에 하녀에게 화이트를 찾아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까?"

레버가 보고서를 확인하는 척 하면서 물었다.

"기억이 안 나는데. 그랬을 수도 있지. 계단을 오르면서 알아서 파티를 잘 마무리하라고 했던 건 생각 나네."

"그렇군요." 레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리치먼드가 레버에게 몸을 숙이며 뜸을 들였다. 레버가 의아하게 쳐다보자 그는 눈을 내리깔고 한숨 쉬듯 말했다.

"죽음이 시작된거야. 침대에 누워있는데 모두가 죽어가는 것이 눈앞에 보였네. 날 바라보면서 공포에 질린 채 자기 목을 조르더란 말이야."

"뭐라고요?"

리치먼드가 자신의 부릅뜬 두 눈을 가리키며 말했다.

"말 그대로,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장면이 이 눈앞에 환상처럼 나타났지. 환상이지만 환상이 아니었네. 실제로 벌어지고 있었으니까. 모두가 날 쳐다봤어. 그러면서 덜덜 떨리는 손으로 옷이나 넥타이로 목을 묶더군. 난 그것이 화이트의 시점이라고 직감했지만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었네. 몸이 움직이질 않았어."

그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잠시 아무 말이 없어졌다. 얼마 안 가 고개를 들며 치를 떠는 그의 모습은 레버가 예상한 것처럼 공포에 질린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분노한 상태였다.

"내 상황을 이해하겠나? 화이트가 사람들을 죽였네! 굳이 내 눈 앞에 모든 상황을 보여주면서까지 말이야!"

"허드슨 씨, 심정은 이해하지만 진정하십시오."

"그 년이 날 가지고 논 거야, 빌어먹을!"

"허드슨 씨."

"다른 때도 아니고 내가 주최한 파티에서 내 손님을 죽였어. 이건 날 무시하는 행위 ……. "

리치먼드가 거기서 문득 말을 멈추고 시선을 돌린 채 못 박힌 것처럼 꼼짝않았다. 기괴한 발언이었다. 레버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자 그는 눈을 깜빡거리며 변명하듯 중얼거렸다.

"화이트는 내 아내까지 죽였네. 자네가 그녀를 잡아줘야 해."

레버가 머뭇거리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리치먼드는 여전히 화가 난 상태로 방 한 구석을 노려보고 있었다. 레버는 망설이다가 면담을 끝내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끝났나?"

고개도 돌리지 않고 가시 돋친 목소리로 묻는 그의 질문에 레버는 오싹하며 그를 경계하는 눈초리로 쏘아보았다.

"예, 화이트를 꼭 잡아내겠습니다."

"그래주길 바라네."

리치먼드가 그제야 레버에게 눈을 돌리며 말했다. 곧 방을 나온 레버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잠시 문 앞에 서 있었다.
 

따로 명시하지 않는 한에서 이 사이트의 모든 콘텐츠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 라이선스를 따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