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병춘의 기이한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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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병춘. 29세. 무진대학교 약학대학 졸업. 삼수에 현역입대까지 했기에 이제 막 졸업한, 사회생활을 해 본적 없는 남자다.

안타깝게도 연애는 해 본적이 없었다. 남중 남고 군대에 약대 수업을 따라가는데 급급했다는 핑계가 있긴 하지만, 곧 서른이 되는데 여자 손 한번 안 잡아봤다는 건 그를 가끔 서글프게 만들었다.

"자기야, 지랄말고 가자."

"어, 그러니까. 전 유병춘이 맞긴 한데…전 당신을 모르고…당신같은 사람이 절…그러니까…"

"에베베베. 시발, 이런 점은 똑같네. 말 똑바로 못해?"

그러니까 자신을 유병춘의 여자친구라 소개하는 여자는 뭔가 착각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유병춘은 침을 꿀꺽 삼켰다. 특히 저런 이쁜 여자는 자신이 기억하지 못할 리도 없었다.

"크흠, 전 여자친구를 사겨본 적이 없는데요."

그 말에 여자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여자는 그 표정마저도 아름다웠다. 유병춘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헤 벌렸다.

"…마스터 씹새끼. 기억 조작을 해도 찌질이를 만들어놨어."

"내 기억이 조작된 거라고요?"

"그래. 원래 넌 이 나라 최고의 천재 화학자였어."

"전 삼수해서 겨우 약사가 되었는데요. 천재까지는 좀…"

"그게 조작된 기억이란 말이야. 난 그 기억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는 몰라. 네 기억에서 옳은 건 네 마음 뿐일 거야. 정확히는 인성이라고 해야 하나."

"잘 이해가 안가는데요."

"쉽게 설명해 줄게. 모든 인간은 양면이 존재하지. 마스터가 행한 실험은 그 양면을 분리시키는 거였어."

문세희는 양손을 펼쳤다.

"넌 천재 화학자였지만, 순수하고 도덕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었지. 헌데 삼대천의 실험은 대부분 인간을 위한 것이었고, 인체실험은 필수적이었어."

"…제가 거부했나요?"

"당연하지. 마스터는 처음엔 널 회유하려 시도했고, 그게 되지 않자 널 약물에 중독시키기도 했어. 하지만 그 모든 행보에도 불구하고, 넌 굴하지 않았어. 변칙성 하나 없는 나약한 인간이 그걸 다 버텨낸 거야. 결국 마스터는 최후의 수단으로, 네게서…유병춘에게서 착한 마음만을 빼내기로 결심했지. 그 실험이 성공했고 그 확실한 증거물이 바로 너야."

"왜 저를 그렇게까지. 인격을 빼내고 가짜 기억을 넣을 정도면, 그냥 제 머리에서 기억을 빼내면 되는 것 아닙니까?"

"네 가치는 네가 가진 기억에 있는게 아니니까. 넌 기술과 실험을 응용하고 적용하는 데 있어 그 어떤 존재보다 뛰어났어. 네 기억이 중요한게 아니라, 네 지능과 창의성이 필요했던 거야. 거기에 네 도덕성은 족쇄였고."

"그럼 절 살려둔 이유는요? 말씀대로라면 착한 전 그냥 필요 없잖아요."

"아바타에 인격을 넣는 작업이 실패하면…백업이 필요하니까. 지금 네 몸은 삼대천에 잔뜩 있는 온전한 육체들 중 하나야. 원래 누군지는 모르지만. 그래서 몸이 그렇게 좋은 거야."

"하지만 실험이 성공했다고…"

문세희는 유병춘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내가 마스터를 배신한 거지. 넌 정확히 2일 후 폐기될 예정이야. 네 몸의 성능이 좋은 편이라 몸은 냅두고 인격만 말살할 예정이었어. 난 널 빼낼거고."

문세희는 유병춘에게 마스크를 건넸다.

"이걸 써야 빠져나갈 수 있어. 마스터는 좀 돌아버린 사람이라서, 그 사람 앞에서 기관지를 무방비하게 노출하고 있으면 무슨 짓을 당할 지 모르거든."

"정말 무서운 사람인가 보네요."

유병춘은 마스크를 썼다. 그와 동시에, 총을 든 사람들이 뛰어들어왔다. 문세희는 그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안녕?"

"문세희. 귀하의 행동은 삼대천 생활건강에 대한…"

"아, 제발 좀. 내가 삼대천에 가져다 바친 동물이 얼만데. 거기에 니들 시키는 데로 죽인 사람은 또 얼마고. 그런 내가 남자 하나 가져가는게 그렇게 꼽냐?"

"그, 그렇게 하면 화내시지 않을까요? 총도 들고 있는데."

문세희가 중지를 치켜들자, 그들의 대장으로 보이는 사내가 입을 열었다.

"당신을 화나게 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나 실험체는 제공드릴 수 없습니다."

"뭐, 나도 당신네들 상관에게 불복종할 생각은 없어."

문세희는 그 말에 두 손을 들며 유병춘에게 다가왔다.

"마스크 똑바로 썻어?"

"네."

"내가 마스터를 싫어하긴 하지만, 배운게 몇가지 있거든 꽉 잡아."

문세희는 말과 동시에 유병춘을 껴안았다. 너무나 빠른 동작이라 유병춘은 반응할 수 없었다. 그와 동시에 자욱한 연기가 가득 피어올랐다.

"정문 봉쇄해! 발포는 금지다! 그 둘 모두 마스터께서 상처 없이 데려오라고 하셨다!"

"이거 참. 총알 한발 안 쏘고 날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다니. 조금 성질이 나네."

"좋은 거 아닌가요?"

"닥치고 있어."

"…"

문세희는 자신보다도 큰 남자를 들쳐메고도 엄청나게 빠른 속도를 유지했다. 특히 수 미터나 되는 벽을 다리만으로 타고 올라갈 때에는 유병춘이 오히려 기절할 뻔 했다. 한참 지나고서야 문세희는 유병춘을 내려주었다.

"후우. 여기쯤이면 잠시 쉬어도 되겠지."

"으읍…"

"멀미나?"

"이런 경험은 처음이라서요. 그 가스는 뭐였나요?"

"나름 독가스였는데, 마스터의 부하란 새끼들은 하나같이 독에 내성이라. 기대도 안했지만."

"그랬군요. 저도 힘들었는데, 절 업고 뛰신 세희씨는 괜찮으신가요?"

"너도 원래 몸에 비해 무거워서 좀 힘들었어."

"원래 몸도 자주 업혔나요?"

"별게 다 궁금하네. 엉, 내가 업고 다녔지. 병약한 화학자님을."

유병춘은 괜히 부끄러워졌다. 업혔을 때 급박한 상황이었지만 그녀의 품에서 포근함과, 왜인지 모를 친숙함을 느꼈었다.

"그나저나. 궁금한 게 있어요. 가짜 기억이라고는 하셨지만, 솔직히 제 기억에는 빈틈이 없어요. 유년시절의 기억부터 시작해 자질구레하고 디테일한 기억들이 다양하게 있어요. 몇살 때 뭘 했고 하는…그 정도까지 정교하게 속이는 게 가능한 건가요?"

"글쎄. 가능은 할 꺼야. 남의 기억을 그대로 이식하면 되니까. 다만 네 경우에는 좀 특별하지. 네 의식세계의 성품을 그대로 유지시키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에 가짜 기억을 만든 거야. 네 의식이 변형되지 않도록 만드는 방부제로."

"제 착한 마음이 유지될 수 있는 환경으로 인공 기억을 만들었다고요?"

"그래. 정확히는 삼대천이 만든게 아니라, 네 의식이 만든 거야. 네 선함을 지켜야 한다는 자기방어기제에 의해, 기억을 스스로 생성해낸 거지."

"그럼 약사나 이런 것들은…"

"네 인격을 형성하는데 필수적이었던 것들은 결국 지우지 못한 채로 옮겼으니, 무의식에 네 인격을 보호하는 데에 꼭 필요한 기억이 남아있었나 보지. 거기에 내가 말끔히 지웠졌다는 건 좀 섭섭하지만. 나도 전문가는 아니라 잘 몰라. 진짜 전문가를 만날 테니 그때 물어보던가."

유병춘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자신의 기억에 이상한 점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의 말을 반박할 명확한 증거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 확실한 건, 그녀가 보여준 초인적인 신체 능력은 진짜라는 것이다. 이 정도 능력을 가진 자가, 자기를 놀리기 위해 이런 거짓말을 지어냈을 가능성 역시 매우 희박하니까.

"일단 제가 당신이 하는 모든 말을 믿을 수는 없다는 걸 알아주셨으면 좋겠어요."

"…당신? 아, 이름 안 알려줬지. 문세희라고 한다."

유병춘은 순간 움찔했다. 세희라는 말을 들은 순간 머리가 아파왔다.

"왜 그래?"

"아뇨. 잠깐 머리가 아파서. 세희씨. 세희씨의 말이 전부 진실이라고 가정해 봅시다. 만약 정말 그렇다면, 이건 너무 무모한 거 아닌가요? 마스터, 그리고 삼대천이 그렇게 무서운 집단이라면서 모든 걸 포기하고 적대하신다는게 제 기준에서는 도저히."

유병춘의 말에 문세희는 유병춘을 빤히 쳐다보았다.

"…사랑하니까."

"사랑이요?"

문세희는 피식 웃었다.

"아, 모태솔로는 모르려나?"

"그게 무슨."

유병춘이 순간 발끈하자, 문세희는 입꼬리를 올렸다.

"내 가슴 보고싶어? 처음 볼 때부터 은근히 시선이 그쪽으로 가던데."

"아아아아 아뇨! 아니, 그게 아름다우시긴 한데 그런 음흉한 생각은 하지 않았달까…"

문세희는 유병춘의 반응에 대놓고 씨익 웃었다.

"아, 진짜 처음 만날 때 같네. 귀여워."

"제가요? 한번도 귀엽단 말 못들어봤는데…"

"네 원래 얼굴은 귀여운 편이었어. 지금 얼굴이 솔직히 더 잘생기긴 했지만."

"음. 그래요?"

"잘생겼다고 하니까 좋아하는 것 좀 봐. 병신같아. 잘생기긴 했는데 지금 얼굴은 내 스타일은 아니야. 아무튼, 더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어. 일단 안전한 곳으로 가야 해. 내가 아는 사람이 한명 있으니 따라와."

"저, 궁금한게 있는데요…"

유병춘의 질문에 문세희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손목의 장치를 가르켰다.

"궁금한 게 많겠지. 황당하기도 할 거고. 네 기억은 모두 정상성에 국한되어 있을 테니까. 하지만 시간이 없어. 삼대천이란게 뭐하는 곳인지는 다음에 알려줄게. 신호가 왔거든."

"아뇨, 그게 아니라. 저랑 사귀는 사이였다고 하셨잖아요…"

"응. 근데?"

"혹시 진도가 어디까지 나갔나 해서…"

문세희는 한심하다는 듯 유병춘을 쳐다보았다.

"진지하게 하는 말이야?"

그 말에 유병춘은 몸을 움찔 떨었다. 문세희는 사납게 유병춘을 노려봤다.

"물고 빨고 핥고 다 했어. 그 몸뚱이랑은 한 적 없지만. 원래 너는 이렇게…근육질은 아니거든. 답이 됐어? 그럼 따라와 새꺄."

"넵."

문세희는 거침없이 걸었다. 유병춘이 따라가기에는 너무 빠른 속도였다. 허나 신기하게도, 유병춘은 문세희의 걸음걸이를 금방 따라잡을 수 있었다. 도저희 평생 앉아서 연구만 하던 이과생의 움직임이라 보기는 어려웠다.

"자꾸 힐끔거리지 말고 궁금한 게 있으면 말해."

"저, 세희씨 직업이 정확히 뭔가요?"

"이제야 나에 대해서 궁금해 하는 모양이야. 어짜피 기억을 복원하면 알게 되겠지만, 가는 길에 알려주는 것도 재밌겠네."

"기억을 복원한다고요?"

"그래. 지금 만나러 가는 사람은 사람의 의식을 연구하는 사람인데, 무의식 속에 기록된 기억을 끄집어낼 수 있다고 해서 찾아가는 거야. 네 진짜 기억 말이지."

유병춘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지금까지 평생을 살아온 기억이 거짓이고, 진짜 기억을 얻으로 간다라…설령 그것이 진짜라 해도, 본인의 진짜 기억보다 가짜 기억이 더 현실같을 것 같았다. 문세희 같은 대단한 여자와 사귀는 남자라니. 그로서는 상상이 잘 가지 않았다.

"물음에 답하자면 난 사냥꾼이야. 물론 일반적인 동물 따위를 사냥하는 건 아니고, 변칙적인…그니까 초능력을 지닌 귀한 동물들을 사냥하는 사람이야."

"……"

"황당하지? 기억이 복원되면 알게 될 거야. 이제 거의 다 왔어. 오토바이 탈 줄 알아?"

"네. 조금이지만요."

"…그건 안 잊었나 보네."

가면

문세희와 유병춘은 숨겨져 있었던 오토바이를 타고 오랜 시간 주행을 했다. 그들이 달리는 도로는 지평선이 보일 정도로 끝도 없이 이어져 있었다. 이런 곳을 탈출로로 사용하다니, 유병춘은 이상하다고 느꼈다.

"아직 멀었어요? 한국에 이런 곳이 있을 줄은 몰랐어요."

"여긴 한국이 아니거든. 엄밀히 따지면 한국이 맞긴 한데, 여긴 지옥의 트랙이란 곳이야. 특정 속도 이상으로 달려야만 길을 통과 할 수 있는 지랄맞은 곳이지."

"헉."

"일반인은 오토바이 같은 것이 없으면 탈출 할 수 조차 없어. 여기서 통과 할때까지 달리기 훈련을 하기도 한다고 듣긴 했어. 미친 놈들이지."

"허걱."

"허걱 이지랄. 유병춘 얼굴일땐 귀엽기만 했는데, 너같이 생긴 애가 그러니까 좀 깬다."

"저도 유병춘인걸요. 그런데 그때 그 무서운 사람들은 왜 안 쫒아오는 거죠?"

"설마 여기로 탈출할 거란 생각 자체를 못한 거겠지. 그래도 방심할 순 없어. 연료가 아슬아슬하니까."

유병춘은 한동안 계속해서 자신보다 앞서서 달리는 문세희를 바라보았다. 기억이 복원된다라. 그렇게 되면 그녀와 어색하지 않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되는 걸까. 처음 느낀 두근거림을, 아무 거리낌 없이 즐길 수 있는 걸까?

헛된 상념이 지속되려는 순간, 풍경이 갑작스럽게 바뀌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분명 낮이었는데, 순식간에 공간이 암전되듯 어두워졌다.

"성공이네. 이거 주행시간 더 는거 같은데. 더이상 오토바이로도 쉽게 주파하기 어렵겠어. 자, 생활건강 놈들이 쫒아오기 전에 빨리 가자."

문세희는 오토바이에서 내리며 투덜거렸다. 유병춘은 여전히 방금 전 느낀 초자연적인 현상이 준 경이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지만, 문세희가 그를 잡아끌었다.

"강다홍 이년은 뭐 하고 있는거야?"

"꺄악! 언니이! 여기에요! 여기!"

"저기 있구만."

강다홍은 티없이 맑은 얼굴로 손을 흔들며 문세희에게 달려들었다. 유병춘은 흐뭇한 얼굴로 강다홍을 바라보다가 갑작스럽게 따귀를 맞았다.

"왜 그러세요!"

"그냥 때리고 싶었어."

문세희는 그렇게 말하고는 강다홍을 불렀다.


"원래는 저얼대 안되는 건데, 언니 부탁을 모른척 할 수는 없잖아요? 의도도 선하고, 부장님도 이해해 주실 거에요."

"너 어떻게 재단 같은 곳에 입사했냐?"

"헤헷. 도와주면 감사합니다가 맞는 거 아닌가요?"

"고맙긴 한데. 이렇게 막무가내인줄 알았으면 부탁하지도 않았다. 난 분명히 거래를 하겠다고 한 거였어."

"아, 기억복원을 하는 건 아주 좋은 실험 데이터가 될 거에요. 그것만으로 충분한 사례이랍니다. 정식 절차였으면 오히려 제가 사례금을 줘야 할 지도 모른다고요."

문세희는 피식 웃었다. 그럴 리가 없다. 이 정도의 기술은 재단의 기밀임이 분명했다. 강다홍의 말은 문세희를 배려해주는 것었다. 아무리 생명을 구해준 적 있다지만, 재단이 무섭지도 않은 걸까.

"여기 앉으면 기억이 복원될 거라는 거지?"

"네. 무의식에서 기억을 끄집어낼 거에요. 일부 데이터가 소실될 수는 있지만, 인간의 성격과 기억은 뗄 수 없는 관계니까요. 반드시 복구 가능할 거에요."

"좋아. 그럼 너, 와서 앉아."

문세희가 유병춘을 부르자, 유병춘은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저, 저는 제 기억도 소중한데요. 원래 기억이라고 해도, 결국 제 입장에서는 전혀 새로운 기억이잖아요."

"미안하지만 그게 진실인걸."

유병춘은 잠시동안 문세희를 바라보았다.

"세희씨. 절 봐요. 결국 이 몸은 세희씨가 사랑하는 제가 아니잖아요. 기억마저도 아니고. 그냥 다른 사람이라고 봐도 되는 거에요. 기억을 복원시키려는 이유는 결국 당신 욕심 때문 아닌가요?"

유병춘이 소리치자 문세희는 눈을 감았다.

"…맞아. 나 역시 이기적인 년이지. 그렇게 해서라도 순수한 널 가지고 싶었어. 날 사랑하는 착한 너를. 난 너가 가진 그 성격에 반한 거였고, 네가 선한 마음을 가진 채로 다시 기억을 복원한다면 무조건 날 사랑할 테니까."

"내 원래 몸은 어떻게 된 건데요. 그애는 몸도 기억도 당신이 사랑하던 유병춘 그대로일 것 아니에요."

"지식과 무자비함을 가진 남자가 되었지. 여전히 매력적이지만, 더이상 날 사랑할 감정은 남아있지 않아. 난 너의 몸이나 능력 때문이 아니라 착한 마음씨 때문에 사랑했던 거였고, 그는 더이상 그걸 가지고 있지 않아."

문세희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유병춘은 자신도 몰랐지만, 여자의 눈물에 약했다.

"…지금 제 기억은 어떻게 되는 거죠?"

강다홍은 잠시 고민하더니 말했다.

"사라지지는 않을 거에요. 하지만 원래 의식이 생기는 이상, 그건 가짜 기억이었다는 것이 확연하게 드러날 테니까, 사실상 의미 없는 기억이 되겠죠."

유병춘은 한참 동안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하겠습니다."


강다홍은 유병춘의 머리에 여러가지 장치를 달았다.

"이제, 이 스위치를 내리기만 하면, 의식이 살아 돌아올 거에요."

강다홍의 말에 유병춘은 문세희를 쳐다보았다.

"이거 끝나면 저랑 사귀는 건가요?"

"당연하지. 계속 보니 이 얼굴이랑 어벙한 성격도 나름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네. 같이 맛있는 거 많이 먹으로 다니자."

"그 삼대천 문제는, 제가 기억을 다 되찾으면, 천재성도 생길 테니, 그걸 이용해서 빛을 갚는 걸로 하죠. 유능한 인재가 두명이나 생기는 걸 그 마스터란 사람이 마다하지는 않을 거 아니에요?"

"…그건 네가 의식을 회복하게 되면 알겠지만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니야. 그래도 마음만은 고맙네."

"그럼 시작할게요!"

"모두 동작 멈춰! 생활건강 타격팀이다!"

강다홍이 스위치를 누른 순간, 전투복을 입은 사람들이 뛰어들었다. 문세희는 이상을 느낀 즉시 총을 들었지만, 그 수가 너무 많았다. 삼대천 생활건강의 타격조는, 사냥꾼을 잡는 사냥꾼들이었다. 당연히 그 수준이 뛰어나다. 문세희는 저항했지만, 결국 포박당했다. 강다홍 역시 마찬가지. 포박을 마친 삼대천 팀장은 고개를 푹 숙인 유병춘에게 다가갔다.

"세희씨. 기어코 일을 저지르셨군요. 이 실험체의 육신은 최중요 샘플입니다. 이게 뭔지는 모르겠지만…음. 전력이…?"

그 순간이었다. 아주 찰나의 순간, 고개를 숙이고 있던 유병춘은 다리를 이용해 칼을 빼앗아 발가락으로 칼을 잡고 그대로 팀장의 경동맥을 쑤셨다. 피가 비산했지만, 팀장은 크르륵 거리는 신음소리만 낼 뿐 죽지 않았다.

"역시 안 뒈지는 군. 급소를 쑤셨는데."

"컥…당신은 이미 죽었…인격도 말소…"

유병춘은 팀장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그의 목을 졸랐다.

"나머지 떨거지 새끼들아. 마스터에게 전해. 볼일이 끝나면 직접 갈 테니까, 한달 정도의 시간을 주라고. 지금 포박한 여자들도 데리고 가지 마. 같이 해야할 일이 있어."

그 말에 삼대천 생활건강의 나머지 팀원들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총을 든 채로 팀장을 바라보았다. 팀장이 힘겹게 고개를 끄덕거리자, 그제서야 팀원들은 총을 내리고 순식간에 사라졌다. 유병춘은 낄낄거리며 비웃었다.

"이게 팀이냐? 팀장을 그냥 버리네?"

"팀장의 말은 절대적이니까요. 죽이십시오."

"말 안 해도 그래줄 거였어. 고통 없이 죽여줄게. 너도 마스터의 장난감일 뿐이었을 테니까."

"…감사합니다."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유병춘은 칼로 깔끔하게 팀장의 목을 베었다. 팀장의 머리가 떨어졌고, 잘린 목의 단면에는 피거품이 일었다.

"후우…고맙다. 유병춘. 덕분에 살아 돌아왔다. 뒤지는 줄 알았네."

유병춘이 섬뜩한 웃음을 지었고, 이를 본 강다홍은 기절할 듯한 얼굴로 문세희를 애타게 불렀다.

"조, 좆됐다! 언니, 기특대, 기특대 불러요! 아, 언니는 재단 사람 아니지…어떡하지? 머리랑 수염 밀어서 못 알아봤잖아!"

"누군데 그래?"

"박신효! 저도 실물은 처음 봐요! 진짜 무서운 사람이라고 들었는데…"

문세희는 진작에 포박 따위는 푼 상태였지만 섣불리 움직이지 않고 유병춘을 관찰했다. 문세희는 유병춘…아니, 그였던 존재를 보며 온 몸을 떨었다. 눈빛이 바뀐 것만으로 사람의 분위기가 이렇게까지 바뀌다니. 사냥꾼으로서의 본능이 위험을 알렸다.

저 남자는 지독하게 위험하다고. 적어도 자신이 아는 남자친구의 기억이 부활한 것이 아님은 확실했다.

"아, 안녕하세요? 하하, 저희 초면이죠? 저는 현재 분석심리학부 소속인…아악!"

강다홍은 어색하게 인사를 건넸다. 남자는 강다홍의 목을 잡고 들어올렸다.

"케헥! 수, 숨이…"

남자는 살벌한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강다홍. 반가워. 딱 하나만 알려주면 모두가 행복해 질 거야."

"헤헤…조금만 살살…흐응!"

"천세윤이 어디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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