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遠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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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루의 한 도시에는 태양을 묶기 위해 고대인들이 만든 거대한 해시계가 있었다.

영국의 한 평원에는 저승의 사람들을 기리기 위해 고대인들이 만든 돌탑이 있었다.

이집트의 한 사막에는 파라오의 안장을 위해 고대인들이 만든 사각뿔 무덤이 있었다.

짹, 짹짹.

옛 문명의 잔재가 스쳐지나간 꿈을 뒤로하며 나는 새소리와 함께 아침을 맞이했다. 침대 옆 탁상에 두었던 안경을 쓰고 출근을 준비하는 아침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첫 출근 이래로 고수해 온 단색의 와이셔츠에 적당한 바지를 맞춰 입고 일곱 시 반 경까지 독서에 몰두한다. 벌써 3년 가까이 들여 온 습관적인 일상이었다.

그런데 오늘만큼은 시간이 되어도 책이 잘 덮이지 않았다. 칸트 지음. 『순수 이성 비판』.잘 읽힌다고는 입이 찢어져도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지만 조금만 더 읽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다. 아마 나는 억울한 것 같다. 몇 번이나 도전장을 내민 이 책을 아직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다는 데 대해서.

반쯤 읽은 책에 책갈피를 끼우고 덮었다. 이 이상 지체하면 지각할 수도 있으니까. 교사라는 입장상 개근상은 주지 않는다고 해도 정시출근이 의무다. 10분 15분씩 늦으면서 짜증나게 하는 건 학생들로 충분하다는 교감의 노골적인 엄포에 회식 자리가 한바탕 웃음바다가 되었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했다.

책을 가져갈 수는 없었다. 닫히는 현관문 사이로 책장에 기대 선 칸트가 비웃음을 보내고 있었다.

오피스텔을 나와 역을 거쳐 지하철을 타며 흘러간 풍경은 여느 때 같이 평화로웠다. 상점을 여는 상인들이나 학교로 향하는 학생들. 회사로 향하는 남녀노소를 불문한 직장인들까지. 새파란 아침하늘에서 쏟아진 햇살이 건물과 길가를 비추는 사이에 가로수가 작은 녹음을 만든다.

오케스트라의 협주곡에 비유한다면 아마 투박한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곡일 것이다. 감회가 새로운 나와 달리 누군가에게는 매일 아침 보는 지겨운 길일수도 있을 것이다. 지겹더라도, 오늘이 금요일이라는 사실을 축복하며 견디는 누군가도 있을 것이다. 아직은 쌀쌀한 날씨에 눈살을 찌푸리는 누군가도 있을 것이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아름다움 같은 건 없는 길가의 풍경이다.

하지만 분명히 빛나는 풍경이었다.

오늘을 살아가는 이들을 축복하는 세상의 풍경이었다.

그래서일까. 나는 이 풍경이 더더욱 아름다웠다. 이번 주 마지막 출근길의 입맛은 유난히 쓴 맛이 났다. 이제는 그저 그 뿐인 감상이었다.

그러니까 이런 일은 좀 없으면 좋겠는데.

"거기, 학생들 좀 못 보게 해요!"

"혹시 선생님 되십니까? 지금 이 학생 신원이…."

"헐, 미친. 잔인해."

"쟤 4반에 걔 아냐?"

교정의 나무에는 피가 묻어 있었다. 옥상에서 뛰어내려 자살. 옥상을 막아놓던 자물쇠는 망치에 맞아 허물어져 망가졌다고. 지나친 학업 스트레스. 교우관계에서의 난항. 담임은 뭘 하고 있었냐는 일갈. 변명과 책임회피. 자살의 가해자는 침묵하는 이들일까, 울부짖는 이들일까. 유서에는 모든 것에 질렸다고 적혀있었다. 허무로 새긴 마음의 자국은 구역질이 치밀 정도로 깊지만 산만했다. 누군가의 손길 하나로 돌아설 수 있을 정도로.

"최쌤."

"…네."

"4반에 이쌤 알지? 최쌤 바쁜 거 아는데 4교시만 좀 들어가 주면 안될까? 아침에 그… 일. 알잖아."

쉽게 목소리를 높이지만 익살과 유머로 교사진을 이끌던 교감의 표정은 초췌했다. 덕분에 방금 전까지 조금만 더 희망을 가졌더라면 좋았을 거라며 자살한 학생을 규탄하던 마음 속의 소리가 그쳤다. 교감의 표정에서는 자책이 읽히지 않았다. 손을 내미는 사람은 아마 없었을 것이다. 늦든 빠르든, 일어나야 할 일이 일어났을 뿐이다.

부디 좋은 곳으로 가기를. 그리고 이 무력한 선생을 용서하지 않기를.

짧게 수긍의 의사를 밝히자 교감은 간신히 조금 표정을 폈다. 목례하고 뒤돌아 몇 걸음 걸어 모퉁이를 돌자 아무도 없는 계단이 있었다. 교감의 발소리는 멀어져 희미했다.

죄 없는 벽을 구둣발이 걷어차는 소리만 높았다.

4교시에는 예정대로 수업을 진행했다. 애들 머릿속에 무슨 공부가 들어가겠느냐만은 항상 그래왔듯 비일상은 일상에 묻힌다. 일부러 정규 진도 대신 서정시 해석이나 몇 개 판서하기는 했지만 받아적는 학생은 극히 적었다. 대부분이 영혼을 놓고 앉아있기만 할 따름이었다. 바라던 바다. 집중 같은 거 기대한 적 없다.

오늘만큼은 공부보다도 머리를 비우고 일상으로 돌아가는 게 중요하다. 그리고 그걸 이끄는 게 선생의 역할이다.

수업을 마치고 교사용 급식실로 향하니 소문이 파다했다. 교감과 몇몇 선생들은 경찰서로 불려 간 모양이고, 교무실에는 자살한 학생의 학부모가 친 난리의 흔적이 군데군데 남아 있었다. 올해 갓 부임한 젊은 선생은 똑똑한 아이였다며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걸 위로하는 남선생은 표정에 드러내놓지는 않았어도 좋은 기회를 얻은 것처럼 보였다.

세상 잘 돌아간다.

다 먹은 식판을 들고 먼저 일어나 급식실을 나섰다. 슬슬 시간이 된 모양이다.

어느샌가 복도는 구름에 뒤덮여 있었다. 창문이 사리지고 벽이 녹아든다. 돌바닥마저 구름으로 변해버린 뒤에는 사방이 반투명한 구름으로 가득했다. 저 멀리에 색색의 별로 짠 그물이 먹구름을 가두고 있었다. 원래 그런 곳이었다고 말하기에는 먹구름 사이에 흐르는 뇌전이 예사롭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특이한 일은 또 아니었다.

그냥, 슬슬 시간이 된 것 뿐이다. 저 쯤에서 소총을 멘 육중한 군장 차림의 남자가 손짓하고 있었다.

"여어, 니아. 애들 데리고 소꿉놀이는 할 만 하냐?"

"전혀. 애가 하나 또 뛰어내렸어."

"흐음, 그건 아쉽네. 그딴 식으로 버릴 목숨이라면 이 쪽에 좀 빌려줬으면 좋겠는데."

조용히 노려보자 사내는 어깨를 으쓱였다. 제가 뭐 틀린 말이라도 했냐는 듯. 아 뭐 그래. 내전지역에서 죽느냐 죽이느냐를 일상으로 살아 온 전쟁광에게는 자살할 거라면 총알받이라도 돼 줬으면 할 테지. 네가 그런 식이니까 슈브한테 맨날 까이는 거다. 섬세함이 뒈져있다.

"목숨이 그렇게 아깝다면 말투부터 좀 고치는 게 어때, Mr.키티?"

"하하. 한 번만 더 날 그딴 식으로 부르면 대가리를 날려버린다고 경고하지 않았었냐, 앙?"

"그쯤에서 그만 하지들. 오랜만에 만나서 한다는 게 겨우 싸움질이야?"

그쯤에서 들려온 제 3자의 나긋나긋한 목소리는 부드럽지만 강경하게 우리의 전의를 꺾어 넘겼다. 동시에 시선을 돌리자 어느샌가 나타난 동그란 의자에 여자 한 명이 앉아 있었다. 언제 나타났는지, 왜 나타났는지 따위에 관심은 없다. 하지만 두 가지는 확실했다.

첫 번째. 우리는 구면이고, 두번째. 오늘 같은 날 그녀는 싸움을 바라지 않는다.

"너야말로, 오랜만에 봐서 그런지 다리가 평소보다 많이 얇아보이는데. 퍼 주다 못해 이제는 다리까지 떼어 주고 온거냐?"

정정한다. 섬세함이 죽어있는 게 아니다. 사고기능이 죽어있다. 출고 과정에서 이성적 사고라는 기능이 망가진 불량품이다.

"내 다리를 핥고 싶다는 바보들이 워낙 많아야 말이지. 안타깝게 됐어, 키트. 오랜만이야, 니아. 저 총 든 원숭이 상대하느라 수고 많았어."

…아무래도 다시 한 번 정정이 필요할 듯 하다. 확실히 오늘 같은 날 그녀는 싸움을 바라지 않는다. 하지만 걸어오는 싸움에 대해서는 철저히 짓밟는 게 필요 이상의 기력을 소모하지 않는 길이라고 판단한 것 같았다. 망설임을 잘라 낸 언어폭력에 Mr.키티는 선 채로 굳어 어깨에 맨 총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오랜만, 히스. 그래서 그, 다리는…."

"사고야. 그냥 사고. 의료봉사 나간 곳에서 폭탄이 터졌거든. 그래도 뭐, 나름 살만 해. 그런데 한 명이 안 보이네? 슈브는?"

이번에는 내가 어깨를 으쓱일 차례였다. 히스 또한 별 기대 없이 물었던 말이었던 듯이 힘없는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녀의 행적을 파악한다는 건 사람이 할 만한 짓이 아니었다. 또한, 결정적으로 그럴 필요가 없었다.

"전부 모였나. 내가 좀 늦은 것 같네."

"아냐, 나도 지금 막 왔어. 어서 와, 슈브."

본인의 일정을 초 단위로 꿰고 있는 생체초침에게 평범한 시간감각 따위로 참견이 필요할 리 없을 테니까.

이걸로 네 명이 모두 모였다. 그렇다는 건 이 이상 잡담에 할애할만 한 시간은 없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구름을 블럭 삼아 별로 이어 붙여 쌓은 성은 더 이상의 과부하를 견디기에는 불안정했다.

시간이 되었다.

잠시 눈을 감자 허무가 찾아왔다. 허무에 몸을 담근다는 것은, 허무로 나아간다는 것. 내가 허무에 있다면 너는 실존에 있다. 너는 나를 바라보며 나는 너를 바라본다.

천천히 눈을 뜨자 더 이상 구름은 나를 감싸고 있지 않았다. 요동치는 구름의 성을 바라보며 감개에 젖었다. 고향을 떠나고, 언제부터 이 일을 시작했는지조차 까마득한 지금 돌아갈 수 없는 고향을 비추는 심정은 형언하기 힘든 무언가였다. 갖가지 감정이 섞여 요동치며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감정을 끌어올렸다.

본디, 하얗고 하얗던 내 고향에 대한 그리움인가.

지금, 세상에 범람하는 검은색에 대한 탄식인가.

아니면, 검은색을 떼어 격리한 우리의 죄에 대한 탄식인가.

어쩌면, 차고 넘쳐 역류하던 우리의 본질적인 검음에 대한 경멸인가.

그럼에도, 검은색의 세계라도 지키고자 발버둥친 노력에 대한 자조인가.

혹여, 세 번째에 이르러 칠한 흰색과 검은색에 대한 후회인가.

마침내, 별빛이 다함을 반복하고도 다시 한 번 별빛을 자아내는 어리석음에 대한 슬픔인가.

어째서인가. 겹쳐졌으나 달리 채색된 세 개의 세계에서 자살했던 학생의 붉은색이 보였다. 그 참극을 보고싶지 않아 우리는 모든 참극을 지옥이라는 쓰레기통에 밀어넣었고, 차고 넘친 쓰레기통은 우리에게 새로운 도화지를 요구했다.

아름다운 것. 선량한 것. 깨끗한 것. 다정한 것.

흉물스런 것. 사악한 것. 더러운 것. 무정한 것.

그들이 벌일 각축전을 위한 세상이라는 도화지를. 그들이 발을 딛기 위해 우리는 많은 것을 준비했다. 사람, 건축물, 사건. 인티와타나가 그러했고, 스톤헨지가 그러했으며, 피라미드가 그러했다. 어딘가에는 완벽히 똑같은 사람이 둘 이상 존재했고, 어떤 시간에 반드시 일어나는 사건이 있었다.

그것으로 세계와 세계는 이어졌다. 본디 스스로 나아가야 했을 세계는 악의에 의해 검게 칠해졌고 위선에 의해 희게 칠해졌다.

더 이상의 푸념은 무의미하다. 누군가를 죽였건, 누군가를 지키지 못했건, 누군가를 위해 희생했건 시간은 모든 것을 집어삼킨다. 성을 갉고 별을 터트린다. 그 앞에서 구름은 원래 흩어져야 할 것에 지나지 않았다.

자, 시간이 되었다. 흩어지는 먹구름을 별빛 그물로 엮어 다시 한 번 성을 세운다.

우리는 반복한다.

세계의 존속을 위한

다른 세계의 멸망을.

다시 한 번, 아기 예수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제 4,615,736,147번 세계. 2017년 X월 X일, 12시 56분 11초. 가동 종료.
제 4,615,736,148번 세계, 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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