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얏호 나가 돼졌구나

공지: 이건 23부 연작 쿨전 중에서 마지막 편입니다. 이 편부터 읽는 건 어마어마한 스포일러가 될거라 아주 나쁜 생각입니다.


평가: +3+x

'조각사'는 확신에 찬 채로 더러운 나무문을 향해 걸었다. 황동 손잡이를 잡고는 문을 열었다.

앞에는 '청소부'가 가슴팍에 팔짱을 낀 채로 앉아있었다. 가스 마스크를 통해 항상 나오는 둔탁한 숨소리가 비좁고 다 허물어져 가는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조각사'의 뒤로 문이 닫히면서 작은 금속성의 딸깍하는 소리가 났다. 그는 마스크를 쓴 인영을 향해 능글맞게 웃어 보였다.

“그래서? 난 이제 '비평가'인 건가?”

'청소부'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네.”

'조각사'의 능글맞은 웃음이 함박웃음으로 바뀌었다. 자신의 새 노예에게 이까지 드러내 보이며 웃었다.

“훌륭해. 훌륭해.”

'조각사'는 시선을 아래로 내려, 진흙과 점토가 잔뜩 묻어있는 손을 보았다.

“존나 훌륭해.”

그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눈을 부릅뜬 채로 천장을 쳐다보며 미친 듯이 키득거렸다. 몸의 모든 구멍에서 엑스터시가 쏟아져 나오는 것 같았다.

그가 이겼다.

“일어나, '청소부'.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말이야.”

'청소부'는 망토를 펄럭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각사'는 승리한 채로 싸움에서 떠나갈 준비가 된 채로 문 쪽으로 돌아섰다. 그는 황동 손잡이를 잡고는, 비틀-

잠깐.

'조각사'는 손잡이를 비-

뭐?

'조각사'는 짜증스레 문손잡이를 달가닥거리다가 뒤로 돌아섰다.

“'청소부', 이 씨발 것 좀…”

'청소부'는 이미 사라진 상태였다. 그 자리에는 작은 분홍색 무전기만 남아있었다.

“씨바아아알.”

'조각사'는 방을 둘러보았다. 좀 전까지는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지만, 이제 보니 도망갈 창문 하나 없었다. 통풍구도, 배관 시스템도 없었다. 방 밖으로 나갈 방법은 문을 향해 나가거나 벽을 뚫고 나가는 길뿐이었다. 천장에서는 깜빡이는 백열전구 하나만이 고집스레 불을 밝히고 있었다. 무전기가 지직거리더니, 여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안녕 '조각사'. 게임 하나 할까?”

'조각사'의 입이 딱 벌어졌다. 그는 달려가 무전기를 집어 들고는 통신 버튼을 눌렀다.

“씨발. 씨발. 씨발 좆까, '연출자'. 씨발 씨발 씨발 씨발 씨발.”

'조각사'는 버튼을 놨다. 무전기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있지, 네가 여기 있는 건 창의성이 결여되었기 때문이야. 넌 심지어 욕도 다채롭게 못 하잖아. 정말이지 예술적 안목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볼 수가 없네. 정말로 무능한 인간이야.”

'조각사'는 무전기를 바닥으로 내던지고는 마구 짓밟아 값싼 분홍색 플라스틱 조각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는 돌아서서는 문을 걷어차며, 어떻게든 문을 열어보려 했다. 망가진 장치에서 웃음소리가 수신되었다.

“아니, 그 길로는 나갈 수 없어. 안타깝게도 다른 길로도 나갈 순 없지. 봐, 난 적어도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는 선견지명이 있어.”

'조각사'는 그 말을 무시하고는 견고한 나무문에 주먹을 내지르며, “씨발”이라는 단어를 여러 단조로운 버전으로 소리 질렀다. 깜빡이는 불빛이 벽마다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며, 이따금 방 전체를 완전한 어둠으로 둘러싸곤 했다.

“뒤 도는 게 좋을걸.”

'조각사'는 힘쓰는 것을 멈추고는, 어깨너머로 뒤를 돌아보았다. 뒤에는 커다란 나무 상자가 서서는,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진흙 같은 붉은 물질이 바닥으로 새어 나오고 있었다. '조각사'는 혈액과 배변의 역한 냄새를 맡으며, 불안감에 깊은숨을 들이쉬었다.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고, 눈은 커다래졌다. '조각사'가 한 단어를 속삭이는 동안, 지난 인생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포옹.”

'연출자'가 끼어들며 작별의 말을 남겼다.

“알고 지내서 좋았다고 말하면 좋을 텐데 말이야. 좋지가 않았거든.”

깜빡이던 백열전구가 순간 나갔다. '연출자'는 제 귀에 무전기를 가져다 대었다. 나무가 박살 나는 소리와 질식하는 듯한 비명의 뒤를, 메아리치는 최후의 우드득 거리는 소리가 따랐다.

'연출자'는 수심에 잠겨 커피 한 모금을 들이켰다.


“조이이이이이이, 나 심심해애애애애애.”

리타는 제 투명한 거미 중 하나의 털(만약 그가 정식 명칭을 알고 있었다면 강모라고 했을 것이다)을 쓰다듬었다. 그는 승합차 뒷좌석에 게으르게 누워있었다. 오버갱은 가운데에 앉아서 노트북 자판을 두들기고 있었고(물론 선글라스를 낀 상태로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조이와 몰리는 앞의 두 자리에 앉아 있었다(몰리가 운전석이었다).

“그럼 아래층으로 내려가. 어딘가에 비디오 게임이 있을 테니까.”

리타는 일어나서는, 오버갱을 지나쳐서 앞자리로 향했다. 그는 조이를 노려보았다.

“조이, 우리 지금 승합차에 타고 있어. 승합차에는 아래층이라는 게 없다고.”

조이는 눈썹을 치켜뜬 채로 리타를 되돌아보았다.

“중앙에 해치 있잖아. 발 조심하고.”

리타는 당황하여 미간을 찌푸린 채로 뒤로 돌았다.

“오버갱, 발 치워봐.”

오버갱은 느릿느릿 오른쪽으로 몸을 움직였고, 공간이 생기자 리타는 카펫 깔린 낙하 문을 밀어 열었다. 그는 그 자리에 앉아서는 구멍 안에다가 두 발을 달랑거렸다. 리타가 손을 까딱하자, 애완 거미들이 앞서서 아래로 내려갔다. 그는 사다리를 잡은 뒤, 비유클리드적 방을 향해 내려갔다.

리타는 짧은 사다리 끝까지 내려간 뒤, 자기가 들어온 드넓은 공간을 둘러보았다. 그는 계단참을 내려가 조명이 훌륭한 현관으로 향하며 주변을 살펴보았다. 어떤 벽은 벽돌과 회반죽으로, 어떤 벽은 밝은색의 플라스틱으로, 어떤 벽은 유리나 퍼스펙스1로, 또 어떤 벽은 금속으로 되어있었다. 다방면에 걸친 재료와 디자인이 뒤죽박죽으로 섞여 있는 모습이었다. 큼직한 대리석 기둥들이 커다란 캠벨 수프 깡통 옆에서, 함께 뒤틀리고 울퉁불퉁한 형태의 지붕을 떠받들고 있었다. 리타는 근처 벽을 따라 걸으며 여러 방을 살펴보았다. 식료품 저장실, 식당, 침실, 한쪽 벽이 텔레비전으로 가득 찬 거대한 오락실까지. 리타는 미소를 감출 수 없었다.

불가능한 저택이 승합차 바닥 밑에 숨겨져 있던 것이었다.

리타는 오버갱이 해치를 통해 내려와서는, 한 손에 노트북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자판을 두들기면서 식당 식탁으로 향하는 것을 보았다. 조이가 그 뒤를 따라 내려오더니, 식료품 저장실로 들어가서는 사과 한 알을 꺼내 한입 가득 베어 물었다. 그는 리타에게 한 알을 던졌다. 리타는 사과를 받아서는 한 입 베어 물었다. 리타가 제 입술을 오므리고는 가볍게 움츠리는 동안, 조이는 혼자서 킥킥거리고 있었다.

사과에서는 레몬 맛이 났다.


“이제 자네 둘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린 요원은 '화가'와 '건축가' 건너편에 앉아있었다. '화가'의 입 주변과 가슴팍에 말라붙은 검은 핏자국이 보였다. '건축가'는 심한 스트레스를 받은 데다가 잠도 못 자 눈 밑에 짙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알콘 요원은 다른 방에서 감시 카메라 영상을 지켜보고 있었다.

“어찌 보면, 자네 둘은 전반적인 사회에 위험해. 이쪽 반구에서는 가장 큰 변칙예술가 집단의 최정상에 가까이 있으니까. 당신네는 위험해. 둘 다 비교적 무능한 것은 사실이지만, 여전히 위험하지. 규칙대로 하자면, 자네 둘은 이미 죽었…실례, ‘제거’되었을 것이네.”

그린은 일어나서는 방안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두 변칙예술가는 제 무릎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자네들에겐 정보가 있지. 그 뇌는 잠재적인 자산이야. 그렇기에, 난 거기에 손상을 가하길 꺼린다네.”

그린은 몸을 돌려서는 자리에 앉았다.

“다행스럽게도, 난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았지. 그게 뭔지 알고 싶나?”

'화가'는 그린을 올려다보고는, 얼굴에 침을 뱉었다.

“좆까.”

그린은 무시하는듯한 미소를 지으며, 침을 닦아냈다. 그는 길고 굵은 주사기를 주머니에서 꺼냈다. 안에는 갈색의 불균일한 혼합물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린은 아직 의자에 묶여있는 '화가'의 뒤로 걸어갔다. '화가'는 최악의 사태를 상상하며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씨발 몸에 손대기라도 해봐!

“쉬이이이.”

그린은 '화가'의 어깨 뒤에 피하 주사기를 꽂아 넣고는, 내용물을 밀어 넣었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모조리 주사되자, '화가'가 가볍게 몸서리를 치더니 머리를 가슴팍에 뚝 떨구었다.

“이젠 꿈이 전부가 될걸세, 로보.”

그린은 탁자 반대편으로 걸어가며, '건축가'의 피곤한 눈을 쳐다보았다.

“자네에겐, 밥, 신경안정제를 잔뜩 넣어주기 전에 의식이 깨어있을 귀중한 시간을 조금 주도록 하지.”

'건축가'는 멍한 시선을 보냈다.

“아. 화학적으로 유도된 혼수상태로군. 뭐, 적어도 이제 잠이라도 좀 잘 수 있겠군.”

“그렇지. 그 전에 뭔가 남길 말이라도 없나? 귀중한 조언이라도? 인간 생활과 예술이라는 주제에 관해 멋지고, 심오한 구절이라도? 뭔가 쓸만한 거 아무거나 없나?”

“아니. 아니, 없는 것 같군.”

“나도 그럴 거라 생각했네.”

곧 '건축가'의 세상이 멀어져갔다.


루이즈 뒤샹은 죽었다.

그래도 많은 양의 초대장이 배송되었다. 어떤 이는 학문에 종사하는 이고, 어떤 이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장인, 어떤 이는 노숙자, 또 어떤 이는 이미 오래전에 죽은 것으로 알려진 이였다. 초대장의 발송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마치 우편 가방 안에서 편지가 뿅 하고 나타나 존재하기 시작한 것 같았다. 그런 일은, 당연하게도 불가능한 일이었고, 그렇기에 진실이었다.

수신자의 대다수는 루이즈 뒤샹이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세상 대부분이 루이즈 뒤샹이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세상 대부분은 루이즈 뒤샹을 신경 쓰지 않았다.

세상에서 세 명의 사람이 루이즈 뒤샹이 죽었다는 사실을 신경 썼다.

그들마저도, 그렇게까지는 신경 쓰지 않았다.


리타는 행복하게 미소지으며, 춤추듯이 옥상을 넘어갔다. 그는 제 투명 거미들에게 보호받으면서 그 위에 탄 채로 발밑의 골목길에 형광 연막탄을 던졌다. 몰리와 조이는 미술용품으로 가득 찬 서류 가방을 든 채로, 녹슨 외벽 계단참을 뛰어 올라갔다. 리타는 휴대전화기를 꺼내 들고는, 아래쪽에서 들려오는 총성 속에서 전화기에 대고 소리쳤다.

“O.G., 지붕! 넷째랑 둘째 모퉁이!”

몰리는 제 서류 가방을 조이에게 넘겨주고는 주머니에서 새총을 하나 꺼내 들어, 뒤를 쫓는 GOC 요원들에게 고속 젤리빈을 쏘아댔다. 건물이 거칠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리타는 지붕 가장자리에서 아래를 보고 있자니, 오버갱이 승합차로 벽을 타고 수직으로 달려 올라오고 있었다. 그가 지붕까지 올라오자, 승합차가 지붕과 평행하게 총알처럼 날아가 오더니 거친 충돌음을 내면서 지붕 바닥에 떨어졌다. 오버갱이 계기판의 버튼을 누르자, 기다란 다관절 로봇팔이 차량 옆면에서 튀어나왔다. 로봇팔은 팔을 쭉 뻗어 조이의 벨트 뒤쪽을 꽉 쥐어 잡고는, 차 안쪽으로 끌어당겼다. 몰리는 계속해서 젤리빈을 쏘고 있었고, 리타는 제 거미를 타고 차에 올라타서는 가운데에 난 낙하 문을 통해 숨겨진 저택으로 내려갔다. 오버갱은 가속 페달을 밟아, 호를 그리며 방향을 틀고는 몰리의 바로 뒤로 들어갔다. 몰리는 마지막 젤리빈을 잘 무장한 병사의 가슴에 박아넣고는, 승합차에 올라탔다.

GOC 요원들의 총알이 승합차를 스치고 지나가며, 스칠 때마다 시끄러운 금속성 소리를 내면서 작은 흠집을 남겼다. 오버갱은 다시 가속 페달을 밟고는 총알 튀어 나가듯이 지붕 위에서 뛰어내렸다. 잠시 자유낙하를 하면서, 그는 무게가 없는 상태였다. 그러곤 승합차가 땅바닥에 떨어졌다. 지난주에 설치한, 복잡한 변칙 축임 장치가 아니었다면, 다 죽었을 것이었다. 오버갱은 아드레날린에 미소 지었다. 처음 작동하는 거지만 장치는 완벽하게 작동하여 기뻤다.


"한 번은 현인을 만난 적이 있었어. 난 높디높은 산을 오르고 어마어마한 협곡을 건너, 세계의 중심에 앉아있는 그를 보았지. 난 그에게 누군지 물었어. 제자라고 하더라고. 누구의 제자냐고 물었지. 유일한 스승의 제자라고 하더라고. 다른 제자들도 있냐고 물었지. 우린 모두 제자고, 차례차례 모두 스승이 된다고 하더라고. 누구냐고 물었지. 부처라 하더라고. 안타깝게도, 또 다른 현인이 내게 말했었어.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고."

'절단사'는 미소 지으며 뒤로 돌았다.

"그래서, 당연하게도, 목을 그어주었지."

시체는 없었다. 시체를 보면 죽은 사람이 떠올랐다. 그리고 죽은 사람을 보면 그의 형이 떠올랐다. 형은 죽었다. 루이즈는 죽었다.

거 참 존나게 흥을 깨는구만.

“내 시체 경비원(corpswitzer)들은 어디 있는가? 그들이 문을 지키게 하여라.”

실망스럽기도 하지.

“선도 악도 없지만, 그렇게 생각을 하면 그렇게 되는 거지.”

그렇다면 왜 생각이란 걸 하지?

“그럴 이유는 분명 없어.”

이 자리에서 숨김없이 털어놓도록 하지.

“친애하는 형, 너에게 바치는 말이야.”

피코는 벽 쪽으로 걸어가서, 보드카 한 병을 열어 제 입에 부어 넣고는, 알콜을 여기저기 마구 튀겨대며 말을 했다.

“목적이란 뭐지? 이유란? 내가 거슬릴 정도로 잘난 척하고 싶고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프랑스인인 척을 하고 싶다면 ‘레종데트르(raison d'être)’ 라 하겠지.”

이쯤 되니까 설교하려는 것 같아지는데.

“좋은 아침입니다, 이승이여.”

피코는 병을 들더니 바닥에 내려쳐 박살 냈다.

“그게 무슨 뜻이더라? 뭐더라, 뭐더라, 뭐더라…”

이미 한 번 짚고 넘어갔잖아. 모든 것의 의미는 그 의미를 생각하는 데에 있다고.

“의미에는 사람이 필요해. 사람이 없다면, 의미도 없고, 그렇다면 세상은 아무것도 아니겠지.”

세상은 아무것도 아니야.

“혹시…자살하려 해본 적 있어?”

있지.

“어땠어?”

그다지… 편안하지는 않아.

“그럴 것 같아.”

제대로 생각한 거란다, 이 허상아.

“허상?”

허상. 넌 허상에 불과해.

“하. 나보단 더 잘 알겠지.”

분명 그럴 거라 생각해.

“그래도 아주 괜찮은 허상이지? 이쁘고 작은 허상?”

선도 악도 없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그렇게 되는 거지.

“내 말 베낀 거잖아.”

내 말을 베낀 거지.

“어쨌든, 어떻게 생각해?”

당신은 방 반대편에 서서, 미친 남자가 허공에 대고 말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당신은 그가 누구에게 말하고 있었는지 궁금했다. 그 말인즉슨, 당신은 내가 누구였는지, 어쩌면 누구인지를 궁금해했다는 말이다. 과거 진행형 동사란 까다로운 법이다, 안 그런가? '절단사'가 말한다.

“그렇지.”

당신은 침묵으로 대답한다. 정말 그러나? 당신은 어떻게 반응할 것이고, 어떻게 반응했고, 어떻게 반응하나? 당신은 이 남자를 죽일 것인가?

난 당신의 손에 칼을 놓는다. 피코 윌슨은 자신의 목을 들이댄다. 결정은 당신에게 달려 [있었/있/있을 것이]다.


그린 요원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는, 거리의 허공에 연기를 내뿜었다. 그는 한가하게 제 혀로 이를 문질러대며, 속도를 내며 지나가는 자동차들을 카페 자리에 앉아 지켜보고 있었다. 그린 요원은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곤 찻잔을 집어 들어 들이키기 시작했다.

알콘 요원은 그린의 건너편 자리 의자를 빼서, 자리에 앉은 뒤 제 몫의 담배를 꺼내 들었다. 그린이 라이터를 건네왔다. 알콘은 제 발암 막대에 불이 붙을 때까지 불꽃에 지졌다. 알콘은 담배를 입가에 가져가서, 따뜻한 유독성 기체를 폐 안 가득히 들이마시고는 한 줄기 잿빛 연기를 잿빛 도시에 내뿜었다. 그는 그린을 돌아봤다.

“당신 일 진짜 못해요.”

그린은 찻물 표면에 비치는 제 모습을 바라보았다.

“알아.”

알콘은 담배를 한 모금 더 빨아들였다.

“그치만 저보다는 잘하시죠. 대다수보다 더 잘할 걸요.”

“사람이 문제야.”

“모든 게 사람 때문이잖아요, 그린. 문제도 그렇고 해답도 그렇고요. 우리에게 놓인 이 지랄 맞고 거지 같은 문제에 가장 근접한 해답이 당신이에요.”

알콘은 담배를 땅바닥에 내던진 뒤, 신발로 비벼 껐다.

“어휴. 예술가들은 엿이나 먹으라지. 그 치들이 하는 예술도 그렇고.”

그린은 계속해서 제 찻잔 안쪽을 보고 있었다.


“혹시…자살하려 해본 적 있어?”

있지.

“어땠어?”

아주 즐거웠지. 그전까지는 모든 게…아무것도 아니었어. 난 추운 7월의 흔들바람을 맞으며 서 있었어. 굵은 자갈이 내 샌들 아래에서 아작거렸고, 오랫동안 오르막길을 올라 다리가 아팠지. 밤은 언제나 그러하듯 어두웠어. 난 그때 12살이었고.

“12살? 조금 너무 어린 것 같은데.”

세상의 일부분이 되기에는 너무 어렸지만, 세상을 싫어하기에는 어리지 않은 나이지. 세상은 썩었고, 부서져 있어. 적어도 내 세상은 말이야. 네 세상은 조금 많이 순수하지.

“말 돌리고 있어.”

맞아. 발밑에서 땅이 아작거렸어. 난 언덕 꼭대기에 섰고, 그 아래에는 기차역이 있었어. 종이 울리고 빛이 번쩍이며 모든 것이 환해졌지. 땡 땡 땡 땡…그러곤 기차가 사라졌어. 난 별무늬 잠옷을 입고 서 있었지. 하늘을 올려다보니 별은 없더라. 도시와 빛, 미화된 멍청이들로 가득 찬 커다란 경기장에 너무 가까웠으니까. 지구에 사는 사람들은 세상의 길을 가로막고 있어. 가치가 없어. 나와 함께 할 가치가 없어. 난 그들과 함께할 가치가 없고.

“꼭 나처럼 말하네.”

그랬을지도 모르지. 그렇지만 넌 유쾌하고 자유롭지만, 난 씁쓸하고 갇혀있었지. 생각하지 않고, 상상하지 않고, 이해하지 않는 세상에 갇혀있었어. 난 언덕을 내려오다가 넘어졌어. 작은 돌들이 내 손과 손바닥과 손가락에 박혔지. 다시 일어나서 먼지를 털고 보니 피부가 빨갛게 변해있더라. 난 도로로 내려와서는 양옆을 살폈지.

“거 참 이상하네.”

안전이 제일이니까. 자동차 가지고는 확실하지가 않아. 여기서 중요한 건 효율성이야. 난 길을 건넌 뒤 다리를 건넜어. 마지막 기차에 탔던 승객들이 내리고 있었어. 넌 어쩜 내가 여기서 멈췄다고 생각할지도 몰라. 그 ‘사람들’ 중 한 명이 허리를 굽히곤 내게 인사를 하거나, 내가 누군지 묻거나, 어디로 가는지를 묻거나, 아니면 내 별무늬 잠옷이 정말 예쁘다고 말했다던가 생각했겠지. 하지만 아무도 그러지 않았기에, 난 계속해서 걸었어.

“사람들은 자기와 관련 없는 것은 신경 쓰지 않지.”

맞아. 그리고 사람들은 결코 신경 쓰지 않아. 모든 것이 괜찮았어. 모든 것은 언제나 괜찮고, 모든 것은 언제나 통제하에 있지. 난 그 좀비 떼 옆을 지나 역으로 향했어. 불빛은 켜져 있었지만, 아무도 없었지. 난 가장자리로 가서는 내 발을 허공에 늘어뜨렸지. 사람들이 떠나갔기에, 난 떨어졌어. 땅바닥에 착지할 때 샌들 밑에서 자갈이 으그적하는 소리가 들렸지. 난 철로 쪽으로 가서는, 옆면을 발로 가볍게 찼어. 그 무엇보다도 진짜라는 느낌이 들었지. 그 철로 하나만이 유일하게 나한테 뭔가를 해줄 수 있는 것이었어. 날 구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지. 난 철로에 눕고는 구원을 기도했어.

“그리고 신께서는 들어주셨어?”

그는 들었고 기차를 멈춰주지 않았어.


리타는 컴퓨터 앞에 앉아서 아무 생각 없이 키보드를 두들기고 있었다. 그는 이미 오늘 인터넷에 새로 생긴 일은 전부 보았다. 전화나 이메일로도 새로운 메시지는 오지 않았다. 뭔가 요상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뭔갈 하고는 싶지만, 무엇하나 딱히 흥미로운 것이 없었다. 그는 영원의 문 앞에 누워 문이 열리길 기다렸다. 진동조차 없었다. 리타는 나무 탁자 위에 머리를 뉘었다.

아무도 아닌 자가 옆 테이블에 앉아있었기에, 리타는 그에게 말을 걸었다.

“안녕, 탠.”

한때 텐저린이라 불렸던 남자는 놀라움에 눈썹을 치켜올렸다.

“날 기억해서는 안 되는데.”

리타는 공허히 자신의 두개골을 가볍게 두드렸다.

“사진적 기억. 평생 갖고 살아가지. 그 바보 같은 셔츠는 잊을 수가 없어.”

“그래도 말이야.”

“그건 그냥 모자야, 탠. 우리가 하는 것들만큼만 마법적이고 전능하다고. 교묘한 속임수일 뿐이야.”

아무도 아닌 자는 모자를 벗어, 헝클어진 붉은 머리카락에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그럴지도 모르겠네.”

“그래서 원하는 게 뭐야?”

“딱히 없어.”

리타가 한숨을 내쉬었다.

“여긴 왜 온 거야, 탠?”

“관계 유지. 옛 친구들이나 만나러.”

“여긴 왜 온 거야, 탠?”

아무도 아닌 자는 책상 건너편에 앉아있는 소녀를 향해 인상을 썼다.

“난 환영받지 않는 건가?”

“다른 사람들만큼이나 환영받지. 그냥 궁금해서 그래.”

“호기심이 고양이를 어떻게 한다는 얘기는 이미 알고 있잖아.”

“어쩌고저쩌고 난 월요일이 싫고 뭐 그런 얘기였던가.”

리타는 자리에서 일어나 냉장고로 향해서는, 포도맛 탄산음료 한 캔을 집어 들었다. 그는 캔을 땄고, 딱 하는 소리와 함께 안에서 기체가 푸시식거리며 빠져나갔다.

“내 질문은 여전해, 탠. 답해줄 때까진 뭐 하나 얻어가는 게 없을 거야.”

아무도 아닌 자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넌 뭘 하고 있어, 리타? 넌 왜 여기 있어?”

리타는 거품 나는 보라색 음료를 들이켰다.

“그 대안보다는 더 흥미로우니까.”

“어째서?”

“이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흥미롭거든.”

“그래서 넌 흥미에 따라 움직인다?”

“당연하지.”

“그럼 그게 내 대답이기도 해.”

리타는 다시 탁자 앞에 앉았다.

“알았어. 알았어, 탠, 이건 그러니까…좋아. 사람의 가치란 건 뭐지?”

아무도 아닌 자는 턱을 문질렀고, 까칠하게 자란 수염에서 흐릿하게 긁적이는 소리가 났다.

“개인의 기여에 대한 잠재력이 아닐까 싶은데.”

“그렇다면 개인 기여의 총합이라 할 수 있겠네.”

“그치.”

“좋아 그럼. 두 명이 있다고 치자, 응?”

“그래.”

“딱 한 가지를 빼고는 이 둘은 모든 방면으로 같아. 둘 중 하나는 현실에 색다른, 독특한 것을 제공할 수 있어. 그게 가치를 구분 짓는 거야.”

“흠.”

“둘 다 어디 가서는 똑같은 걸 할 수 있겠지. 자기가 할 수 있는 일로 돈도 잘 벌 거야. 하지만 그 중 잠재력을 가진 이는 그 잠재력을 결코 보여주지 못해. 그 잠재력은 그렇게 죽어버리는 거야.”

아무도 아닌 자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난 다른 사람보다 아주 많은 것을 더 잘할 수 있어, 알지? 난 천재야, 탠. 네가 아무 일이나 골라도, 난 다른 누구보다 그 일을 더 잘할 수 있어. 하지만 그건 의미가 없어. 그건 요지가 아니고, 내 가치도 아니야, 그치? 가치라는 건 유일성이야. 바로 그게 내가 교실에 앉아서는, 사칙연산이나 하고 철자법 따위를 배우고 있지 않은 이유야. 난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고, 무엇보다 내가 행복하니까 하는 거야. 유용성 따위는 개나 주라지. 이해가 돼?”

아무도 아닌 자는 제 모자를 다시 머리에 썼다.

“의무는 어떡하고?”

“누구에 대한 의무?”

“세상에 대한 것이겠지.”

“능력이 곧 의무를 말하는 건 아니야. 내가 누구한테 빚을 진 것도 아니고.”

“그건 이기적이야.”

“알아.”

“넌 이기적이야.”

“그래.”

“죄책감을 느끼진 않아?”

“절대.”

“왜?”

“죄책감을 느낄만한 짓을 하질 않았는걸. 세상이 나한테 빚을 진 것도 아니고, 내가 세상에 빚을 진 것도 아니야. 의무라는 건 개소리야, 탠.”

아무도 아닌 자는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그럴지도 모르겠네.”

그러곤 아무도 아닌 자는 자리를 떠서 다른 무언가를 하러 갔고 리타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탁자에 앉아 키보드를 두들기다가 결국 잠들었다.


“혹시…자살하려 해본 적 있어?”

있지.

“어땠어?”

그냥 그랬어. 그전까지는 모든 게…아무것도 아니었어. 난 추운 7월의 서늘한 산들바람 속에 서 있었어. 굵은 자갈이 내 샌들 아래에서 아작거렸고, 오랫동안 걸어서 다리가 아팠지. 밤은 언제나 그러하듯 어두웠어. 그때 난 16살이었고.

“16살? 그렇다면 감정 기복 심한 십 대였네.”

딱히 그렇진 않았어. 그때의 난 현명한 사람이었지. 난…환멸을 느끼고 있었어. 세상이 다시 지루해졌거든. 어떤 면에서는 난 이미 한 번 죽은 뒤였어. 하지만 딱히 잘 되진 않아서, 다시 생명을 부여받았지.

“결정은 확고했고?”

처음에는. 두 번째가 되니까, 그냥 행동해나가는 것뿐이었어. 내 생각엔…광기[에 의해/를 향해] 움직이는 것 같았지. 같은 짓을 하고 또 하면서 다른 결과가 나오기를 바랐어. 그래서 난 그냥 낡고, 큼지막하고, 이미 오래전에 버려졌는데 아무도 시간을 낭비해서 박살 낼 생각조차 하지 않는 나무 건물로 향했지. 난 그 집이 언제나 좋았어. 정말이지…신비했으니까. 다른 세상 같았어. 이 행성의 표면 위에 뭔가 흥미로운 게 있다면, 바로 그 집일 거야. 그리고 난 그 안에 들어갔지.

“그리고 그 안에는 뭔가 흥미로운 게 있었고?”

나 말고는 없었어. 창문으로 들어갔지. 잠겨있긴 했지만 자물쇠가 오래된 것이어서, 따기가 어렵진 않았어. 들어갈 때 창틀에 약간 베였어. 낡은 페인트 조각이 피부밑으로 파고들었는데, 내가 그날 밤을 넘겼다면 감염이 되었을지도 모르지. 그 장소는 분명히 흥미로웠어. 바닥은 특별한 질감이 나게 만들어진 견목으로 되어있었는데, 난 샌들을 벗고 걸어 다녀봤어. 발바닥으로 느껴지는 감촉은 형언하기 힘든 그런 것이었어. 그렇지만, 여전히 그 행복도 공허한 것이었지. 안에는 책상이랑 의자도 몇 개 있었어. 건물 전체는 3층짜리였고.

“죽음은?”

죽음도 그냥 그랬어. 삐걱거리는 계단을 타고 올라가면서 모든 방을 들여다봤지. 먼지 때문에 기침하고, 거미줄을 털어냈어. 거미 한 마리가 튀어나와서는 손을 물었지. 난 그 거미를 때려잡고는 바닥에다가 내팽개쳤어. 옥상으로 올라가서는 녹슨 난간을 걷어찼어. 충격으로 확실히 죽을 정도는 아니더라고. 그래서 주머니칼을 꺼내 들고는 손목, 다리, 발목을 그었지. 그러곤 목도 그은 다음에, 앞으로 떨어졌어. 바람이 얼굴에 세차게 부딪히는 동안, 난 내가 틀렸고, 이게 그냥 꿈에 불과하며 세상에 무언가 의미가 있기를 바랐어. 난 증상만을 이해하지 원인은 이해하지 않는 세상에 갇혀 있었어. 치료법이 아니라 일방적인 처방만 내리는 돌팔이 의사처럼 말이야. 신경을 쓰지 않는 거잖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바라고 기도하는 것밖에 없었어.

“그리고 신께서는 들어주셨어?”

듣고는 추락을 멈춰주지 않으셨지.


루이즈 뒤샹은 죽었다. 장례식은 짧고, 지루했으며, 가톨릭 식이었으나, 그중 두 가지 특성은 별 쓸모가 없는 수식어이다.

보통 장례식에는 망자와 가까웠던 이들이 참석한다. 루이즈는 성인이 되고 나서 인생의 대부분을(또한 그 이전에도 항상) 거슬리는 꼴통으로 살아왔기에 ‘친구’를 만들 시간이 없었다. 물론 아는 사람은 있었다. 루이즈는 많은 사람과 알고 지냈지만, 면식이 있는 것과 친한 것 사이의 차이점은…흐으음. 사실 생각하는 것만큼 차이가 크진 않다. 견해 상의 문제일 뿐이지.

루이즈는 자기가 조롱했던 대다수로부터 마지못해 일종의 존경심을 끌어내긴 했다. 그는 훌륭한 예술가는 아니었고, 적어도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만, 어쨌거나 일련의 기이한 우연을 통해 믿기 힘들 정도로 많은 수의 사람들이 그가 훌륭한 예술가라고 믿게 했다. 어쩌면 루이즈는 그냥 뛰어난, 그것도 엄청나게 뛰어난 거짓말쟁이일지도 몰랐다. 정치판으로 뛰어들었다면 과연 어떻게 되었을런지.

당연하게도, 루이즈가 뱉은 모든 거짓말에는 약간의 진실이 섞여 있었다. 무에서 유가 나올 일은 없다. 그가 뱉은 거짓말의 그물 안에는 ‘진짜’ 루이즈의 일부분이 반짝이며 걸려있었다. 수백만으로 쪼개진 조각이, 복잡하게 하나의 광원을 굴절시키며, 아마도 논리정연할 전체를 비추고 있었다.

정말 그럴까?

당연히 그렇다. 결국에 사람은 사람이다. 모든 겸손한 태도와 광적인 기교와 순전한 광기 뒤에는, 자기가 가진 유일한 수단을 통해서 확인받고자 하는 생각하고, 살아있고, 숨을 쉬는 인간이 하나 있었다. 그리고 더는 확인받을 것이 남아있지 않을 때, 그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루이즈의 추도 연설에서 이에 대해서는 딱히 언급된 것이 없었다. 왜냐하면 루이즈는 자기 장례식의 추도 연설을 자기가 직접 쓰고, 언제나 그랬듯이 망가진 베타맥스 녹화기로 녹화하여 준비해뒀기 때문이었다. 루이즈가 제 인생을 요약하려 했을 때, 이렇게 말하였다.

“친구들, 적들, 친구-적들, 적-친구들, 사이보그들, 마법사들, 개, 고양이, 쥐, 파리, 미생물, 바이러스, 슈퍼마켓 출납원들 그리고 비교적 미래에 아마 살아있을 주관적인 존재들 모두 반갑습니다. 요단강 너머에서 안부 전해드려요!

컷. 좋아, 몇 번 다시 녹화할 거예요. 있죠, 이걸 만약에, 진짜로 틀 거라면, 그냥 녹화본 중에서 가장…그럴듯해 보이는 걸 틀어줘요. 그럼 이제 보는 사람들이 전부 “와, 저 인간 뭔 초능력자였나, 쩌네!” 이러면서 내가 쿨한 인간이라 생각하거나, 아님 초능력자 같은 거라 생각하겠죠? 알았죠? 좋아요.

하나. 이건 제가 자연사하거나, 사고사, 아니면 뭔가 되게 지루한 이유로 죽었을 때 틀어주세요. 다시 말하자면 이게 가장 일반적인 영상이에요. 그래서 영상 전부를 하나로 묶는다면, 여기서부터 시작하세요.

“전 지금 죽었어요. 요란하게 갔을 것 같은데, 아닌가요? 가장 그럴듯한 건 고양이나 고아들 한 포대기를 구하려다가 엄청 맹렬한 폭발에 휘말렸을 거예요. 인간 정신의 강함을 강하게 믿으며 용감하게 앞으로 나서거나 뭐 그랬겠죠.

, . 이건 왠 씹새가 절 죽였을 때에요. 여기서부터 시작해줘요.

“전 지금 죽었어요. 그리고 이제 한 가지 고백할 게 있습니다…전 누가 절 죽였는지 알아요. 무섭지 않나요? 그 사람은, 사실 이 방 안에 앉아있어요. 곧 경찰이 와서 짧게 진술을 받을 거고, 아마 유죄 판결받은 사람을 죽일 거예요.

, . 좋아요. 이건…뭐, 제가 자살했을 때에요. 이렇게 시작하죠.

“전 지금 죽었어요. 현실을 빡종했고 너네 얼간이들을 떠났습니다.

컷. 네, 알아요, 짧죠. 그치만 뭐 어쩌라고요. 장례식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그래. 젠장, 애초에 제가 죽을 거라 누가 그래요? 왜 굳이 이런 걸 녹화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네. 좋아, 여기부터 마지막까지는, 그냥 마음속에 담아두도록 해요. 뭐, 제 말은, 이 부분은 빼고요. 이 문장 끝내고부터 말이에요.

“지금부터가 여러분을 위한 추도 연설입니다. 이 지루한 행성에 사는, 고름과 살과 제가 중요하고 위대하다는 망상으로 이루어진 하찮은 덩어리들아. 일단의 천사들이 영원한 안식을 위해 노래해주길. 자리에 앉아서 자위성 행복에 즐거워하고, 그 역겨운 돼지우리에서 영원히 썩어가길. 영국의 소식을 살아서 받아볼 수는 없으니, 제가 없는 동안 편지는 불태워주시기 바라요.

“좋은 밤 되시길, 죽은 사회여. 남은 것은 침묵뿐.”

당연하게도 성당에는 베타맥스 플레이어가 없었기에, 추도 연설을 들은 이는 없었다.


“혹시…자살하려 해본 적 있어?”

있지.

“어땠어?”

무서웠어. 그전까지는 모든 게…아무것도 아니었어. 난 추운 7월의 얼음장 같은 산들바람을 맞으며 서 있었어. 굵은 자갈이 내 샌들 아래에서 아작거렸고, 오랫동안 내리막길을 내려가 다리가 아팠지. 밤은 언제나 그러하듯 어두웠어. 난 그때 20살이었고.

“20살? 선반 정리하는 일이 신물이 날 즈음이네.”

그 반대라고 할 수 있어. 내가 원하는 건 단순함 뿐이었으니까. 난 선택을 포기한 지, 희망을 포기한 지, 삶과 사랑과 그 모든 걸 포기한 지 이미 오래되었지. 자기 보호는 감정이 아니야. 두려움이라 해야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감정적이지만, 충동 자체는 그렇지 않아. 논리적이지도 않고. 존재 지속성에 대한 충동은 존재하는 것들 사이에서는 만연해있어. 단순히 그런 충동이 부족한 이들은 이미 오래전에 존재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지. 박테리아조차도 살아가려 하지만, 그건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니야. 그냥 그래야 하므로 그러는 거지.

“말 돌리고 있어.”

맞아. 발밑에서 땅이 아작거렸어. 난 언덕 밑에 섰고, 내 눈앞에는 해변이 펼쳐져 있었어. 소금기 가득한 바닷바람이 가볍게 불면서 입술을 가르고 피부를 벗겼지. 난 샌들을 벗고는 두 발을 약간 축축한 모래 밑에다 집어넣었어. 난 발가락을 꼼지락대며 작은 모래 알갱이들을 발톱 밑에다가 집어넣었지. 난 바다를 향해 걸어갔어. 바다란 참 강력한 것이야. 쉴 새 없이 파도가 몰아치잖아. 난 주머니에서 전화기를 꺼내서는 저 멀리 던졌어. 바람과 바닷물이 계속해서 파도를 치면서 으르렁거리는 소리에 물에 빠지는 소리조차 듣지 못했지.

“난 바다를 본 적이 없어.”

꼭 한 번 보는 게 좋아. 내 생각엔 모든 것들이 그렇지만. 날 것의, 구속받지 않는 에너지가, 밑에서부터 땅을 뚫고 나오거든. 난 팔에는 소름이 돋고, 겨울의 세찬 바람에 덜덜 떨고, 얕은 숨을 내쉬면서 한쪽 발을 다른 발 앞에다가 딱 붙이면서 걸어 나갔어. 얼음장 같은 물이 다리를 쳤고 그 충격에 난 넘어졌지.

“그러고는?”

다시 일어났어. 난 계속해서 움직이면서, 공포 속에서 성큼성큼 걸어 나갔지. 끝이 날 필요가 있었어. 끝이 나야 했어. 난 그냥 내 몫을 전부 빼버리고 싶었어. 판에서 뜨고 싶었지. 칩이 전부 나한테 있는데, 어째서 게임은 계속되고 있는 거지? 네가 이기면, 게임은 끝나고 다음 게임으로 넘어가게 돼. 하지만 세계가 이 게임을 좋아하기에 나보고 계속 플레이하라는 거지. 난 해수를 양손 가득 퍼담아서는 내 입안에 털어 넣었어. 한기가 미뢰를 무감각하게 만들었지만, 그 틈새에서 짠맛이 찬란하게 빛나는 걸 막기에는 충분치 않았지. 난 조금 더 걸었고, 파도가 들이닥치자 넘어졌어. 난 눈을 떴어. 다시 한번 소금기에 눈이 아팠지만, 신경 쓰지 않았지. 물이 날 끌어당기고 해류가 눌러댔어. 난 숨을 들이쉬면서 무겁고 배가 불렀지. 내 몸이 바다의 밀도와 같게 되었어. 바다의 자비에 따라 난 하나가 되었고 곧, 완벽하게, 표류하기 시작했어. 그래서 난 이번에는 뭔가 바뀌길 기도했지. 뭐라도 달라지기를.

“그리고 신께서는 들어주셨어?”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포세이돈이 이겼어.


캐롤은 샌드라 폴슨과 펠릭스 코리에게 저마다 주문한 음료를 건네고는 카운터 뒤로 돌아갔다. 펠릭스는 가볍게 후후 분 뒤, 컵을 입가로 들어 올려 머뭇거리며 한 모금 들이마셨다. 샌드라는 눈을 감은 채, 손바닥으로 이마를 문지르며 의문을 늘어놓았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에요?”

“그게 정말 중요한가?”

“어떤 의미로는.”

“나보다 더 많이 알고 있을 텐데. 바보 한 쌍처럼 여기저기 돌아다녔으니…”

“‘뭔가’ 있었다는 걸 알고 있는 거죠. 모든 통신 수단을 끊고, 갤러리에서 사는 것도 그만두고, 아시다시피 실제로 이얏호를 대중에 공개했잖아요.”

“그걸 전부 ‘뭔가’로 함축시키는구만.”

“그에 대해 얼마나 잘 알고 계셨어요?”

“푸후, 전혀. 그가 그 바보 같은 영상을 보낸 직후에 만났지. 자네는?”

“조금 알고 지냈죠. 같은 학교에 다녔었거든요. 잠깐 저를 짝사랑했을 지도요? 잘 모르겠네요. 그런 방면은 잘 몰라서. 젠장, 분명 아닐 거예요.”

“그때의 그는 어땠나?”

“비슷했어요.”

“잘난 체하는 개자식?”

“네에에엡.”

샌드라는 손가락 마디 관절을 꺾고는, 제 녹차 머그잔을 들어 올렸다. 그는 한 모금 들이키고는 쌉싸름한 액체를 입안에서 돌렸다.

“루이즈는 약을 끊었어요.”

둘은 캐롤을 보았다. 요식업 종사자 특유의 거짓 미소가 얼굴에 만연한 상태였다. 캐롤은 카운터 뒤에서 나오더니, 둘의 탁자에 팔꿈치를 괴고, 양 손바닥으로 턱을 받친 채로 앉았다.

“루이즈는 한낮에 여길 와서, 커피 몇 잔을 시키고는 약 한 줌을 집어삼키곤 했죠. 지난 몇 주간은 여전히 여길 와서 같은 일을 했지만, 커피만 마셨어요. 마치 ‘뭔가’ 일어나서 약 먹는 걸 완전히 잊은 것처럼요. 누군가 잊게 만든 것처럼…바보 같은 소리죠, 안 그래요?”

캐롤은 계속해서 공허한 미소를 지으며, 제 코의 옆면을 톡톡 쳤다. 샌드라와 펠릭스를 서로를 쳐다보다가, 샌드라가 둘 다 묻고 싶던 질문을 입 밖으로 꺼냈다.

“그래서 당신이 누구라고요?”

“'청소부'요.”

펠릭스는 머금고 있던 차를 탁자 위에 흩뿌리며, 근처에 앉아있던 이들의 이목을 끌었다. 샌드라는 이 새로운 정보를 처리하며, 이전에 알고 있던 것들과 비교하느라 얼어붙은 상태였다. 캐롤이 계속하였다.

“더 오래 숨길 수도 있긴 했는데, 숨길 이유가 없어 보여서요.”

펠릭스는 냅킨 함에서 냅킨을 몇 개 뽑아 들고는, 질문하면서 탁자 위를 닦았다.

“증명할 수 있나?”

캐롤은 제 앞치마 뒤에서 짙은 검은색 방독면을 꺼냈다. 펠릭스는 그걸 보며 그 방독면을 본 누구나 똑같이 느끼던 경외감과 공포를 느꼈다. 분명 값싼 속임수이지만, 제 역할은 다 한 속임수였다. 캐롤이 방독면을 앞치마 앞주머니 안에 집어넣자 펠릭스는 가슴팍을 짓누르던 무언가가 사라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냥 방독면과 계량기가 전부에요. 요녀석은 부정하겠지만. 말이 나와서 말인데, 집안일 얘기를 하죠. 이 비밀스런 쬐깐한 도당에 남은 구성원이라고는 이 탁자에 앉아있는 이들이 전부에요. 다른 사람들은 모두 목숨이 위태롭거나 죽었죠. 신입이 필요해요.”

펠릭스는 눈썹을 치켜떴고, 샌드라는 아직 생각에 잠겨있었다.

“난 은퇴하긴 했는데.”

“당신은 은퇴한 게 아녜요. 휴식을 가진 거지. 이제 복귀하는 거죠.”

펠릭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말한다면야.”

“읽어보라고 최종 후보자 명단을 만들어두었어요. 이 시점에서는 닙먼과 알돈이 가장 적합하겠지만, 최후 판단은 당신들 손에 달려있어요.”

샌드라가 끼어들었다.

“우리한테?”

“판단하는 건 제가 아녜요. 여긴 당신들의 모임이고, 전 그냥 청소부에 불과하니까요. 그래서 말인데, 둘 중 하나가 이제부터 '비평가'가 되어야 하니까-”

“패스.”

“패…젠장.”

'비평가'는 자기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그럼 그 문제는 해결되었네요. 다음 주 안으로 세 명을 더 영입해야 해요. 호칭은 당신들이 정해줘야 해요. 근본적으로 모든 문제가 그렇지만요. 이미 제 전화번호는 가지고 계시겠고, 뭐 마시고 싶은 게 있으시다면 전 보통 여기에 있을 거예요.”

샌드라는 원래 말하던 주제로 말을 되돌렸다.

“뒤샹은?”

“그는 죽었어요. 양복네들이 그를 직접 죽이지는 않았지만, 목을 매달 줄을 제공했죠. 당신의 행동은 그 결과를 바꾸지 못했을 거예요. 그 문제에 관해서는 말할 것이 별로 없죠.”

“그렇게 말한다면야.”

익숙한 손님 한 명이, 한 줄기 담배 연기를 남기며 문으로 들어왔다.

“근데 왜 커피숍에서 일하고 있는 거야?”

캐롤은 자리에서 일어나, 언제나와 같은 감정 없는 미소를 지었다.

“커피를 좋아하거든요.”


“혹시…자살하려 해본 적 있어?”

있지. 여러 번.

“어땠어?”

그 무엇과도 같지 않았어.

“비슷한 게 아무것도 없어?”

아니, 모든 건 비슷해. 그냥 그 무엇처럼도 느껴지지 않은 것뿐이야.

“그래서 그 느낌은 어땠는데?”

아무것도 아니었지. 그 지점 이전의 모든 것은 아무것도 아니야. 그런데도, 그 후에 딸려오는 것 또한 아무것도 아니었어. 무(無)에 무에 무가 꼬리를 무는 거야.

“무에서 유는 나오지 않아, 다시 살도록 해!”


정리정돈 씨는 걸었다.

정리정돈 씨는 아주,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걸었다. 한때 깨끗하고 반짝거리고, 윤기 나는 검은색이던 신발은 너덜거리고 흠집이 났으며, 밑창이 떨어지고 먼지가 잔뜩 묻은 데다가 얼굴이 비칠 일 없는 회색이 되어있었다. 밑창이 떨어져 나가고 양말이 헤지기까지에는 몇 시간이 걸렸다. 발바닥이 떨어져 나가기에는 며칠이 걸렸다. 정리정돈 씨는 숲과 고속도로에 피로 발자국을 찍으며 걸었다.

집에 온 것은 몇 년 만이었다.

정리정돈 씨는 어쩌다가 집으로 되돌아가려고 생각하게 되었는지 기억나지 않았지만, 언제나 기억하지 못하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는 양 주먹을 주머니에 쑤셔 박았다. 오른손이 잊힌 초대장에 스쳤고, 그는 왜 집으로 가는지 기억해냈다. 정리정돈 씨는 주머니에서 손을 빼내고는 곧바로 잊어버렸다. 실재하는 것이라곤 걷는 것뿐이었다. 도로의 뜨거운 타르 위 맨발. 걷고 또 걷고 또 걷고.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가, 뺐다가, 넣었다가. 낮에서 밤으로 또 낮으로 또 밤으로 또 부서진 유리가 널린 장소를 몇 주에 걸쳐 걸으면서 먹을 것도 마실 것도 할 것도 없지만 걷는 것 외에는 생각할 것도 없이 걸었다.

살면서 처음으로 - 물론, 삶이란 것 자체를 기억해내지 못했다 - 정리정돈 씨의 정신이 한 가지 목표에 집중하였다. 작은 글씨와 큰 글씨이따위로 말하는 녀석 모두가 먼지가 되어 사라지면서, 걷기라는 바로 그 행동에, 아주 일관성 있는 전체에 굴복하였다. 정리정돈 씨는 40일의 낮과 40일의 밤 동안 걸었다.

그리곤 곧 원더웍스(Wonderworks) 바깥에 섰다.

정리정돈 씨는 철책선 앞으로 걸어갔다. 그는 손가락 관절을 하나하나 꺾은 뒤, 그 자리에서 뛰어올라 서로 맞물린 철망을 붙잡았다. 정리정돈 씨는 살갗이 벗겨진 발을 발판에 쑤셔 넣었고, 잿빛 금속이 곧 붉게 물들었다. 그는 계속해서 철망을 타고 올라가다가, 꼭대기에 다다르며 레이저 와이어를 붙잡았다. 정리정돈 씨는 방금 손에 난 구멍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는 걸 보며 조용히 미소지었다. 그는 둥글게 감긴 가시철조망을 넘어가서는, 몸을 둥글게 말아 반대편 바닥에 떨어졌다. 충격에 어깨가 빠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희미하게 웃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불편한 으그적거리는 소리를 내며 빠진 어깨를 끼워 맞췄다. 정리정돈 씨는 양팔을 하늘을 향해 쭉 뻗었다. 신선한 성흔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정리정돈 씨는 손가락을 빨았고, 입안 가득 쇠 맛이 퍼지는 걸 느끼며 미소지었다. 그는 건물을 향해 걸어갔다. 건물 앞에 서자, 유리문이 양옆으로 알아서 열렸다. 정리정돈 씨는 텅 빈 현관으로 들어가며, 흰색 대리석 바닥을 진홍빛으로 물들였다. 안내 데스크에는 아무도 없었다.

정리정돈 씨는 책상 위의 초인종을 울렸다. 답은 없었다.

상관없었다. 그는 몸을 돌려서 원더웍스의 미로 같은 복도로 향해서, 목표 없이 수많은 문들을 비틀거리며 지나쳤다. 인테리어는 일관되게 ‘반짝’였다. 대리석에서도, 유리에서도, 수 천 개의 장난감 상자에서도 전부 광택이 나고 있었다. 모든 것에 빛이 반사되고 있었다. 정리정돈 씨의 발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졌다.

정리정돈 씨는 복도를 둘러보고는 작은 코기 떼에 둘러싸여 있다는 걸 깨달았다. 개들은 서로를 향해 흥분한 것처럼 짖어대더니, 사방으로 뒤뚱뒤뚱 흩어졌다. 몇몇은 정리정돈 씨를 지나쳐 가다가, 그중 하나가 그의 발치에서 멈추더니 관심을 끌려는 듯 앉았다. 정리정돈 씨는 손에서 바닥으로 피를 뚝뚝 흘리며, 개를 노려보았다.

제레미는 유익하게 짖으며, 손님을 주인에게 안내하기 시작했다.

정리정돈 씨는 개가 마구 흔드는 꼬리를 계속 쳐다보며, 그 경쾌하게 움직이는 짧은 다리 뒤로 발을 질질 끌며 걸었다. 개는 복도를 이리저리 누비더니, 마침내 철학박사 이사벨 헬가 아나스타샤 파르바티 원더테인먼트 5세 사무실의 큼직한 나무문 앞에 멈추었다. 그는 정리정돈 씨를 향해 돌아서서는, 작별의 의미에서 한번 짖고는 다른 일을 하러 떠났다.

정리정돈 씨는 손잡이를 돌려 문을 열었다.

이사벨은 초코바를 먹으며 바닥에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는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고는 문가에 서 있는 남자를 보았다. 처음에는 자신보다 키가 크다는 것이 색달랐다. 게다가, 짙은 빨간색 딸기 아이스크림을 입과 발, 손에 잔뜩 묻힌 상태였다. 왜 발에다가 딸기 아이스크림을 묻혔을까? 이사벨은 넓고 탁 트인 사무실에 울려 퍼지게 소리쳤다.

“왜 아이스크림 위를 걸었던 거에요?”

정리정돈 씨는 그를 향해 천천히 걸어가며, 으르렁거리듯 질문을 던졌다.

“네 사랑스러운 애비는 어딨어?”

“돌아가신 것 같아요!”

정리정돈 씨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이사벨은 그가 굳어지더니 무릎을 꿇는 것을 보았다. 그는 손에 묻은 딸기 아이스크림을 머리에까지 잔뜩 묻히더니, 지붕을 쳐다보면서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이사벨은 큰소리에 놀라 손가락을 귀에 쑤셔 넣고는 눈을 감았다. 곧, 비명은 큰 소리로 킥킥대는 웃음소리로 바뀌었다. 이사벨이 눈을 떴을 때, 엠마 아일소프브라운Emma Aislethorp-Brown이 아마도 딸기 아이스크림을 너무나 사랑하는 것 같은 남자와 그 사이에 서 있었다. 정리정돈 씨는 킥킥대며 옆으로 쓰러지더니, 가벼운 경련을 일으키며 바닥에 누웠다.

그리고는 멈추었다. 정리정돈 씨는 다시 손가락을 튕기더니, 제 발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피를 눈가에 문지르고는 자신과 소녀 사이에 서 있는 여성을 살펴보았다.

“댁은 뉘슈?”

“엠마 아일소프브라운. 원더테인먼트 양의 조수. 당신은?”

“정리정돈. 그의 아버지의…‘생산품’. 생각해보면 저 여자도 마찬가지지. 어떻게 보면 남매라 할 수 있을 거야.”

정리정돈 씨는 입술 사이로 피에 절은 치아를 내보이며 크게 미소지었다.

“온다고 말은 했었어. 편지를 잔뜩 보냈거든.”

엠마는 반대편에 선 남자를 분명하게 바라보았다.

“무엇을 원하는 거죠?”

“인사나 하러 들렀지. 늙은이한테 새 장난감이나 달라고도 할 겸. 내가 가지고 있던 것 중 하나가 망가져서 말이지. 새로운 게 필요했어. 하지만 그가 여기 없다면 어찌할 방법이 없겠네.”

정리정돈 씨는 엠마의 뒤에, 아직도 초코바를 씹어먹고 있는 이사벨을 보았다. 늙은이가 죽었다. 여기서 더는 할 일이 없었다.

정리정돈 씨는 이젠 화가 나있지 않았다. 화를 낼 사람이 남아있지 않았다. 그는 미소를 지었다.

“어쨌든 난 보증 기간이 끝나버렸거든.”

그는 돌아서서는 발을 질질 끌며 문을 나섰다. 진홍색 자취가 그 뒤로 남았다.


우리는 이미 지나간 슬픔으로 우리 기억의 짐을 무겁게 하지는 마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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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복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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