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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3/1

세상이 불타고 있었다.

알토 클레프는 상대적으로 안전한 제67기지에서 불을 보았다. 검고 녹색의 불이었다. 탈출한 SCP 13개체로 인해 일어난 일종의 이상한 화학적 반응의 산물이었다. 불길은 이미 미국 중서부를 삼켰다. 러시아 툰드라 지대, 아프리카의 몇몇 도시들, 아타카마 사막에서는 더 많은 사고가 일어났다. 일종의 엿같은 변칙적 연쇄 반응이었다.

아직 재단의 긴급 사태 계획은 진행 중이었다. 무엇보다도, 대부분의 뉴스들이 봉쇄되었다. 몇몇 마을은 기억소거제를 살포해야 했다. 48시간 내에 모두 격리될 예정이었다.

클레프는 상급감시사령부가 갑자기 SCP-2000을 고치는데 자원을 들이붓는다는 말을 들었다. 그는 그게 효과가 있으리라곤 기대하진 않았다. 클레프는 지난 10년간 2000을 고치는 일을 전두지휘해 왔다. 그러면서도 시도만 해왔다는 게 사실이지만…

그의 새 조수가 귀찮게 했다. “O5-12가 당신을 보려고 도착했답니다.” 그녀가 말했다.

클레프는 애덤스를 그리웠다. 몇 년 전 알파-9이 실패하여 애덤스가 죽은 이후, 이전과 똑같았던 부분은 거의 없었다. 윗분들이 그에게 배정해준 새 사람들은 애덤스와 비교도 할 수 없었다.

“좆까시라고 해.” 클레프가 말했다.

“바로 들여보내드리겠습니다.” 조수가 대답했다. 그렇군, 그녀는 애덤스와 조금은 닮았을지도.

클레프는 불타오르는 불길을 보며 기다렸다. 그의 일부분은 거기서 나와, 진실을 찾고, 그걸 가지고 뭔가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좋든 나쁘든, 그 ‘일부분’은 보통 짓이겨져 제압되었다.

12가 들어왔다. 평소답지 않게 혼자였다.

클레프는 굳이 돌아봐서 맞이하지 않았다. “그래서 어떤 망할 것을 원하십니까?”

“모든 O5들에게 그렇게 말하는 거예요?” 12의 목소리처럼 들리지 않았다.

클레프가 뒤를 돌아봤다. 아는 얼굴에 눈이 가늘어졌다. “너.”

“하.” 12가 말했다. “저들에게 당신이 절 알아볼 거라 말했죠… 아무도 제 말을 듣지 않았지만. 특히 제 승진 이후론 정말 안 믿더군요.”

“아-하.” 클레프가 말했다. “만나서 반갑다고 말할 수 있다면 좋았을 텐데.” 반갑지 않았다.

“시간을 뺏진 않을게요.” 12가 말했다. “평의회가 마지막 부탁을 전합니다.”

클레프가 그를 바라봤다. 그는 놀랍게도 놀랐다. “뭐? 진심이야?”

“일이 끝나면요? 원한다면 나가도 좋아요. 그게 거래 조건이에요.” 12가 몸을 앞으로 숙이고, 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그는 그걸 클레프에게 건넸다.

12가 종이 한 장을 주었다. 클레프가 읽었다. 거기엔 명단이 있었다. 수기로 작성된. 클레프의 속이 뒤틀렸다. 아니, 차라리 진짜 뒤틀렸으면 싶었다.

“이 빌어먹을 짓을 내가 할 것 같았나 봐.” 클레프가 말했다.

“당연히 하겠죠.” 12가 말했다. “저한테 헛소리하지 마요, 클레프. 제가 당신에게 이러기 싫다는 거 당신도 알잖아요. 꼭 해야할 일이 아니라면 당신에게 부탁하지 않았으리란 것도요.”

“엿 먹어. 너도 나한테 개소리는 못해… 12.” 클레프가 말을 내뱉으며 비꼬았다. “네 개자식들은 종막의 ㅈ가 된 상황이 아니면 이 일을 시키지도 않잖아. 그러니까 끝나고 나가라는 말은 하지도 마. 이 일이 끝나고 내가 향할 장소는 없을 테니까.” 클레프는 종이를 이리저리 흔들었다. “이건 재단 핵심 직원의 기나긴 명단이잖아. 넌 이들을 다 죽이지 않고 아직 재단을 손에 쥐고 있지. 우리 둘 다 이게 무슨 말인지 알고.”

“거기에 O5는 없어요.” 12가 말했다. “어쨌든 대부분은 없죠… 헤.”

“O5는 좆까라고 해.” 클레프가 말했다. “도 좆까.”

12가 악의없는 미소를 지었다.

클레프가 다시 명단을 보고, 이름을 눈에 담았다. 그는 맨 마지막에 눈길을 멈췄다. “여기서 등신 같은 짓을 했네. 콘드라키는 몇 십년 전에 죽었어. 기어스가 머리에 총을 쐈다고.”

12는 그저 웃었다.

“시발.”


이들은 재단의 핵심 인원들이다, 그래, 하지만 몇 명은 지루할 정도였다.

첫 번째 목표는 앤드류스 “드류베어” 비욘센 박사였다. “변칙 심리학 및 사회 이상성 전문가”. 고위 보안 인가를 가졌지만, 그걸 써먹은 일은 많지 않은데다가 잘 알려지지 않은 많은 SCP들 일을 했다.

비욘센은 고위직 재단 연구원이라기엔 극단적으로 평범했다. 반반하게 생겼고, 전문적이고, 안정적인 사람. 망할, 이 사람이 더 암살에 어울려 보일 지경이다.

클레프는 마지못해 스스로를 되돌아보며, 왜 상급감시사령부가 자기에게 일을 맡겼는지 궁금해했다. 보통 암살도 아니고, 이 특정 인원 암살을 말이다. 이 명단은 대부분 고위 연구자들이지만, 서로서로 연관성도 희미했다.

확실히, 명단은 조직되어 있었다. 왜? 어떻게? 왜 비욘센 같은 사람이 들어가 있는 거지?

끔찍한 스웨터 조끼를 좋아하긴 했지.

그 날 아침, 비욘센은 제19기지 주거 복합 구역에서 본인 집의 침실 바닥에서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 사인은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편안하게 갔지만, 그의 침실 벽은 가짜 피가 잔뜩 뿌려져 있었다. 그의 스웨터 조끼는 비욘센의 주변에 힐난하듯이 걸려 있었다. 흉물스러운 크리스마스 무늬. 눈이 피곤할 만큼 형광빛. 끔찍할 정도로 난무하는 페이즐리 무늬. 그리고 메모 한 장.

우린 참을 만큼 참았다, 베온센!
이건 모든 재단의 범죄자를 향한 경고이다.
참회하라, 아니면 같은 운명을 맞닥뜨리리라.

우스꽝스러웠지만, 이 초반에서 이건 좋은 일이었다.


다음은 칼라일 악투스 이사관이었다. 클레프는 악투스를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멀찍이서 말이다. 악투스는 상급감시사령부에 대한 충성심으로 명성/악명이 높았다. 확실히 이 명단에서 벗어날 정도로 충성스럽지는 않았다.

클레프는 이번엔 좀 교묘하게 처리하기로 결정했다. 이런 재단 고위직들의 죽음에서 규칙이란 꽤나 빨리 구성되어지기 마련이다. 이렇게나 일찍이 패를 보일 필요는 없었다.

고맙게도 해결책은 간단했다. 악투스는 몇 년 전부터 백혈병으로 죽어가는 중이었다. O5 평의회는 약을 제공하기는 했지만, 너무 좋은 것은 주기를 거부했다. 이들은 언제던 악투스를 치울 수 있었다.

이들이 클레프에게 일을 맡겼으니… 예정된 약물 투여량을 살짝 조정하기는 약간의 표준 서류 절차로 덮으면 간단할 것이다. 악투스 이사관은 오후에 죽는다.


다음은, 케이트 맥티리스 이사관이다. 두말하면 입 아플 정도로, 클레프가 존경하는 인물이었다. 그녀는 한 때 UIU의 언론 담당자 시절에 쌓은 어느 정도의 완고함과 표준화 능력을 발휘하여 재단 전문지의 확장에 강하게 로비를 펼쳐왔다.

연막작전을 유지하려고, 클레프는 계속해서 단순하게 갔다. 그는 케이트의 커피에 독을 탔고, UIU의 옛 동료에게서 온 편지를 위조했다. 이 정도로는 조사관을 만족시키긴 못하겠지만, 그게 목적이었다.


클레프는 빠르게 넘어갔다. 이 죽음의 천가 같은 개짓거리를 명단을 끝날 때까지 오랫동안 해나가려면 그래야만 했다. 엉성할 정도로 빠르지는 않되, 그 근처에서 넘나들었다.

진 키류는 그녀 자신이 전문적으로 설계한 통제 메커니즘이 한꺼번에 고장나자, 그녀의 나비들에게 죽었다.

랄프 로제는 격리 실패로 사망하여 자신의 무능력에 대한 대가를 뒤늦게 치뤘다.

에이버리 솔레이스, 그림자에게 삼켜지다.

로즈 라벨레, 프로그램 상으론 비극적인 사고사.

퀵은루븐 할리팍스, 서류 상으론 비극적인 사고사

마리아 존스는 음독자살.

첼시 엘리엇, 식물학적 치료제에 중독, 그녀 내부의 작은 태양에 잡아먹히다.

사이먼 글래스, 괜찮다고 했는데 안 괜찮아진 요원에게 살해당하다.

장고 브리지 고독사하다. (아니면, 누구든 최대한 알아낼 수 있는 바가 그렇다.)

에버렛 만, 자신의 유난히 바보 같은 매드 사이언티스트 프로젝트를 진행하다가 바보같은 자신을 죽여달라 요청하다. 엄밀히 따지면 퇴역되었다. 사족, 이젠 주변에 러멘트가 없었다.

열댓명은 되는 이름들. 확인, 확인, 확인, 확인, 확인…

클레프 마음 속 자그마한 부분은 너무 쉬워서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는 (이런 것과 같은 일들에) 거의 평생을 대비하며 보냈다.

심지어 잭 브라이트도 놀라울 정도로 쉽게 무너졌다. 그의 부적은 태양을 향해 곧장 발사되었다. 클레프는 그가 드디어 안식을 찾기를 바랬지만, 이게 그의 행동을 합리화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이 한 일에 대해 정신적으로 안정을 얻으려는 행위였다.

클레프는 점점 무너졌다. 그는 이전에도 사람들을, 필요하다면 친구까지도 죽인 적도 있었다. 이것도 같은 일이다. 그저 판이 더 커졌을 뿐이라고. 그렇지?

클레프는 짧아진 명단을 바라보면서, 다음 이름을 읽다가, 얼굴을 찡그렸다. 씨발.


클레프는 기어스가 이사관 사무실에서 평온하게 앉아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의 옆에는 총 하나가 놓여 있었다.

클레프는 망설였다.

“안녕하십니까, 박사.” 기어스가 말했다. “오늘 아침 O5-1의 공식 성명을 받았습니다.”

“…기어스.” 클레프가 말했다.

기어스가 손을 들었다. “설명하실 필요 없습니다. 당신의 임무에 대해선 짤막하게 들었고, 그 필요성을 저도 이해합니다. 당신이 예정된 제 처형을 집행하려고 여기 온 사실을 저도 알았습니다. 제 업무도 순서대로 이뤄졌습니다. 저도 크로우 박사에게 같은 일을 했습니다. 저 스스로의 일은 제가 해내려 했는데, 과정 상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당신에게 처형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클레프는 무슨 말이라도 하려 했지만, 단어가 나오지 않았다.

기어스는 이를 계속하란 뜻으로 받아들였다. “추가로, 제가 다른 재단 인원들과 함께한 자살 서약에 일원임을 설명하는 영상 메시지를 남겨뒀습니다. 이러면 일시적이나마 당신이 앞으로 해나가야 할 암살의 특성을 위장하는 데 도움이 될 겁니다. 제 진술이 받아들여지면, 일정 시간 동안 당신이 의심받진 않을 테니까요.”

기어스는 책상 서랍을 열고 봉인된 소포를 꺼냈다. “당신의 최종 목표물 중에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이 소포는 콘드라키 박사의 현재 위치의 좌표가 담겨 있습니다.”

클레프가 손을 뻗어 소포를 집는 데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다.

“마지막 부탁을 해도 되겠습니까.” 기어스가 자리에 일어나서 클레프의 손에 유리병을 쥐어주었다. “케인 박사를 위해서입니다. 그는 당신에게 이게 자신이 설계한 혼합물이며, 자신에게 행복한 죽음을 주리라고 말해달라 했습니다.” 기어스가 봉투를 집었다. “그가 당신에게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작별인사입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제가 이미 그를 혼수상태로 만들어놨습니다.” 기어스가 말했다. “본인 요청으로요. 당신이 이런 일을 할 때 당신을 보고 싶지 않다고 했습니다. 케인 박사의 육체는 링거액이 연결된 밀폐된 이동장에 있습니다. 이걸 링거액에 넣기만 하면 됩니다.”

“이런 세상에 기어스.” 클레프가 말했다.

“케인 박사가 저에게 비슷한 일을 부탁했습니다. 당신의 감정적인 반응을 경감시키기 위해서였지만, 그러면 즉각적인 의심만 불러일으키리라 판단했습니다. 당신의 시간이 지체되었으니 제 의도와는 정반대가 되었군요. 만약 차질이 생겼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클레프는 케인의 메시지를 읽었다. 그는 눈을 닦지 않으려했다. 기어스의 눈은 언제나처럼 움직이지 않은 채로 있었다.

“잘 가, 기어스.” 클레프가 말했다. “넌 우리 중 최고였어. 저 너머에서 다시 보지.”

“잘 가십시오, 박사.” 기어스가 말했다. “그동안 즐거웠습니다.”

표현, 억양, 음색에 있어서는 전혀 변화가 없었지만, 클레프는 기어스가 즐거웠노라고 말할 때에 순수하고 진실되었다고 필사적으로 믿고 싶었다.

클레프가 총을 들었다.


케인의 죽음은 조용하고, 평화로웠다고 클레프는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그가 원하던 방식대로 가게 되었다.

딱히 달라진 점은 없었다.


케인 이후에, 블레어 로스 연구원이 명단에 있었다. 클레프는 그녀의 이름을 읽고 좆같음을 느꼈다.

그는 로스를 알았다. 클레프가 그녀를 도우러 몇 번씩 꽤나 찾아가곤 했다. 로스는 많은 팀을 굴렸고 그에 걸맞는 높은 인가 등급을 가졌다. 그녀는 공식적으로는 재단 수의사일 뿐이지만, 동시에 로스는 역정보에 다방면으로 참여했다. 마치 사망 증명서를 작성하는 많은 사람들처럼. 끊임없이 일을 맡았던 여러 연구원들이 그녀 앞에 쌓였는데도 아무도 로스를 몰랐다. 그래도 O5 암살 명단은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많이 알았다.

로스를 죽이는 방식은 명확했다. 클레프에겐 소름이 끼쳤지만, 해냈다.

클레프는 케인의 죽음이 로스가 실수로 약 투여량을 바꿔놓았던 것으로 꾸며놓았다. 그녀는 이미 다른 여러 죽음 대문에 감정적으로 결함이 있었다. 충분히 믿어줄 만한 실수였다.

로스는 침실에서 목을 매었다. 오래된 주거 복합 시설에 아직도 남아있던 실링 팬 중 하나에서.

유서는 있었다. 클레프는 유서 만들기를 잘했다. 그것이 그가 해 줄 수 있던 최소한이었다.


팔뚝만했던 명단은 이제 손바닥만해졌다. 앞으로 3명의 이름이 남았다.

다음은 불명예스러운 제19기지 이사관이었다. 틸다 데이비드 무스. 이전엔 뱀의 손에 소속된 마녀였다.

클레프는 무스를 그리 신경 쓴 적이 없었다. 사실 아주 약간은 썼지만. 무스를 그녀같은 사람들과 격리해 둬야 한다고 계속 고래고래 소리치던 자들은 이젠 대부분 조용히 겁먹고 물러나거나 입을 다물었다. 무스에 대해서는 클레프만의 불안감이 있었다. 그녀가 타입 블루라서가 아니라, 타입 블루와 맞아 떨어지는 그녀의 근본적인 인성 결함이 문제였다.

그와 별개로, 클레프는 ‘오만한 자’의 존재도 가정했다.

그래도, 클레프는 지금까지 무관심하게 대해왔다. 무스를 자신의 위치에서 쫓아내는 행위는 무익한 싸움이었다. 그런 결정을 할만한 인간이라면 클레프가 이렇게 될 줄 알기 이전에 이미 했으리라.

클레프가 제19기지에 도착했을 때, 그는 무스 이사관이 통제실 내부에 농성하는 모습을 발견했다. 그녀의 얼굴은 바깥의 보안 모니터에 비춰졌다. 무언가를 기다리면서 지켜보는 모습이었다.

클레프는 말하지 않았다. 그는 침묵하면 그녀가 짜증나서 먼저 행동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무스는 참을성이 없었다. 새 와인이 숙성되기를 기다리기 보단 마셔버리는 사람이었다. (은유적 의미다. 클레프는 무스가 술을 마시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어떤 이사관에게서 보이는 유난히 자기중심적인 방법으로써는 너무 편집증적이었다.) 그리고 신중하게 잘 짜인 어떤 계획도 성급하게 행동하는 참을성 없는 사람을 막을 수는 없었다.

침묵은 15초도 안되는 시간 동안만 지배했다. “당신이 왜 왔는지 알아요.” 무스가 말했다.

“당연히 알겠지.” 클레프가 말했다.

무스의 억지로 지은 미소가 보였다. “세상이 끝나가요.”

클레프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게. 그런가 봐.”

무스의 눈이 흔들렸다. “전 아직도 고위직인 친구들이 있어요.”

클레프는 누가, 왜, 어디에 있는지 물으려 대답하진 않았다. 그는 그저 함정이 작동하기를 기다렸다. 분명 함정이 있다. 이건 너무 공을 들였다.

“여기까지 오면서 많은 시체들을 남기고 오셨죠.” 무스가 말을 이었다. “제가 다음 차례인가요?”

기어스, 케인, 로스를 거치면서 클레프는 이제 뻔한 게임을 진행하고 싶지는 않았다. “혐의는 모두 부인해. 하지만 네가 맞다고 하자고. 날 어떻게 막을 생각이야? 넌 구닥다리 타입 블루고, 난 그린을 서른 명 넘게 해치웠다고.”

“그린들은 언제나 자신감이 과했으니깐요.” 무스가 말했다.

클레프가 웃음을 터뜨렸다. 최근 들어 처음으로 얼글 근육이 플어졌다. 얼굴에서 낯선 기분이 들었다. “네 파일은 읽었어. 너만 말하면 돼.” 사실, 스크린 장비를 보기 전까진 확신을 하지 못했다. 이건 단순히 무스가 클레프를 보려는 목적이 아니다. 무스는 그녀를 확실하게 보고 싶어 했다. 이건 자신감이 넘치는 사람이나 준비하는 일종의 블로펠드나 할 법한 개짓거리였다.

“그럴까요. 하지만 저도 당신의 이력을 알죠. 당신 파일의 모든 문장을 조사했어요. 그리고 드미트리가 당신에 대해서 얘기해줬죠. 당신이 그를 죽이기 전에.”

드미트리의 이름을 무스 입에서 듣는 건 불의의 일격이었다. “어이! 좆까. 스트렐니코프는 내 친구였다고… 그리고 더 중요한 건, 난 스트렐니코프가 죽었을 때 아무 짓도 안했어.”

“콘드라키에 대해서도 그렇게 얘기하셨죠.” 무스가 말했다.

“아니, 윗분들은 콘드라키가 자살했다고 했어. 그리고 그것도 내가 안했어. 기어스가 했지.”

“윗분들도 그리 말했네요.”

확실히 스트렐니코프의 죽음에 관한 얘기는 은폐용 같았다. 평범하고 일상적인 보안 파기 상태. 경비와의 총격전. 스트렐니코프는 눈 먼 총알에 맞아 며칠 뒤 사망했다. 비극이지만 쉽게 피할 만했다. 하지만 이게 진실이었다. 등신 같고, 실망스러운 진실.

만약 무스가 스트렐니코프의 죽음을 클레프 탓으로 돌린다면, 클레프가 보기엔 다른 이들도 그리 생각할 터였다. 그런 예상에 유난히 행복하지는 않았지만, 지금 하는 일을 보면 신경 쓸 일이 아니어야 했다. 하지만 당장은 신경이 쓰였다.

“어쨌든.” 클레프가 말했다. 기다리기 지쳐가던 참이었다. 클레프가 예상한 것보다 무스의 참을성이 더 강한가 보다. “드미트리가 너한테 정말 많은 애기를 했다면, 시간을 낭비해봤자 소용없어. 나올래, 아니면 내가 쳐들어갈까?”

무스는 생각 중인 듯 했다. “음, 제가 손에 있을 때 말이죠, 당신들 중 몇 명은 사소한 별명들이 있었어요. 공백의 박사. 방랑자. 누군지는 아시겠죠. 당신 별명을 대충 들어본 적 있나요?”

클레프는 하품했지만 무스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사람들은 당신을 신살자라 불렀죠.” 무스의 윗입술이 살짝 뒤틀렸다. “자, 신살자 씨. 손이 신의 미궁이라 칭한 곳에서 어떻게 나올지 봅시다.”

보안 모니터가 꺼졌다.

통제실로 가는 문이 열렀다. 그 너머로 보이는 암흑이 뻗어 나오는 모습을 보자 클레프는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클레프는 뒤로 물러서서, 저게 뭐든 밖으로 빠져나오지 않도록 몸을 돌려 비상 자물쇠를 걸었다. 별도 없는 어둠이니 일단 우주는 아니고,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에서, 살아있거나 그와 비슷한 무언가일 것이다. 뻗어 나오려 했다는 점에서 클레프에게 암시를 주는 듯 했지만, 무스가 이름을 말했으니, 클레프에게 아주 약간의 자신감을 주었다.

클레프는 몇 번 크게 심호흡하고, 공기가 없을 상황에 대비해 혈액에 산소를 공급한 다음, 입구를 지나 뛰어들었다. 어찌 됐든 빠져나오는 편이 좋았으니.

그 즉시, 클레프는 외부 차원의 강제된 인식에 공격받았다. 그는 이 공간과 시간 어디에도 없고 어디에든 있어도 여전히 따로 떨어져 있었다. 신이자 한 줌의 먼지였다. 디킨스가 싸질러댄 오래된 개소리와 같았다.

클레프의 오래된 이식물이 삶으로 불타올라 그에게 어딘가로 이동했다 말했다. 전에는 그리 도움이 되진 않았지만, 자주 일어나진 않았다.

어둠이 서서 갈라지면서 클레프는 다시 온전하게 인식하기 시작했다. 돌담장이 클레프 앞에서 뻗어 쳐다볼 수도 없는 불가능한 각도로 꺾여, 그를 둘러싼 몇 십 개의 지평선 너머로 영원히 뻗어있엇다. 클레프가 다른 길을 보려 고개를 돌릴 때마다, 인식 지점이 바뀌면서 길이 완전히 재편성되었다. 여기에서 한 걸음도 떼지 않고 영원히 떠돌기도 가능했다.

클레프가 한숨을 쉬었다. 짜증나는 일에 걸려들었다.

클레프는 정신적으로 끌어올려져, 몇 십 년간 쓰지 않은 고대 이식물의 압박감을 느꼈다. 그리고…

***

무스가 제19기지 특수 보안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안 돼.” 그녀가 말했다. 목소리가 한 옥타브는 올라갔다. “안 돼!”

무스의 경비원이 가까이 다가갔다. “이사관님?”

무스가 가쁜 숨을 쉬며 손톱에 윤기나게 새겨진 룬을 내려다보았다. “일이 복잡하게 됐어.”

“무슨 일입니까?”

“저 개새끼에게 제3의 눈이 있었어.”

***

미궁에서 모습이 들어날 때까지 30분이 걸렸고, 통제실의 방어 시스템을 뚫고 들어오려고 추가로 1시간이 걸렸다. 모두 표준적이고, 개조도 안 된데다가 장비도 형편없어서 이것들을 설계한 사람의 손길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클레프는 마지막 경호원을 쏘고, 한숨을 지으며, 감시실의 문턱을 넘었다.

무스가 클레프를 기다리고 있었다. 꽤나 극적인 모습이다. 언제나 극적이었고, 모든 일이 심판이자, 절대적인 최후의 대립이었다. 왜 이리 스트레스가 심하지? 언제나처럼 살인일 뿐인데.

무스가 서있는 틈에 클레프는 총을 재장전하면서 그녀의 표정을 쳐다봤다. 무스는 웃고 있었다. 그 뒤에 어떤 감정도 없었다.

“너 러멘트랑 닮았네.” 클레프가 말했다.

웃음이 옅어졌다. “고맙습니다…?”

“칭찬 아니야.” 클레프가 잠깐 멈췄다가, 재장전을 마치며 총열을 돌렸다. 여기. 그녀만을 위한 무대에서. 클레프는 자신이 답이 아는 질문과 무스가 묻길 원하는 질문을 물었다. “왜 도망치지 않지?”

“질문이 있어요.” 무스의 가면이 벗겨졌다. 그녀는 진심으로 혼란스러워 보였다. “보고를 받았어요. 당신이 미궁에 있을 때요. 기어스에 관한 내용이었어요.”

클레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재단의 자살 서약이라뇨? 이건 당신 스타일이 아니지만… 당신이 했잖아요. 당신이 한 일인 거 알아요.” 무스가 오지 않는 확답을 기다렸다. “당신이 기어스를 죽일 수 있다면, 저도 잡을 수 있잖아요. 전 싸울 수도 있고, 당신을 해칠 수도 있지만, 전 지겠죠.”

“그래서 질문이 뭐라고?” 클레프가 물었다.

“왜 이러는 거예요?”

클레프가 쓴웃음을 터뜨렸다. 러멘트와 무스는 한 때 친구였다. “걔가 얘기 안해주디?”

“누가 얘기해줘요?”

클레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럼,” 무스가 말했다. “전 제 생각보다 남을 따돌리는 일을 잘 하나 보죠.”

클레프는 어깨를 으쓱했다. “마지막으로 남길 말은? 방금은 유언치곤 수준 이하였어.”

무스는 고개를 갸웃하며, 순간적으로 거만한 표정을 지으려고 했다. “이유가 뭐든.” 무스가 말했다. “당신은 평생 후회할 거예요.”

“악의는 없어.” 클레프가 말했다. 마침내 자신을 짓누르는 순간에 피로감이 몰려왔다. “하지만 난 오늘 내 살아있는 친구들을 죽여야 해. 너? 넌 저녁 먹기 전에 까먹으려고.”

무스는 실제로 상처받은 모습이었다. 세상에. 이런 일도 다 있어라.

클레프는 총을 들어올리고 무스의 머리를 쐈다.

환영이 사라지자, 클레프는 놀라는 척도 하지 않았다. 그는 총을 권총집에 넣고, 주머니에서 명단을 꺼내서, 통제실에서 펜을 찾았다. 제19기지에는 언제나 최고의 펜이 있었다.

***

제19기지 바깥, 무스는 오래되고 더러운 혼다에 쓰윽 들어갔다. 손톱이 밑에 있는 살점까지 태워버려 물집이 잡고 통증이 생겼지만, 곧 나을 일이었다. 미행당한 적은 없다는 확신은 있었지만, 만약을 대비해서 마법의 철사덫을 확인해봤다.

아무것도 없다. 마법의 흔적도 3주 전에 무스가 남긴 최소한의 것만 제외하면 없었다.

무스는 참던 숨을 내뱉었다. 클레프보다 한 수 앞서기는 쉽지 않았다. 그래도 가끔씩은 가능했다.

지나간 일을 돌아보니 수치스러웠다. 지난 몇 년간… 일이 이렇게 돼서는 안됐다. 일이 이렇게 가리라곤 생각도 하지 않았다. 어딘가에서 무스가 망쳐버린 길을 따라 모두가 느리게, 조용히, 돌이킬 수 없게 망쳐버렸다.

머무를 이유가 없다. 석양을 향해 떠나서, 다가오는 세상의 멸망을 막으려는 필사적인 시도를 통해 평의회가 클레프로 하여금 불가역적으로 부숴버리기 전에 고쳐야 할 시간이다. 무스가 재단에 들어온 이유였고, 그녀의 이야기가 이렇게 끝나면 지옥에나 떨어지리라.

무스는 손을 들어, 햇빛가리개를 내리고, 예비 열쇠를 집어서 시동을 걸었다.

차가 한 순간에 불과 열의 구덩이에 집어삼켜졌다.


명단에는 이제 두 명의 이름만 남았다. 그건 차치해두고, 기어스가 준 좌표로 향하는 건 클레프에겐 일도 아니었다. 그 구역은 전기도 안 들어오는 고립무원이었다. 마치 콘드라키가 있을 법 하다고 클레프가 예상한 곳이었다.

클레프는 야심한 새벽에 가장자리를 둘러보기로 했다. 콘드라키는 여기 몇 년 간 있었다. 꽤나 복잡한 함정을 설치할 시간은 충분했다. 클레프가 조사를 마쳤을 때, 세상에 동트기 전의 새벽녘 빛이 흘러넘쳤다.

현실의 틈이 여전히 저기에 있었으나, 조금 미묘해 보였다. 저 멀리, 하늘에 섬광이, 가도가도 가까워지지 않은 채 있었다. 하늘이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세상이 숨을 참고 있는 성 싶었다.

나무들 사이에 공터가 있었다. 공터 중앙에는 판잣집이 있었다. 참 쉬운 길이 없어서, 클레프는 한숨지었고, 산탄총을 들어 올려 나무 사이에서 걸어 나왔다.

노랫소리가 공터에서 울려퍼졌다.

“넌 숲 속을 걸었어.” 목소리가 노래했다. “주변엔 아무도 없고 네 핸드폰은 꺼졌지. 모퉁이 너머에서 네 눈이 그를 보았고.”

그리곤 속삭였다. “트로이 러멘트였지.”

콘드라키의 목소리다.

클레프는 믿기지 않아 선 채 굳어버렸다. 노래가 계속됐다.

“남자가 널 미행하고 있어. 30피트 뒤에 있지. 그가 준비자세를 취하고 확 뛰어와. 널 잡으려고! — 트로이 러멘트가.”

클레프는 노래를 무시하고 상황을 파악하려 했다. 판잣집 뒤에는 들어가거나 나갈 좋은 지점이 보이지 않았다. 이건 콘 같지 않은데. 지하 벙커에 있나?

“이제 널 거의 잡았어. 그 남자 얼굴에 피가 보여. 세상에. 온몸이 피투성이야!”

클레프가 조심스레 판잣집을 둘러보았다. 산탄총은 장전되었다. 자기가 살짝 불안해하는 모습이 보자 클레프는 놀랐다.

“트로에 러멘트에게 사활을 걸고 달아나 — 그가 칼을 휘두르고 있어. 트로이 러멘트야 — 그림자 속에 숨었어 — 슈퍼스타 특수 요원 트로이 러멘트야 — 숲 곳에서 살아 — 트로이 러멘트지 — 재미로 사람을 죽여 — 트로이 러멘트 — 모든 시체를 품고 있어 — 진정한 식인종 트로이 러멘트 —”

클레프는 현관을 찾으려고 판잣집을 돌았다. 활짝 열려 있었다.

오.

콘드라키는 여기 없었다. 그는 이제까지 경고도 하는 중이었다. 안쪽 탁자 중앙에 노래가 울려퍼지는 라디오만 놓여있는 것만 빼곤 판짓집은 버려져 있었다.

트로이 러멘트, 그 사람 가족을 상상해봐, — 트로이 러멘트, 아무도 진짜 이름을 몰라 — 아이스버그처럼 자살했어야 했어 — 트로이 러멘트, 일을 너무 잘해 — 격리성애자 — 트로이 러멘트 — 정점에 올랐어 — 러멘트 이사관 — 그래도 행복하진 못해 — 세뇌당한 재단의 호구 트로이 러멘트 —

그리고 클레프는 그림자가 움찔하는 걸 보았다. 그는 한숨을 쉬며 판잣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림자가 빠르게 움직였다. 그리고 콘드라키가 빛 안으로 들어왔다.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그는 클레프 손에서 산탄총을 뺏었다.

“앉아라 시발 놈아!” 콘드라키가 소리쳤다. 그리고 그 즉시 — “너 러멘트가 아니잖아.”

“아니지.” 클레프가 건조하게 말했다.

콘드라키가 손을 뻗어 음악을 껐다. “ 보냈다고? 그 양반들이 널 틀어잡고 있었을 줄은 몰랐네. 러멘트가 올 줄 알았지. 그 사람들이 소모품으로 생각하는 요원 중 최고니까.”

클레프가 어깨를 으쓱했다. “좋아보이네, 콘.”

“건강하게 지내고 있지.” 콘드라키가 말했다. “수렵과 채집으로 사는 중이야. 엄격한 운동 식이요법도 겸하고.” 콘드라키가 배를 두드렸다. “계속 돌아다니면서 사는 게 중요해. 건강하게 살아야지. 언제나.” 콘드라키가 눈살을 찌푸렸다. “총을 일부러 뺏겨줬군.”

“넌 죽었어.” 클레프는 이상하게 목이 메였다. “기어스가 네 머리에 총을 쐈다고. 기어스가. 그는 실수를 하지 않아. 내가 네 망할 장례식에 있었다고. 난 시체를 봤어. 내가 네 빌어먹을 시체를 납으로 채워넣었다고, 콘.”

“나도 들었어.” 콘드라키가 말했다. “너에게 총알 대부분이 빗나갔다고 말하는 것도 들었지. 너처럼. 너 말을 돌리고 있잖아.”

“너 네가—”

“아니.” 콘드라키가 말했다. “난 널 알아, 널 안다고. 넌 이런 속임수에 걸려들지 않아, 100만년에 한 번 될까말까지.”

“러멘트는 걸려들 거 같고?”

“당연히 걸리지. 걘 내가 멍청하게 굴 거라고는 예상 못한다고. 반심리학이라고 알잖아? 항상 먹히지.”

“그래서 넌… 러멘트가 멍청이로 만들려고 계획한 거지?”

“그래.” 콘드라키는 이 문장에 이상한 점이 없다는 투로 말했다.

“하지만 넌 날 멍청이로 만들 수 없지. 그래.”

“왜 네 총을 뺏게 해준 거야?”

“뺏으라고 준 거 아니야.” 클레프가 말했다. “내 옛 시절 속에 녹스게 두는 중이라.”

“넌 모두 봤어, 클레프. 모두가 잘 알고 있지. 마치 책 속의 이야기 같다고.” 콘드라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지.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잖아. 네 진짜 비밀 말이야. 넌 혼자에게만 말했지. 어쨌든 나한테만 말해줘. 내가 널 악마라고 생각했던 게 믿기지가 않는다. 그렇게 낮은 곳을 지향하던 네가 아닌데.”

클레프가 몸을 으쓱하고는 기다렸다.

“아무 말도 안하겠다고? 좋아.” 콘드라키가 산탄총으로 탁자의 의자를 가리켰다. “일단 잠깐이라도 앉자고. 내가 널 죽이기 전에.”

클레프가 앉았다. 콘드라키도 앉았다.

“노래 잘 부르네.” 클레프가 말했다. “근데 이 노래…”

“롭 캔터 노래야.” 콘드라키가 말했다. “인터넷 밈이지. 러멘트라면 알았을걸.”

“그걸 또 굳이 녹화해 놓는구나. 그 노래도.”

“준비할 시간이 있었으니,” 콘드라키가 말했다. “러멘트가 가진 정보를 유도심문 하려 했거든. 처음에 충격을 주는 게 좋겠다 싶어서. 그 다음에 손발을 묶고 여기 내버려 두거나, 판잣집 안에 넣고 다 터뜨리는 거지. 뭐로 할지 결정은 안했어.”

“누가 말해줬어?”

“날 평범한 사람으로 보지도 않았으면서, 내가 미주알고주알 털어놓을 거 같아? 일이 그렇게 돌아가진 않아, 클레피. 너도 알잖아.”

“하지만 넌 분명 경고를 했어.” 클레프가 말했다. “젠장맞을, 요즘엔 재단은 체라도 된 양 새는군.”

“빌어먹을 세상이 끝나가, 클레프. 윗분들이 말 안 해줬어?” 콘드라키가 웃었다. “현실에서의 눈물들을 보고도 알아내지 못해? 재단이 이걸 어떻게 고칠지도 예상도 못해? 어? 저들에게 그런 방법이 있다면, 진작 그랬겠지. 참나, 이게 끝이야. 재단에게도 끝이고.”

“최악의 상황에서 부활했네.” 클레프가 말했다.

“지금은 아니야.” 콘드라키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모든 게 산산이 부서져. 중심도 버티지 못하겠지. 단순한 난장판이 세상에 퍼질 거야. 어떻게 되는지는 알겠지.”

“예이츠 팬에게 널 소개하면 안 되겠다.”

“시발 예이츠는 누구야?” 콘드라키는 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이제 최종국면이야, 클레프! 그래서 저들이 내가 갈 때라고 결정한 거고. 네가 날 잡지 못해도, 달라지는 일은 없어. 세상의 끝은 모든 것의 끝이니까. 너, 나, 그냥 누가 먼저 가느냐의 차이야.”

“내가 먼저겠네.”

“그럴지도.” 콘드라키가 뒤로 몸을 기댔다. “근데, 난 개놈의 러멘트가 날 죽이게 둘 생각이 없었거든. 하지만 넌… 일이 이렇게 흘러가야겠지. 이렇게 끝이 나야 될 거야. 너랑 나랑, 함께.”

클레프는 기다렸다.

콘드라키가 바깥을 쳐다봤다. “결투네. 그래, 내 권총과, 네 산탄총. 헛간의 넓은 부분은 권총으로 맞출 수가 없지. 넌 어쩔래? 어쩌면 우리 중 한 명은 걸어 나가겠지만, 둘 다 못 나갈 수도 있어.”

콘드라키가 일어났다. 그는 클레프를 탁자에서 손짓으로 쫓아냈다. 둘은 밖으로 나갔다.

두 남자가 조용히 몇 분간 하늘을 바라봤다. 이상한 불빛이 저 멀리서, 하지만 이젠 가까이서 깜빡거렸다. 불빛이 지평선 너머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해가 뜨고 있어. 클레프.” 콘드라키가 말했다. “기분이 어때. 닥쳐야 할 일이 닥친 모습인데.”

콘드라키는 코트 주머니에서 권총을 꺼내고 클레프에게 산탄총을 넘겨줬다.

클레프는 손가락에 닿자마자 방아쇠를 당겼고, 콘드라키의 가슴에 정면으로 발포되었다. 콘드라키는 봉제인형처럼 뒤로 날아갔다. 그의 권총도 함께 날았다.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클레프가 시체에게 다가갔다. 내려다보았다. 그는 산탄총을 다시 들어올렸다가, 다시 내렸다.

“내 머리에 총알을 박았어야지, 콘.” 클레프가 말했다. “왜 그냥…”

시체가 움찔거렸다. 콘드라키가 경련하듯 움직였다.

“늘 알았거든…” 콘드라키는 애써 단어를 구성해내려 했지만, 다음 단어 중 몇몇은 쉽게 흘러나왔다. “…네가 날 챙겨주는 거.”

클레프는 죽어가는 남자 옆에 쭈그려 앉았다. 그는 여전히 산탄총을 들고 있었다. 그는 동정적이었으나, 멍청한 사람이 아니었다.

“저들은 우리에게 뭘…” 콘드라키가 말했다. “우린 더 살 수도 있었어. 우린 진짜 삶을 살 수도 있었어. 우린 일반인일수도 있었어. 하지만 젠장… 저들이 망쳐버렀군. 저들이 우릴 전설로 만들었어… 그리곤 우리가 좆같이 쓸모없어지자 한데 던져버렸지. 저들이 우리에게 무슨 일을 시켰는지 알잖아… 지금 너에게 무슨 일을 시켰는지도…” 피가 콘드라키의 입 구석에 흘러나왔다. “만족하지 않을 거야. 절대 만족하지 않을 거야.”

클레프는 기다렸다.

“난…” 콘드라키가 반쯤 웃었다. “나도 널 챙겼지, 클레프. 난 언제나 챙겨줬어. 그러니… 내가 죽기 전에 네가 마지막으로 알아줬음 했어.”

콘드라키가 하늘을 쳐다봤고, 불빛이 현실의 틈에서 발광하고 춤추면서, 초점을 잃어가는 눈에 보라색과 녹색으로 비추었다.

그렇게 콘드라키는 가 버렸다.

클레프는 그 이후로 아주 오래 기다렸다.

“나도 그래 콘.” 클레프가 말했다.

판잣집 안에는 가솔린이 있다. 클레프는 이번에 시체를 태웠다.


.
세상이 진정으로 끝나갔다. SCP-2000으로 향하는 기나긴 드라이브에, 클레프의 이식물마저도 그가 보는 것의 절반을 처리해내지 못했다. 덜컹거리는 트럭이 현실 닻이 설치되지 않았더라면, 클레프는 10마일도 못 갔으리라 확신했다.

건물 단지까지 1마일도 안 남았을 때, 뭔가가 트럭 안에서 일어났다. 아마 연소의 개념도 붕괴되었나 싶었다. 아니면 무언가로 바뀌거나. 클레프는 머리가 아파왔고, 트럭에서 나와 걸어갔다.

제3의 눈을 통해, 클레프는 이름 없는 것들이 지평선과 평행하게 어슬렁거리는 모습을 보았다. 온다. 클레프는 강렬한 기시감에 역겨워졌다. 아니면 체험감이거나. 둘 중 하나겠지.

전에도 봤잖아. 다시 일어나고 있을 뿐.

클레프는 이 생각이 어디서 흘러들어왔는지 몰랐다. 한 가설이 머리에 퍼뜩 지나갔다. 이런 시간에 모두가 똑같이 할 법한 질문이. 모두 그저 음울한 상상 아닐까? 현실 전환에 따른 절대로 믿을 수 없는 보호 수단으로 남아있는 일종의 메아리 아닐까? 죽어가는 우주의 생각이 아닐까?

이름 없는 신— 아니, 신은 아니지— 그렇게 직관적으로 이해되지는 않아— 하지만 신이 아니라면 그것을 뭐라 불러야 하지?

클레프는 고개를 가로젓고, 머릿속의 말들을 제쳐두려고 했다. 자기 것이 아닐 수도 있는 생각에는 집착하지 않는 편이 최고였다. 이름없는 신의 사막을 지나왔으니… 시발. 클레프는 다시 고개를 가로저으며, 머리를 비우려고 분투했고, 그러다가 그의 인식 필터 중 하나를 껐다. 그리곤, 클레프는 다시 발을 내딛었다.
.
100야드 이내에 근접하자 주변이 다시 실제처럼 느껴졌다. SCP-2000은 아직까지도 금이가는 세상에서 안정성의 오아시스였다. 2000 덕분은 아니었다. 그 아래 숨겨진 것 덕분이었다.

클레프는 아직도 그게 뭔지 몰랐다. 이제 알아내리라고 예상은 했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몰라도 크게 신경쓰이지는 않았다.

클레프가 탑을 내려갔다. 명단에는 이름 하나가 더 남았다.


짧은 현수교가 작은 바다 중앙의 섬으로 인도했다.

섬은 공중에, 바다 위에 떠서, 거대하고 어슴푸레하게 빛나는 꽃으로 맨 위를 장식했다. 꽃의 반쯤 닫힌 꽃잎은 격자 형태로, 무지개 빛의 끈으로 짜여 있었다.

꽃잎과 뿌리는 깜빡거리는 무늬로 가득했다. 밝고 꽃잎 속에서 움직이고, 뿌리에는 빨강과 금빛이었다. 단어다, 클레프가 알지 못하는 문자로. 상쾌하고 축축한 땅 내음이 이 장소에서 발산되었다. 영속된 봄이라.

철책에서 서있는, 바다를 보고 있는, O5-12가 있다.

아니지. O5-12가 아니다. 이 모든 일이 지나고 나서는 아니다. 그는 자신의 이름, 아니면 적어도 이 남자가 예전에는 자신이 담았던 이름으로 불렀다. 트로이 러멘트.

클레프가 가까이 다가갔고, 러멘트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의 눈은 공중에 뜬 섬과, 복잡하게 역인 뿌리와 땅만을 바라보았다.

“참 물건이죠, 예?” 러멘트가 말했다.

“2000을 고치려 하지 않는군.” 클레프가 말했다. “넌 이걸… 이게 뭐든 간에 만들고 있었어.”

러멘트가 키득거렸다. “만들어요? 아뇨… 이건 우리 우주보다 오래된 겁니다. 우리 우주 전의 우주보다 오래됐지요. 우리 우주의 전의 전 우주보다도 오래됐습니다… 이제 이해하셨군요.”

클레프가 몸을 으쓱했다. “이 망할 건 뭔데?”

“우린 꽃이라고 부릅니다.” 러멘트가 말했다. “우리의 마지막 백업 계획이죠. 가장 잘 숨겨진 비밀이자, 무엇보다도 이것만이 현실입니다. 모든 작업자들은 떠나자마자 기억을 지워버립니다. 상급감시사령부 빼곤 아무도 몰라요. 적어도 이 시간대에선.” 러멘트가 달랑거리는 뿌리를 가리켰다. “저게 뭔지 아직도 모르겠어요?”

“일종의 문자나, 암호 같은데.” 클레프가 말했다. “사용설명서?”

“참나. 좋은 추측이네요.” 러멘트가 말했다. “하지만 근접하진 않았어요. 저건 발동 조건입니다.”

클레프가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조건?”

러멘트가 마침내 몸을 돌려 클레프의 눈을 마주보았다. 그는 클레프 손에 있는 파일철을 가리켰다. 명단이다.

클레프가 멈칫했고, 얼굴을 더 깊게 구겼다. “장난치지 말고.”

“진담입니다.”

“이 모든 사람을 죽이는게 — 그게 저… 것의 ‘발동 조건’이라고?”

“그런 식으로 생각하진 마요.” 러멘트가 말했다. “대신… 발동에 방해가 되는 위험한 요소들을 처리한다고 생각하면 도움이 되겠군요. 적어도 전 12가 저한테 그렇게 설명했습니다.”

“다른 말로는, 전부 개소리란 거지.”

“저도 그렇게 말했어요. 전 12는 저보고 웃더군요.” 러멘트가 꽃을 바라보았다. “각각의 뿌리와 꽃잎에는 우리가 꽃을 사용할 때까지 일어나야할 사건들과 죽어야할 사람들이 암호화된 목록으로 적혀 있어요. 시간대마다 조건이 달라지는 것 같더군요. 항상 죽으라는 건 아니지만, 언제나 무슨 일은 일으켜야 하죠…” 러멘트가 몸을 으쓱했다. “기쁜 소식이라면, 재단 요원을 마지막에 처리했다고 전해드리죠. 일을 망칠 수도 있었지만, 우린 다른 방법을 찾고 싶었어요… 어떤 다른 방법이든.”

클레프는 느린 게임을 풀어갔다. 적어도 확실하게 하고 싶었다. 아니면 작게나마 남은 양심의 가책을 덜고 싶었다. “뭘 하는 건데?”

러멘트가 한숨을 쉬었다. “답을 아는 질문은 하지 말아주시죠. 알잖아요, 클레프. 격리 실패… 새로운 변칙 개체… 갈등, 전쟁, 대륙 규모의 세계적인 파괴. 당신이 죽인 모든 그린들도 봤잖아요?” 러멘트가 클레프에게 날카로운 시선을 던졌다 “몰랐다고는 하지 마시죠.”

“뭘 알아?”

“왜 그래요. 역사에서 그린이 얼마나 많이 튀어나왔죠? 성인도 있고, 마법사도 있고…”

“이런 맙소사.” 클레프가 말했다.

“전 여기서 감 잡았죠.”

“이건 재미없었어.”

러멘트가 이죽였다. “약간은 재밌는데요.”

“그린만으론 현실이 해졌다고 할 수 없어. 상호연관은 인과관계가 아니라고. 너한테 이걸 말해 줄 필요는 없을텐데.”

“그와 별개로 현실은 정말로 해져가요.” 러멘트가 말했다. “아주 오래 전부터 그랬죠. 대부분의 경우에, 우린 아무것도 못했어요. 첫 부분은 풀려나갈 때, 우리는 무시했지만, 계속 풀려나가자… 상급감시사령부는 적극적으로 당신을 구상에서 불러왔죠. 지금이요? 태피스트리가 다 흐트러졌어요. 별들이 꺼져갔죠. 무언가가 대신 들어왔고.”

“ZK급 현실 종말 시나리오.” 클레프가 말했다. 피곤했다. 정말 좆같이 피곤했다. “그냥 이론상의 얘긴 줄 알았는데.”

러멘트가 빙그레 웃었다. “아뇨. 안 그랬죠.”

“그게 지금 일어나고 있다.” 클레프가 말했다. “어떻게?”

러멘트가 어깨를 으쓱했다. “알아야 하나요?”

“아니라고 말해줬으면 싶어서.” 클레프가 말했다. 그리고 정말로, 그런 일은 없었다. “그래서 이 꽃이 고친다는 거야?”

“아뇨.” 러멘트가 사과라도 하는 듯 미소지었다. 그래도 그러기엔 늦었다는 건 클레프도 알았다. “현실을 고칠 순 없어요. 앞으로 오는 일을 막을 순 없죠. 더는 못 버텨요. 적어도 이 시간대는 그렇죠. 앞으로 올 일은 이미 왔어요. 당신도 봤잖아요? 지평선에 있지 않던가요? 문 앞에 늑대가 왔어요. 누군가는 검은 달이 운다고 말하겠죠. 당신도 듣지 않았나요? 전 들었어요. 오래 전부터 들었죠.”

클레프가 눈을 굴렸다. “핵심만 말해, 이 멜로 드라마적 개새끼야.”

러멘트가 웃었다. 이번에는 긴 침묵으로 서서히 줄어들기 전의 순간을 진정으로 즐기는 듯 들렸다.

“항복하는 거죠.” 러멘트가 말했다. “현실을 리셋하는 거예요. 시간대를 돌리는 거죠.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얼마나 많이 그랬지?” 클레프가 물었다.

“무슨 말인ㅈ—”

“이게 무슨 말인지는 너도 시발 잘 알텐데.” 클레프가 말했다. “전에도 얼마나 많은 시간을 되돌렸지? 얼마나 많은 시간대를 되돌렸냐고?”

러멘트가 깊게 숨을 들이켰다. “저희도 몰라요. 기록학자도 몰라요. 저흰 그저 몇 가지 시간대를 되돌렸을 때의 흔적을 해독할 뿐입니다. 그 이상으론… 저희가 처음은 아니라는 사실만 알아요.” 러멘트가 호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말하는 걸 보니… 당신은 이게 이미 일어났다는 사실을 아는군요? 헤. 부분적인 현실 보호 수단은 개년이라니까… 제가 볼 땐 그러다는 거예요. 어쩌면 당신은 이 삶의 기억을 다음 생애의 어느 순간에 받을지도 모르죠.”

“좆까, 트로이.” 클레프가 말했다.

러멘트는 웃음을 떠트렸다.

클레프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진심이야. 좆까. 난 방금까지 내 주변 세상이 끝나가는 동안 내가 알고 사랑하던 모두를 죽였어. 내가 아는 한, 네가 진짜로 알고 있는 한, 열에 천번은 곱한 좆같은 시간동안. 난 미쳤어야 했고, 실망했어야했지만, 아니야, 난 그냥… 다 끝났어. 난 시발 다 끝났다고. 난 네가 이보단 낫다고 생각했어. 넌 우리와 함께했었고! 넌 방 안에 괴물과 잇는데, 도망칠 곳이 없을 수도 있을 때의 감정을 아니까. 그리고 지금, 세상의 끝에서, 내가 보기에 넌 ‘더 큰 선’을 향해 다른 O5들과 발맞춰서 행진하고 있잖아. 좆같은 줄을 당기고 있는 또 다른 인형사잖아. 난 아무도 안 믿어. 난 믿었어. 그런데 뭘 위해서 이랬겠냐고?”

러멘트는 그저 자리에 서서 받아들였다. 그는 예상한 듯 했고, 실제로도 자신에 대한 실망감이 클레프의 항해에 바람을 불어주리라고 알고 있었다.

“넌 모든 걸 고칠 수 있어, 트로이.” 클레프는 오래되고 익숙한 씁쓸함의 새로운 들쑥날쑥한 단면을 느꼈다. “넌 고칠 수 있어.”

“죄송해요, 클레프.” 러멘트가 말했다. “가치 있는 일이었는데… 시도는 해봤어요.”

클레프는 러멘트를 지나, 이계의 꽃을 보았다.

“내가 거부하면?” 클레프가 물었다. “내가 꽃을 날려버리고, 세상을 재시동하지 않는다면?”

러멘트를 어깨를 으쓱했다. “세상이 그냥 끝나는 거죠. 뭘 생각한 거예요? 참 좆같은 결말이지만, 지금은 커튼콜의 시간이에요, 클레프. 탈출구가 있다면, 정말이지 전 거기로 갔을 거예요. 하지만 지금은… 딱 하나만이 남았어요.”

“그게 뭐지?”

“명단에 마지막 이름이 있잖아요.” 러멘트가 말했다. 그는 꽃을 다시 쳐다보았다. 그의 눈은 짧은 순간에 더 굳었고, 그 다음 총을 어깨에 메는 권총집에서 꺼내 클레프에게 내밀었다. “괜찮다면 머리에는 쏘지 말아주세요.”

클레프는 러멘트에게서 총을 집어들었다. 그는 총알이 장전되어있는지 약실을 확인했다. 러멘트는 클레프를 바라보며 차분히 기다렸다.

클레프는 총구를 러멘트의 가슴에 놓았다. “난 네 불알을 쏴줄 만한 일종의 개자식일수도 있어. 아니면 네 머리를 쏴버릴 다른 류의 개자식일 수도 있고. 지금, 난 그냥 지쳤어. 지옥에나 떨어져.”

러멘트의 미소가 말라갔지만, 종국에는 축축해져, 부드럽고도, 무너지는 둔탁한 음으로 마침표를 찍었다.


클레프가 꽃으로 다가가, 목록의 마지막 지시사항을 읽었다. 더 이상 이름은 없다. 그저 세상의 끝에서 꽃만이 남았다.

클레프가 다가가자 흙 위에 흰색 쪽지가 놓여 있었다.

클레프가 쪽지를 집었다. 글씨는 러멘트의 글씨체였다.

안녕, 클레프. 제가 거짓말했어요. 명단에 이름 하나가 더 남았어요. 죄송해요.

뒤에서 들리는 발자국 소리. 클레프가 몸을 돌리자 —

쪽지는 클레프의 손에서 거품이 되어 터지며, 클레프를 얼어붙게 했다. 단단하고도 차가운 물질이 그의 팔과 다리를 휘감았다. 클레프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은 재질의 사슬. 초자연적으로 움직였다.

한 여자가 클레프 앞에 섰다. 한 손에는 이상한 권총이 들려있었다. 클레프는 입자가속기를 알아보았다. 완성된 줄은 몰랐던 시제품이었다. 다른 손에는 13인치짜리 식칼이 들려 있었다.

클레프는 내장이 뒤틀리는 느낌이 들었다. “시발. 진짜 시발. 알았어야 했는데.” 클레프가 여자를 바라보았다. “네가 명단에 없었구나.”

“일을 대충대충 하는구나.” 그녀가 말했다. “안녕, 클레프. 내 이름은 소피아 라이트고. 넌 내 전 남자친구를 죽였지. 죽을 준비나 해.”

클레프가 은 사슬을 잡아당겼다. “소개 고마워. 하지만 그 칼이 무슨 짓을 하는지는 우리 모두 알고 있지. 이거 너무 많이 죽는 거 아니야?”

“너 가지고?” 라이트가 웃었다. “뭘 그정도 가지고.”

클레프가 미소를 지었다. “젠장할, 완벽하구만.” 클레프가 말했다. “마지막 남은 여자가 언제나 막판에 괴물을 죽이지.”

“걔 역할이 그렇지.” 라이트가 말했다.

“예외는 있어.” 클레프가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덧붙였다.

라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부분이 그렇지.”

클레프는 잠시 멈췄다. 머릿속은 역공에서, 탈출할 기회로, 두 번째 기회로 빠르게 돌아갔다. 그리곤 하나하나 버려갔다.

클레프는 말을 하려고 입을 벌렸다. 할 말은 찾아야 했다. ‘그들에게 미안하다고 전해줘’는 ‘용서해달라고 전해줘.’만큼 의미가 없었다. 결국,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주가 다시 시작할 시점에서 태어나지도 않았을 테니까.

고민 끝에, 저 좋은 일만 하기로 했다.

“다음엔 날 좀 나중에 불러줘. 이 일을 다시 하기 전에 모두를 알게 하지 말아달라고.”

라이트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해.”


과거이자 미래의 O5-2가 세상의 끝에서 꽃으로 걸어들어갔고, 마지막으로 뒤돌아보다가, 우주의 불을 끄고 문을 닫았다.

그리고 태양은 꺼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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