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27일 오후 9시 58분
평가: +4+x

눈이 왔다. 구름은 네가 감히 나를 능멸하는 것이냐, 하고 자신의 얼어붙은 몸을 던져대었다. 대지는 절망스러운 표정으로 그 무참한 폭력을 감당했다. 내려간 기온은 가지들에 쌓여 백색으로 빛났다. 날씨에 힘입어 조금은 탈색된 콘크리트의 우울함이 기지 안을 가득 채웠지만, 그때의 나는 그런 걸 감상할 여유가 없었다.

"자. 힘들게 구해 온 거에요. 들어가기 전에 먹어요."

"혼수상태에 빠지는 대가가 490원짜리 아이스크림이라니, 너무한 것 아닙니까?"

나는 한차례 투정을 부리고 실험을 담당하는 연구원이 구해다준 아이스크림의 포장을 뜯었다. 옛날에는 진짜 죽어라고 먹어댔었는데. 내 얼굴에 미묘한 표정이 달려가는 걸 본 것인지 연구원이 옆에서 위로했다.

"걱정마세요. 어디 미국에 있는데랑 다르게 적어도 죽지는 않잖아요. 혼수상태에만 빠질 뿐이지."

나는 대답하지 못하고 아이스크림을 한 차례 베어물었다. 내 이빨은 그 피부를 찢고 들어가 안에 흔적을 깊게 남겼다. 얼어붙은 살점과 녹기 시작한 핏방울이 목구멍 속으로 넘어갔다. 나는 그 모두를 감로수를 받아먹듯 삼켰다. 한 입. 목구멍 아래로 한기가 사라져갔다. 아이스크림의 육체를 게걸스럽게 부숴버린 나는 조금 꺼림칙한 목소리로 연구원에게 말했다.

"다녀오겠습니다. 혼수상태에서 깨어나면 뵙죠."

나는 문을 조심스럽게 밀고 격리실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625-KO, 예의 '그 뱀'이 있었다. 능구렁이는 혓바닥을 끊임없이 날름대며 나를 바라보았다. 이미 여러번 경험했던 일이었음에도 그 혓바닥의 출입은 내게 무언가 꺼림칙한 느낌을 주었다. 외모는 뱀임에도 뱀처럼 보이지 않았고, 꼬리가 잘려있음에도 아파 보이지 않았다. 그는 나를 잠시 바라보더니 망나니가 사형수에게 칼을 내려치듯 내 팔에 달려들고야 말았다.

뱀의 이빨은 내 피부에 낸 상처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영혼에 낸 두 개의 구멍으로 뱀은 자신을 우악스럽게 밀어넣었다. 난 밀려오는 고통을 참지 못하고 혼수상태에 빠졌다.


아침이다. 햇살이 반쯤 무너진 천장 아래로 내려온다. 건물의 몸을 이루던 콘크리트가 온기를 받아 그 사실을 내게 알려주었다. 아까보다 밝은 어둠도 도움이 되었다. 나는 눈을 떠 볼까, 하다가 이내 포기했다. 살아생전 이 이상 게을러본 적이 없다. 조금은 더 게을러도 되겠지. 널부러진 다리 아래로 물이 스멀스멀 차올랐다. 내 방은 가끔 비라도 심하게 내린다 하면 물이 주룩주룩 샜다.

비가 오고 있는가.

저도 모르게 초심을 잃어버린 나는 눈을 떠버렸다.
왼손은 여전히 감각이 없다. 철근이 왼쪽 어깨를 꿰뚫고 팔꿈치 아래로는 모조리 돌 아래에 파묻혀있음에도 신경다발이 내지르는 생명의 고동은 뇌하수체에 닿지 않았다. 어쩌면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팔이 죽어버렸는지 모른다. 이왕 망가질대로 망가진 몸, 고통을 알려주기 싫었던 신경조직의 숭고한 희생인가. 하지만 나의 왼팔은 내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기생충마냥 썩어문드러지기 시작하는 그 몸을 내 상체에 꼭 붙여버리고 놓지 않았다. 잘라버리고 싶었지만 도구가 없다. 스스로 왼팔을 뽑을 기력은 없었기에 나는 몇번 힘쓰는 시늉이나 하고 노동을 거부했다.

원산은 지옥이었다. 또한 천국이었다. 밤이 새도록 왼팔을 자르기 위해 애쓰던 내게 미군은 노동요를 선물했다. 폭탄이 터지는 소리, 비행기가 날아오는 소리,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 불타는 소리, 비명. 여러가지가 뒤섞여 하나의 노동요가 된다. 폭격기는 어린이들을 눈 앞에 둔 엿장수이기도 했다. 엿장수의 가위질소리가 나면 사람들은 무언가를 바쁘게 바치고 평안을 얻어간다. 보통 그것은 청각이나 시각이었지만, 때로는 목숨이기도 했다. 평화 속에서 온 사람들에게 이 땅은 지옥이지만, 이 땅에 살던 자들에게 이곳은 천국이리라. 나는 다시금 쏟아지는 수마를 이기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버텨보려는 내 정신의 한 가닥을 붙잡고 이리저리 흔들리던 나는 어디선가 들려오는 비행기 소리에 손을 놓아버렸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밤이었다. 입술은 이미 메마른 지 오래였다. 다리는 차오른 물에 퉁퉁 불어 그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었다. 목구멍을 타고 삐져나오려는 갈증을 처넣기 위해 몸을 한껏 구부려 물을 마시려고 했지만, 물은 너무나도 멀었다. 달빛이 나를 비웃듯 물 안을 밝혔다. 구부러진 자존심은 물 안을 좀 더 자세히 볼 수 있게 도와주었다. 나는 피곤함에 지쳐 구부러진 채로 잠이 들었다.

소리가 들렸다. 폭격 소리다. 눈을 뜰 힘도 남아있지 않았다. 잠이 들었을 때 건물이 무너졌던 모양인지, 허리 아래로 차올라있던 물은 이제 가슴께에서도 느껴졌다. 고개를 들어보았지만 빛은 느껴지지 않았다. 아직 밤인 모양이다. 나는 입을 열어 혓바닥을 내밀었다. 필사적으로 뻗은 그 육체의 끝에서 물의 맛이 느껴졌다. 달았다. 몇번이고 몇번이고 물을 핥아먹은 나는 만족감에 취해 고개를 폈다. 목덜미에 철근이 닿았다. 이대로 조금 더 힘을 주면 나도 평안을 얻을 수 있을까. 반쯤 잘려나간 철근의 예기에 섬짓한 몸을 찔러넣고 싶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도무지 몸을 가눌 수가 없다. 나는 곧 게을러져 무익한 몸짓을 포기했다. 뒷목의 긁힌 상처가 고작이었다.

가까운 곳에서 비행기 소리가 들렸다.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그 비행기 조종사에게 빌고 또 빌었다. 제게 평안함을 주세요. 안전함을 주세요. 게으름을 주세요. 눈 앞이 밝아졌다.


"그게 전부인가?"

"네, 전부입니다."

"되었네. 수고하게."

박사는 짤막한 소감을 남기고 내 병동에서 나갔다. 듣자하니 하루 반나절 동안 혼수상태에 빠져 있던 모양이다. 옆에 누군가 놓고 간 생수가 보였다. 내 기억에 남아있던 갈증이 그걸 들이킬 것을 종용했다. 나는 설득에 넘어가 물을 마셨다. 아주 달았다.

조금만 더 자자. 살아생전 언제나 이렇게 게을러져 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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