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4)

 
그는 여전히 기지의 로비 구석에 앉아있었다. 레버는 어떻게 해야할 지 몰라 난감했다. 그는 난관에 봉착했을 경우에 대한 요원 수칙에 근거하여 이제까지의 사건을 정리해보는 시간을 가졌는데, 무언가를 함부로 시도하기가 망설여졌던 그는 쓸모없는 정리법을 시도하면서 수첩의 페이지를 최대한 날리고 있었다. 그런데도 여백이 과하게 남았다. 정신자는 너무 어려운 소재였다.

자신이 그리 유능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그는 무식한 방법을 쓰기로 했다. 사건을 처음부터 순서대로 적어보는 것이다. 리치먼드가 화이트라는 어린 영화배우 지망생을 지인의 사교 파티에서 만났고, 집으로 데려왔다. 얼마 뒤 리치먼드를 제외한 파티 참가자들은 모두 정신적인 문제로 사망했다(미확인). 무례한 화이트의 환상에 시달리던 리치먼드는 화이트를 남에게 보내버리기 위해 사람들을 모았고, 거기서 또 사람들이 죽었다. 하지만 경찰은 화이트라는 여자의 흔적을 찾지 못했다. 그럼에도 살아남은 세 명이 그녀를 봤다고 증언했고, 그와중에 서로의 증언이 다시 엇갈리는 바람에 수사가 막혀버렸다. 혐의를 벗기 위해 리치먼드 허드슨은 미친 척을 하고 있었고, 하녀 힐러리 크래들의 증언은 데이비드 샌들러의 증언(미확인)과 부분부분 어긋났다. 샌들러는 만취 상태라고 했으므로 신빙성이 떨어지지만, 어쨌든 힐러리의 증언에서도 화이트라는 수수께끼의 여자는 등장했다. 냄새를 맡은 이곳 비공식 기지 요원이 보고서를 올렸고, 경찰에게서 수사권을 넘겨받았다. 곧이어 자문 역할의 지원이 요청되었고 레버가 출발했다.

그가 도착한 첫 날, 그는 비공식 기지의 인원들과 만나 개요를 듣고는 그들과 함께 SCP로 의심되는 다섯 가지 하얀색 물건들을 직접 확인했다. 구치소에 수감되어 있는 리치먼드를 만나 그가 미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을 들었고 화이트에 대해 설명 받았다. 이후 리치먼드의 저택 셔크 하우스를 방문하여 사건 장소를 돌아보았고, 화이트의 환상을 보았다(?). 다시 리치먼드를 만나 파티 정황을 들었다. 하지만 리치먼드의 정신은 이미 불안정해보였다.

화이트에 대한 증언들의 요지는 이렇다. 리치먼드는 사람들이 모두 화이트에게 친절하게 대해주었다고 했으며, 힐러리는 그녀를 제외하면 단 세 명만 그녀를 보았다고 얘기했다. 관계를 따져보면 힐러리의 증언이 옳고 리치먼드가 내내 환상을 보고있었다는 쪽이 타당하다. 이는 너무 뒤죽박죽이라 제대로 된 확인이 필요한 데이비드 샌들러의 증언 기록과도 통상적인 맥락에서 일치한다. 다만 힐러리와 샌들러도 화이트에게 홀려있던 건 마찬가지이므로 리치먼드만이 환상을 본 이유를 알아내야할 것이다.

사건 현장에서는 별다른 것을 찾을 수 없었다. 희생자들은 모두 스스로 목을 졸라 죽었으며 시체 옆에 하얀 물건이 하나씩 놓여져 있었다. 그것들은 얀의 트럼프 카드만 제외하고 리치먼드 허드슨의 소유였지만 모두 최근에 얻은 것이라고 한다. 대리석 조각상-사교 파티, 모비 딕-희귀본 수집 경로, 웨딩드레스-파티 전시용. 이것들의 출처도 조사해보아야 한다. 손수건은 흔한 것인데다 리치먼드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으므로 아무 것도 알아낼 수 없을 것이다.

모든 것을 써놓고 보니 해야할 일이 눈에 들어왔다. 확인하지 못한 증언들을 점검하고, 샌들러를 면담하고, SCP 후보들의 출처를 조사한다. 레버가 뿌듯해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자 그것을 본 섀넌이 다가왔다.

"진전이 좀 있었나 봐요."

흠칫한 레버는 재빨리 스크래치가 가득한 수첩을 덮었다.

"별로 진전이라고 할 것까진 없습니다. 그냥 정리해본 것 뿐이에요."

"그런 것치곤 너무 좋아하시던데요."

"음, 잘못 보신 겁니다. 섀넌, 그보다 저를 도와줄 사람이 한 명 필요한데요."

"클레멘스는 아직 안 돌아왔나요?"

"데이트하러 간 친구 말입니까? 글쎄, 아직 즐길 시간이 많이 남은 것 같네요."

"불만스러운 어조를 보아하니 많이 부러우신가 보네요."

"그럼요. 저는 귀신하고 사귈 판이니까요."

그는 잠시 지금 클레멘스가 겪고 있을 상황을 상상해보았다. 구 병원 로비 겸 대기실 의자 대신 공원 벤치에 앉아서 귀여운 여자 한 명을 붙들고 농담을 주절거리고 있겠지. 그러고 나서 레버는 클레멘스의 자리에 자신을 넣어보았다. 여자랑 단 둘이 벤치라. 무슨 말을 해야할 지도 모르는 채 허둥거리겠군. 생각만 해도 한심스러웠다. 당황해하는 그를 보며 상상 속의 여자가 싱긋 웃었다. 어디서 본 여자 같은데…… 부동산 사무소에서 본 그 여자? 그건 원피스 차림의 머리를 푼 캔버스였다.

왜? 왜 캔버스가 지금 생각나는 거지?

레버는 고개를 절레절레하며 대화 상대에 집중했다. 섀넌이 어느 새 탁자에 걸쳐앉으며 로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의자에 앉아있던 레버도 그녀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제가 사과드릴게요. 클레멘스를 너무 나쁘게 생각하지 마세요."

"확실히, 일할 때는 도움이 안됐죠."

레버가 실없이 말했다. 섀넌도 시름없이 웃었다.

"원래 그렇게 의욕 없는 사람은 아니었대요. 그러니까 일에 대한 부분에서요. 오히려 신참 때는 누구보다 참견을 많이 했다나. 이곳에 처음 올 때는 환상이 있잖아요, SCP를 쫓는 특수 요원이라는 거."

"무슨 일이 있었죠?"

"그 환상이 독이 된거죠. 정확히 무슨 일을 겪었는 지는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큰 충격을 받았나봐요. 클레멘스는 요원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여기 상주 요원으로 전근을 요청했어요. 이런 구석진 곳에서는 SCP를 다루는 일도 자주 없을 테니까요."

그녀는 눈을 내리깔았다. "사실 이곳에서 근무하는 직원들은 다 비슷한 경우에요. SCP가 두려워졌거나 기가 질려버린 거죠. 현실에서 마주하고 보면 결국 환상은 환상이라는 걸 깨닫거든요. 후회하고 되돌아갈까 하지만 그러기도 망설여지죠. 환상의 잔재라던가, 직장을 전전하는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도 피하고 싶다던가, 이유는 여러가지겠지만. 바깥도 여기만큼 불확실한 곳이니까요. 그러면 여기 오는 거에요."

레버는 잠시 무슨 말을 해야할 지 머뭇거렸다.

"섀넌 씨도 마찬가지입니까?"

그녀가 대답이 없자 레버는 방금 한 말에 후회가 막심했다. 그는 대화가 어색하게 끊기지 않도록 아무렇게나 주절거렸다.

"사실 당연한 일입니다. 제정신으로 재단에서 일하는 건 말이 안되는 일이죠."

"그런 말은 자주 들어봤어요. 그렇지만 베일리 씨는 그동안 들어왔던 본부 직원들하고는 다른데요."

"예? 본부요?"

그는 또 바보같이 말했다. 섀넌이 그를 쳐다보았다.

"정식 기지요. 큰 거. 거기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라면 전부 정신병자처럼 들리던데, 베일리 씨는 정상이잖아요."

그녀의 말에 레버는 '박사 괴담'을 떠올리며 웃었다.

"사실, 그게 맞습니다. 저는 운이 좋았던 거고요."

그는 다시 로비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저도 동료들이 이해가 안 가는 행동을 하는 걸 많이 보아왔습니다. 하지만 그게 버티기 위해서 하는 일이라는 건 알고 있어요. 나름대로 투쟁하는 거죠. 굳이 재단의 직원이 아니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 마음 속에 이겨내야할 대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레버는 자신이 하는 말을 들으면서 스스로 당황했지만, 그럼에도 그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각자가 품은 적들은 모두 다르기 때문에 남들은 저마다의 싸우는 방식에 공감할 수가 없죠. 그러니 정신병자처럼 보이는 게 아닐까요."

섀넌이 레버를 빤히 바라보았다. 자기도 모르게 낯 뜨거운 발언을 해버리고 만 레버는 그녀의 시선을 느끼면서 그녀가 아무 말이나 어서 해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얘기하시니 쉽게는 아니더라도 이해가 되네요. 운이 좋았다는 건 무슨 뜻이죠?"

"……제 말도 안되는 논리에 따르면 아직 원수를 만나지 못했다는 얘기가 될 것 같은데요……. 그럴 만한 사건을 겪지 못했으니 이렇게 쉽게 말할 자격도 없겠지만요."

레버는 그렇게 말했지만, 섀넌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말도 안되지 않아요. 오히려 베일리 씨는 이미 이겨내신 게 아닐까요."

"예?"

그가 얼떨떨하게 되묻자, 섀넌은 웃으며 딴 소리를 했다.

"그럼 클레멘스는 용서받은 건가요?"

"클레멘스요? ……제가 그동안 말을 어떻게 했는진 몰라도, 사실 원래부터 싫어하지도 않았습니다. 일 안 도와주는 친구야 이미 익숙하고, 클레멘스는 더욱이 재밌잖아요. 이제 사정도 알았으니 미워할 이유는 더더욱 없는 거죠."

"정말이세요?"

"정말입니다."

그는 솔직하게 말했다. 이렇게 말해놓고 보니 일전에 화이트에 대한 걱정으로 클레멘스를 원망한 일이 생각나-물론 그럴 자격은 충분히 있었다- 레버는 약간 부끄럽게 생각되었다. 섀넌이 약간 상기되어 고개를 숙였다.

"사실 저희들이 그동안 도움이 되지 않아서 좋지 않게 생각하실까봐 걱정했어요. 좀 비겁하게 클레멘스를 끌어다오긴 했지만…… 저도 마찬가지였으니까요."

생각지도 못한 말에 레버는 눈을 깜빡였다. 그는 섀넌을 바라보다가─ 어색하게 웃으며 신경쓰지 말라는 클레멘스의 손동작을 해보였다.

"괜찮습니다. 정말로요. 뭘 해야 할지 아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라는 걸 저도 아니까요. 저도 방금 전에야 겨우 결정한 걸요."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요."

별로 한 말은 없었지만 레버는 왠지 어려움을 해결해준 상담사 같은 기분이 되었다. 두 사람은 잠시 무기력한 사람들이 목적 없이 걸어다니는 로비를 바라보았다. 레버는 그들이 다시 싸울 용기를 낼 수 있을까 생각하면서, 섀넌도 지금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임을 느꼈다. 그리고 자신의 경우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지금 보고 있는 사람들과 자신이 별반 다를 것 없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거울을 보며 흠이 있지 않나 찾아보는 마음으로 계속 그들을 보고 있었다.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거지?

"어, 섀넌. 아까 제가 절 도와줄 사람이 한 명 필요하다고 했는데."

"아, 죄송해요. 무슨 일이죠?"

"리치먼드의 증언을 확인해줄 사람이 필요해요. 그가 화이트를 만났다고 하는 그 사교 파티의 참가자들이 정말 모두 죽었는지, 어떻게 죽었는지 알아보려고요."

"아, 그건 클레멘스가 돌아오면 일러둘게요. 취조 정도는 클레멘스도 할 줄 알 거에요."

"그리고 혹시 괜찮다면, 여기 사람들을 모아서 지금 보관 중인 SCP 후보들의 출처를 조사해주실 수 있나요?"

"그럼요. 어딜 조사하면 될 지 알려주세요."

"나중에 정리해서 드릴게요."

레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가시게요?"

"샌들러의 증언을 확인하러 갑니다. 경찰들이 일을 제대로 안 해놔서……."

그는 머리를 저으며 혀를 찼다. 섀넌이 웃었다.

"그렇군요. 그렇지만 어쩔 수 없죠, 뭔가 해보기도 전에 우리가 수사를 도중에 중지시켜 버렸으니. 그 사람들도 불만이 많을 거에요."

"예?"

뜻밖의 말에 레버가 어리둥절하며 그녀를 쳐다보자 그녀도 당황하여 되물었다.

"네?"

"경찰이…… 기본적인 조사도 안 했다는 말입니까?"

"어…… 네…… 못 한 거죠. 검시도 못 했죠."

"뭐라고요?"

"그러니까 사건 현장 사진을 찍고 목격자들을 한 번씩 취조한 것 외에는……."

그가 얼빠진 목소리로 물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네?"

초두의 충격이 두 사람에게 구멍을 뚫고 지나간 후, 그곳에 당혹감이 들어서며 그들의 얼굴을 시뻘겋게 덥히기 시작했다.

"……그게…… 사건 소식을 듣고 클레멘스가 펄쩍 뛰었어요. 현장을 보존해야한다면서…… 경찰한테 달려가서 수사권을."

섀넌이 난처한 기색을 보이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레버는 이 때는 무슨 말을 해야할 지 고민하면서 심각해진 얼굴로 침묵을 지켰다.

"죄송해요, 알고 계시는 줄 알았어요. 이런 일이 처음이라 다 이렇게 하는 줄로만……."

그가 가만히 서있기만 하자 시간이 지날수록 섀넌은 어쩔 줄 몰라 했다. 보다 못한 레버는 무어라 타박하는 대신 이 기지에 온 이후로 몇 번이고 말했던 단어를 다시 뱉어내며 상황을 정리하기로 했다.

"괜찮습니다. 어쩔 수 없죠. 지금이라도 재수사를 하면 됩니다. 취조는 이미 거의 다 끝났으니 검시와 인물 수사를 요청하세요. 일주일도 안 됐으니 절대 늦은 게 아닙니다. 경찰이 항의해도 적당히 둘러대면 됩니다. 아시겠어요? 그들은 어쨌든 우리들을 정부 기관으로 알고 있으니까요."

"그럴게요. 정말 죄송해요."

"괜찮다니까요, 클레멘스에게도 뭐라고 하지 마세요. 크게 잘못 행동한 것도 아닙니다."

레버는 그렇게 말하고 허탈하게 웃으면서 기지를 나왔다. 이 정도면 클레멘스를 탓해도 될 정도로 어이가 없는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정말로 무언가가 크게 틀어진 것도 없었다. 어차피 해야할 일은 변하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어쨌거나, 눈치채지 못한 자신의 잘못도 있지 않겠는가? 그렇게 빈약한 경찰 조서를 보고도 단순히 난관에 봉착한 수사관들이 손을 놓았다라고만 생각하다니, 기본적인 조사만 끝마쳐도 그보다는 두꺼운 보고서가 왔을 것이다. 그래, 괜찮다. 하지 못했던 검사를 이제 와서 실시한다고 해서 결과가 변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레버는 불안감을 지우지 못했다. 이제 완전히 배제하고 있던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어진 것이다.


저녁이 깊어갈 즈음에 도착한 주점은 늦은 밥을 먹는 사람들과 하루종일 자리를 꿰차고 술을 마시는 사람들이 뒤섞여 언제나 그렇듯 시끌벅적했다. 레버는 큰 노력 없이도 바 정중앙을 차지하고 앉아있는 퉁퉁한 남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너저분한 베이지색 양복 차림의 등 뒤에서 그의 이름을 부르자 데이비드 샌들러는 고개를 들며 레버를 향해 약간 흐릿한 눈을 돌렸다. 레버는 그의 기대를 저버리고 벌써 취해버린 샌들러 옆에 앉았다.

"먼저 먹고 있어서 미안하게 됐습니다. 수사관 씨도 주문하시죠."

"아닙니다." 레버는 바텐더를 부르려고 팔을 번쩍 치켜든 샌들러를 제지했다. "근무 중에는 술 안 마십니다. 저녁도 먹었으니 얘기만 하다가 갑시다."

"뭐, 마음대로 하십쇼."

샌들러는 자기 앞에 놓인 스파게티인지 뭔지 모를 음식을 입으로 가져갔다.

"무슨 일입니까?"

"취조를 한 번 더 하는 겁니다. 전화로 얘기드렸을 텐데."

"아니, 그러니까 왜 그걸 여기서 하냔 말입니다. 경찰서로 출두해야하지 않나?"

레버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상관 없지 않습니까. 당신 입장에서야 더 편할 테고."

"상관이 없긴, 당신이 누군 줄 알고? 당신이 수사관을 사칭한다면 나로서는 얘기를 들려줄 의무가 없지. 안 그래요?"

몸은 취했어도 잔머리는 여전히 굴러가는 샌들러가 뭉툭하게 살집이 오른 손으로 바를 툭툭 두들겼다. 비위가 상한 레버가 가짜 신분증을 꺼내기 위해 재킷 안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자, 이번에는 샌들러가 제지했다.

"있어 봐. FBI 신분증 같은 거 꺼낼 생각은 하지 마세요. 어차피 그런 거 들이대봤자 난 진짠지 구별 못한다고."

"그럼 어쩌라는 말입니까?"

"날 경찰서로 데려가던가, 법원 명령서라도 눈앞에 내밀던가, 그것도 싫으면 내 입을 열게 할 방법을 알아서 잘 생각해야죠."

레버는 한숨을 쉬었다. 돈을 달라 이거군. 그의 기를 죽이기 위해 정말로 경찰서로 데려갈 수도 있겠지만, 수사권을 빼앗긴 경찰은 레버에게도 호의적이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다시 팀을 조직하고 자료를 분류하고, 또 어쩌면 그걸 자신에게 건네주는 것을 질질 끄는 걸 포함하는 잡다한 절차들을 처리하려면 시간을 너무 많이 들여야했다. 잠시 대화의 전개를 예상해보다가, 그는 지레짐작으로 그가 수긍할 법한 카드를 내밀었다.

"당신이 지금까지 먹어치운 밥값을 내가 대 드리죠."

"그거 좋군."

샌들러는 즉시 바텐더를 불러놓고 비싼 술을 주문하기 시작했다. 레버의 차가운 시선에도 아랑곳않고 그는 뒤이어 이 주점에서 가장 좋은 음식들을 달라고 말했다.

"작작 하시고 이제 대답하세요. 리치먼드 허드슨의 파티에는 어떻게 초대받게 되었습니까?"

"허드슨 씨가 초대했죠."

"그 전에는 리치먼드 허드슨과 안면이 있었습니까?"

"아니, 그 날 처음 봤습니다."

"몇 시에 도착했죠?"

"기억 안 납니다."

샌들러는 고의적으로 스파게티를 쩝쩝거렸다. 레버는 약간 목소리를 높였다.

"대략 몇 시 쯤입니까?"

"일곱 시 사십팔 분 오십구 초."

"뭐라고요?"

"아니, 사십팔 시 일곱 분 구십오 초."

"이봐 잠깐만."

레버가 노려보자 샌들러가 껄껄거리며 숨넘어갈 듯 웃기 시작했다. 그는 큰 키를 이용해 비웃는 눈빛으로 레버를 내려다보면서 자신이 가진 권력을 한껏 즐겼는데, 그건 큰 실수였다. 그러는 동안 레버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 그는 짐작도 못했을 것이다. 사회 초년생 시절 덕분에 길바닥 친구들에게 이미 도가 튼 레버였는데 하물며 이 남자는 양복쟁이였다. 그것도 취재 대상을 잃어버려 잘리기 직전인 술에 취한 기자였다.

"어쩌시게요, 자칭 수사관 씨? 내 얘기를 듣고 싶으면 잠자코 있어야지."

"적어도 얘기는 해줘야 참지요."

그가 다시 껄껄거리기 시작했다. 샌들러가 웃음을 멈추기를 기다리고 싶지 않았던 레버는 마법의 단어를 사용하기로 했다.

"화이트 양을 보았습니까?"

짐작한대로 그는 곧장 관심을 보였다.

"화이트 양? 당연한 말씀을. 그 파티에서 불쌍하게 외톨이 취급받던 아가씨. 리치먼드가 나보고 잘 봐달라고 했다구. 지금도 수십가지 관용구가 떠오르지─ 비련의 여주인공, 진흙 속의 진주, 백의의 천사, 하얀 정점…… 아 이건 저격수던가. 어쨌든 파티는 그녀를 위해 존재했고 우리도 그녀를 위해 존재했지. 그 순간만큼은."

"파티를 시작한 뒤로 무슨 행동을 했습니까?"

"완전 취했지."

"그게 답니까?"

"어쭈, 기어오르려고 하시네."

"돈 받기 싫으면 그만두시죠."

"계산 먼저 하면 얘기해주지."

레버는 지갑을 꺼내 재단에서 받은 경비용 신용 카드를 집어던졌다.

"이걸로 계산을 하던 말던 마음대로 하시고 대답이나 하세요."

"이 녀석이 정지된 건지 어쩐지 내가 어떻게 알지?"

그가 비열한 눈빛을 내보이며 하는 말에 레버는 진저리가 났다. 그는 이번 취조에서 단 한 가지만 확인하기로 목표를 수정했다. 진위를 분별하기 힘든 샌들러의 취조 기록에서 발견했던, 결정적인 대목 딱 한 가지만.

"이것만 답변해주면 기꺼이 알려드리죠. 화이트가 2층으로 올라간 뒤, 당신과 하녀 그리고 리치먼드는 무슨 행동을 했죠?"

"이런 거 말고, 현금으로 내 놔." 그러면서 샌들러는 이미 신용 카드를 주워 주머니 속에 집어넣고 있었다.

"아직 갈 길이 멉니다. 벌써부터 모든 걸 뱉어놓을 순 없지 않습니까? 하나하나씩 하죠. 협상합시다."

"협상? 좋아─ 좋아! 웃기는 제안이군. 좋아, 손해 볼 거 없지."

"그럼 먼저 대답하세요. 화이트가 2층으로 올라간 뒤에, 파티에서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세 명은 뭘 했습니까?"

"하녀는 모르겠고, 난 그녀를 따라 2층으로 올라갔지. 거기서 같이 떠들었어."

"리치먼드는요?"

"뭐, 집 안 여기저기를 들쑤시고 다니던데.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화이트 양을 찾는 것 같았는데, 나하고 화이트 양하고도 마주쳤는데도 눈치를 못 채더군."

이런 제길.

"고맙군요. 끝났습니다."

"뭐라고?"

샌들러의 얼굴이 기가 막히게 일그러졌다.

"법적으로 골치 아픈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으시면 아까 준 카드 돌려주시죠."

"이 빌어먹을 사기꾼 자식! 법적으로 골치 아프게 생긴 건 네놈이지, 가짜 수사관 자식아!"

"뭐라고요?"

"네 놈을 당장에 경찰에 갖다바치기 전에 돈 내놔, 개자식아."

"제가 수사관이 아니라는 걸 어떻게 알았죠?"

"멍청한 자식, 누가 그걸 모를 줄 알아? 병신 같은 놈. 자기 돈을 내 가면서 경찰서를 피해놓고 어줍잖은 공갈이 먹힐 거라고 생각했냐?"

"아니, 하지만 적어도 이렇게 해줄 거라고 생각했지."

레버는 샌들러의 턱에 주먹을 날렸다. 예상치 못한 기습에 샌들러가 비명을 지르며 나가떨어지면서 주점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술에 취한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기 시작하면서 그들 주위로 금세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샌들러가 비틀거리면서 중심을 잡는 동안 레버가 그의 다리를 걷어찼다. 그가 거꾸로 자빠지자, 평범하게 밥을 먹으러 왔던 사람들이 휴대폰을 꺼내들기 시작했다. 레버가 꿈틀거리는 샌들러 앞에 수그려 앉았다.

"카드 내 놔."

"염병할, 빌어먹을 자식! 고소할 테다! 이런 짓을 해놓고 무사히 넘어갈 거라 생각하지 마!"

샌들러가 소리를 빽빽 질러댔다. 레버는 재킷 안주머니에서 아까 꺼내지 못 했던 신분증을 끄집어내 그에게 보여주면서 냉소적으로 말했다.

"이거 보이지? 이건 폭행 면허야. 네가 암만 주접을 떨어도 난 안 잡혀가. 알았으면 카드 내 놔."

"개 같은 새끼─"

그는 어깨를 얻어맞고 다시 바닥에 쳐박혔기 때문에 말을 끝마치지 못했다. 레버는 자기 사물함에서 물건을 꺼내듯 자연스럽게 그의 주머니를 뒤적거려 신용 카드를 되찾았다. 그리고는 일어나 동영상을 찍고 있던 사람들을 모아놓고 자신의 이름-물론 가명이었다-이 쓰여진 신용 카드와 신분증을 보여주며 그것을 지우라고 조용하게 타일렀다. 겁을 냈든 어쨌든 간에, 모두가 그의 말을 들었고 일은 좋게 해결되었다.

"제기랄, 내가 화이트만 찾아내면 아주 승승장구할 거라고, 그렇게 되면 넌 끝났어! 어떤 손해를 치르더라도 네 놈을 잡아넣고 말겠어!"

레버는 주점을 나왔다. 물론 계산도 하지 않았다.


간수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레버를 맞았다. 이번에는 아무런 절차도 없이 무턱대고 찾아왔기 때문인데, 레버는 급하게 확인해야할 부분이 있다며 그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간수는 잠시 고민하다가 어차피 공식적으로 수감 중인 죄수도 아니므로 리치먼드 허드슨과의 면담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현명한 결론을 내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레버를 막아선 까닭은, 지금 리치먼드의 상태가 상당히 바람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베일리 씨, 지금은 상황이 많이 곤란합니다. 한 번 보시면 알겠지만……"

"그러니까 보게 해 주시죠.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상황을 잘 모르시는 것 같은데 허드슨 씨는 지금 상당히 불안정한 상태입니다." 간수는 눈을 깜빡거렸다. "방금 전까지 완전히 이성을 잃었던 것 같아요. 이제 간신히 진정됐는데 선생께서 갑자기 이러시면……."

"고생이 심하신 것 같은데 정신병원에 넣으시는 게 어떻습니까?"

"아니, 당장 보호자 문제도 그렇고 어떻게 손 쓸 도리가……"

"이번 일이 끝나면 구실이 생길 겁니다."

레버는 간수를 지나쳤다. 이번에는 그도 구태여 막지 않았다.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소리를 지르세요." 그는 자포자기하며 말했다. 레버는 감사를 표하고 문을 열었다.

그가 순간적으로 멍해진 건 당연한 일일 것이다. 방 안은 온통 새하얀 칠로 뒤덮여있었다. 벽이며 탁자, 심지어 침대에까지도 온통 거칠게 뿌려진 하얀색은 그의 등골을 서늘하게 만드는 데 충분했다. 이리저리 혼란스럽게 눈을 돌리는 레버 앞에 리치먼드가 앉아 있었다. 맞은편의 그 의자에 앉아 가만히, 탁자 위에 손을 깍지 끼고 올려놓은 채 미동도 하지 않는 리치먼드는 여전히 벽 한구석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켜보고 있던 간수의 예상과 달리, 레버는 문을 닫고 천천히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의 발치에 굴러다니는 새빨간 소화기가 방을 둘러싸고 있는 핏기 없는 유령의 출처를 짐작게했다.

레버는 녹음기를 켰다.

"리치먼드."

그가 이름을 불러보았으나 리치먼드는 벽을 쳐다보는 데 방해된다는 듯 인상을 찌푸릴 뿐이었다.

"거짓말을 하셨더군요. 당신은 화이트가 없어진 뒤 침실로 향했다고 말했지만 그러지 않고 집안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는 증언이 있었습니다."

리치먼드는 화내는 것을 참는 듯한 표정으로 대꾸하지 않았다. 레버가 조심스럽게 그의 앞에 앉았다.

"저는 레버 베일리입니다. 기억하십니까?"

"그녀는 계속해서 날 괴롭혔지. 어떤 짓을 해도 그녀를 손에 넣을 수 없었어."

리치먼드는 아무렇게나 뱉어내는 목소리를 냈다. 갑자기 시작된 그만의 얘기는 레버의 말을 들었는지조차 의문스럽게 했다.

"화이트 말입니까?"

"화이트라고? 그렇군. 흰색이 뭘 의미하는지 알아. 흰색은 순수함을 뜻하지. 그녀는 순수함 그 자체였군."

그는 갑자기 언성을 높이기 시작하며 레버 어깨 너머의 벽을 쏘아보았다.

"순수함이라고? 아니, 화이트가 상징하는 건 그런 게 아냐. 흰색은 모든 빛을 반사시키는 색이지. 그녀는 아무에게도 자신에게 닿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어. 그럼 내가 그녀에게서 볼 수 있는 게 뭐라고 생각하나?"

레버는 목적지 없는 질문에 답변할 것을 망설이다가 침묵을 지켰다. 리치먼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녀에게서 튕겨져나온 나는 정말이지 지독하게 추악하더군. 난 정복욕에 휩싸여 스스로 제동을 걸지 못하는 괴물이었어. 그녀는 그런 식으로 내가 이제껏 이룩해온 사업, 재산, 성공, 모든 것을 욕했지. 그녀는 날 깔봤어. 이번만큼은 뛰어넘을 수 없을 거라고. 내 길은 막다른 길이고, 이게 날 막아선 마지막 벽이라고." 그는 이제 씩씩거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그녀를 떼어내어 당당히 이겨내는 모습을 보여주리라 결심했지. 이기고야 말겠다고 결심했어. 이제껏 수많은 역경을 헤쳐나온 내가, 수없이 많은 고난을 이겨낸 내가 그 따위 여자 한 명에게 당할 테냐?! 날 멈춰 세운 벽을 부수고, 길이 막혔다면 길을 뚫겠어. 내 도로는 끊기지 않을 거야! 누구도 날 막지 못해!"

"그래서 당신이 사람들을 죽였습니까?"

리치먼드가 갑자기 레버에게 고개를 돌렸다.

"한 남자가 있었지."

그는 눈동자에 불을 튀기며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그는 자기가 '아무도 아니'라고 하더군. 그는 초자연적인 현상을 격리하는 단체에 대해 알려줬지. 그래서 나는 계획을 세웠어. 사건을 벌여서 그녀가 그 단체의 손에 떨어지게 만들도록. 더 이상 날 막을 수 없게. 시선을 끄려면 일을 크게 벌여야했지. 이제까지 내가 다른 영역을 정복할 때 으레 그러듯 말이야."

"그래서 사람들을 죽이고 자살한 것처럼 꾸몄습니까?"

"그건 성공적이었어. 그녀는 내게서 도망쳤고 나는 승리했지. 또 한 번 전쟁에서 승리했단 말이야! 그런데 네놈이……"

그는 뚫어져라 레버를 쳐다보며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위험을 직감한 레버도 천천히 일어섰다.

"네놈이 그 빌어먹을 다섯 장의 사진을 꺼내놓았을 때, 네 뒤에서 그녀가 나타났다. 날 조롱하며 다시 비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단 말이다! 내가 그 다섯 명을 목 졸라 죽일 때만 해도 그런 건 없었어. 하얀색 물건들이 시체 옆에서 하나씩 발견되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내가 무슨 기분이 들었을지 네놈이 알기나 해?!" 그는 다시 벽을 쳐다보기 시작했다. "너는 날 가지고 놀았을 뿐이야! 내가 그건 단순히 그녀의 작별 인사일 뿐이다, 네놈 따위에게 붙잡힐 리 없다는 야유를 보냈을 뿐이다라고, 수없이 되뇌이며 마침내 평안을 얻으려는 그 순간에 네놈이 꺼낸 사진 때문에 나는 다시 그녀와 재회했다. 치욕스러운 조롱을 받으면서! 나는 내 아내와 동료들을 희생했는데도 그녀의 벽을 넘지 못했어. 그래, 난 오로지 내 성공을 위해 그들을 죽일 수 있었던 괴물이었어. 너는 성공적으로 증명해냈다. 그리고 네놈 뒤에서 여전히 비웃고 있구나……!"

레버는 건너편의 뒤가 막힌 창문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보고 뻣뻣하게 굳었다. 자신의 뒤에서 하얀 머리카락의 여자가 미소짓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 순간 뒤돌아본 그는 자신 뒤편의 벽에, 그러니까 리치먼드가 쏘아보는 곳에 여성의 형상이 그려져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리치먼드를 피해서 가까스로 문을 열고 방을 빠져나왔다.

밖에서 모든 것을 듣고 있던 간수가 얼빠진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레버는 그에게 녹음기를 건네주고 구치소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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